# 19
19화.
「우리 아가한테 미안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고 그저 엄마의 부드럽고 여린 속삭임이 좋아 웃기만 했다. 볕 좋은 날이면 바구니를 준비해서 피크닉을 준비했다. 그리고 할머니 몰래 창고로 가서 이 기타를 들고 나와 향기를 숲으로 데려갔다.
「쉿! 할머니한테는 비밀이야.」
둘만의 비밀이라는 말이 좋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풀 향이 가득한 숲에서, 노란 은행잎이 깔린 나무 아래에서. 어느 날은 동요를, 어느 날은 오래된 팝송을. 엄마는 그렇게 그녀가 아는 세상의 모든 노래를 불러 줬었다.
그 영향이었을까.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향기는 노래도 잘하고 기타도 곧잘 쳤다.
「와, 우리 향기 노래 잘한다!」
「나도 그렇게 치는 거 가르쳐 줘 엄마.」
「지금도 좋은데? 네가 듣기 좋으면 되는 거야. 따로 배울 필요 없어.」
그저 띵! 줄 하나만 튕겨도 엄마는 환하게 웃고 손뼉을 쳐 주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날은 할머니가 마을로 내려가길 목을 빼고 기다렸다. 노래를 싫어하는 할머니를 엄마는 이해해 줘야 한다고 했다. 장난감이나 책보다 기타가 더 좋았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에 피가 맺히고 물집이 잡히고 터져도 멈추지 않았다. 누가 시켜서 한다면 절대 못 할 일이었다. 좋으니까, 그저 좋아서 한 일이다.
「우리 종달새 엄마한테 노래해 줘.」
악보도 없고 연주법도 몰랐다. 그저 엄마가 불러 줬던 노래를 그녀의 느낌대로 기억을 더듬어 연주하며 부르곤 했었다.
〈버스 타고 올라와, 으음 아저씨를 만났어 고향이 하나도 안 그리워 그리우면 안 돼 괴상한 둘리는 사나운 육식 공룡 향기의 영원한 친구 둘리가 있으니까.〉
“엄마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게 됐어. 조금만 기다려.”
노래가 끝나자 빨개진 손가락 끝을 문지르고는 기타를 케이스에 넣을 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향기는 벨도 누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온 아주머니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일하는 아주머니는 아닌데, 어떻게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걸까. 향기의 시선이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보자기에 닿았다. 아무래도 일하는 분이 바뀐 것 같았다. 향기는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물건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저 주시면 돼요.”
“이걸?”
“네.”
연선은 얼결에 들고 온 김치 통을 건네주었다. 내일 무현과 선 볼 상대가 놓치기 아까운 여자였다. 일부러 햇김치를 담아 핑곗거리를 만들어 다시 한번 다짐을 받으러 왔는데 벌써 나갔나. 막내 코디네이터가 바뀌었나 보다 생각했다. 연선은 쪼르르 주방으로 가는 여자의 뒤를 따랐다.
“물 한 잔 드릴까요?”
“물? 왜?”
“힘드실까 봐요. 헤헤.”
연선은 물 잔을 받아 목을 축이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어린 아가씨가 싹싹하네.
“그런데 아가씨는 누구예요?”
“저는 그러니까…… 집사람인데요?”
집사람?
휘청하던 연선이 얼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 시각 무현은.
촬영을 끝내고 본가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역시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다. 무현은 부재중 전화가 수없이 찍힌 휴대폰을 확인하고 두통이 일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불길하다. 받지 않으면 이렇게 집요하게 전화할 분이 아닌데. 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
-누, 누구니? 이, 이, 아가씨 누구야!
“혹시…… 집에 오셨어요?”
-지, 집사람이라니? 집사람이라니!
집사람은 또 무슨 소린지.
“바로 가겠습니다. 한 시간, 아니 40분 안 걸립니다.”
전화를 끊고 무현은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두드렸다.
“차 좀 돌리자. 집으로.”
“연남동 말고? 너희 집?”
“음.”
무현은 시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이젠 빼도 박도 못 하게 생긴 건가.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이젠 달릴 일만 남았으니까.
* * *
벌써 식구들이 모였는지 현관 앞이 복잡했다. 무현 저에 관한 일이라면 조모와 어머니는 무서운 결속력을 보여 왔다. 마치 고부간의 갈등은 다른 집 사정인 것처럼.
무현은 표정을 가다듬고 거실로 올라갔다.
식구들 모두 그의 출현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향기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너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편을 가르듯 향기와 마주 앉은 식구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인다. 상대적으로 향기는 더 조막만 해 보이고.
입맛이 까다로웠던 그가 키가 큰 건 유전자 덕이라고 말할 만큼 식구 모두가 큰 편이었다. 여자들 평균키가 1미터 70센티가 된다면 말 다 한 거겠지.
차를 준비해 나오던 이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무현에게 다가가 소곤댔다.
“뭐 해?”
너까지? 매번 느끼는 거지만 기동력이 정말 대단한 집안이다.
“한 건 크게 하셨던데요, 오라버니?”
“아리는?”
“아리 아빠. 이런 구경을 놓칠 수야 없지.”
마침 친정에 갔는데 기쁜 소식을 들었다며 이진이 키득거렸다. 동생의 목소리에 연선이 그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무현은 걸음을 옮겼다.
“왔니?”
“네.”
일제히 시선이 몰리는데 무현의 눈엔 향기가 먼저 들어왔다. 가뜩이나 큰 눈이 그를 발견하고 커다래지더니 곧 흔들리고 아래로 깔린다. 마치 죄지은 사람처럼.
뭐지? 무슨 사고를 친 걸까. 저 원피스는 또 뭐고. 분명 그가 올 때까지 입 다물고 있으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그새 사고를 친 걸까.
무현은 어른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향기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괜찮아?”
향기답지 않게 속눈썹만 닫았다 올리는 얌전한 행동에 의문부호가 그려졌다. 기가 죽은 건지 낯가림을 하는 것처럼 얼굴을 붉힌다. 마치 요조숙녀라도 된 양. 허벅지 위에 포개진 향기의 하얀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떨고 있는 거야? 무현은 향기의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렸다. 아래로 향했던 눈동자가 순간 치켜떠지더니 그를 쏘아본다.
무현도 스스로의 행동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미 뻗은 손. 식구들에게 보여 주기식 쇼맨십도 필요하고 거둘 생각이 없었다.
무현은 빠져나가려고 꼼지락거리는 손을 힘 줘 잡고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 가는 중이었습니다.”
연선과 식구들은 무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여자의 손을 잡고 있는 무현의 손에 닿아 있었다.
무뚝뚝하기로 치자면 대상(大賞)을 받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마치 아이를 보듬듯 여자를 걱정하는 말투도 그렇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조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흠, 어멈 말이 사실이야?”
“아버님, 그건 젊으니까 잠깐…….”
“어멈은 가만있어.”
아버님의 말에 연선은 딸 이진을 노려보았다. 저놈의 계집애 입을.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 아니었다. 무현의 어머니라고 밝히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아들의 침실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 행동이 마치 제 방에 들어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황당한 나머지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있는데, 잠시 후,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입고 있던 청바지에 남방 쪼가리를 벗고 하얀 레이스 원피스로. 인사를 올리겠다는 말에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이진에게 전화가 왔기에 ‘네 오빠가 동거를 하고 있어.’라고 말한 게 화근. 시어른들을 모시고 올 줄 몰랐던 거다.
무현이 물었다.
“어떤 말씀인지.”
“흠, 동거를 하고 있다는 게.”
무현은 움찔, 하며 저를 빠르게 더듬는 향기를 바라보았다. 마그네슘이 결핍된 사람의 것처럼 그녀의 얇은 눈까풀이 파르르 떨린다.
동거라. 사고를 치긴 쳤구나. 애처롭게 흔들리던 향기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아래로 향하는 걸 보며 무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연선은 아들이 동거를 인정하자 현기증이 일었다. 동거, 할 수도 있다. 서른이 훌쩍 넘은 아들인데 그깟 동거가 뭐 대수라고. 오히려 바랐던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 나름이지.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여자와 동거라니.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집에 오던 중이었는데? 왜?
“너, 지금 그게 어른들 앞에서…….”
“어멈아, 가만. 무현이 네가 납득이 가게 설명해 봐.”
조부가 연선을 말리듯 고개를 젓고 말했다. 무현은 숨을 고르듯 입을 다물고 있는 조모를 바라보았다.
“순서가 이렇게 돼서 그런데. 결혼할 사람입니다.”
선포나 다름없었다. 가족들은 서로 눈을 맞추고 넋 빠진 사람들처럼 입을 벌렸다. 연선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너 내일 선 보기로 한 거 잊었니?”
“싫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약속은 어머니가 임의로 잡은 거고요.”
“그렇다 치자. 지난번 집에 왔을 때만 해도 아무 말 없다가 이게 무슨.”
“찾아뵙고 말씀 드리려고 집에 가던 중이었습니다.”
무현의 말을 믿기 어려웠다. 여자라면 콧방귀도 뀌지 않던 녀석이 동거에, 결혼이라니. 연선은 갱년기가 다시 온 듯 열이 올라 손부채질을 하며 여자를 살폈다.
“아가씨, 학생이에요?”
“아니에요.”
“언제부터 같이 살…… 아니, 그러니까 두 사람 어떻게 만났어요?”
남녀 간의 일은 당사자들 아니면 모른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었다. 백번을 양보해도 고개가 저어질 만큼.
“말할 줄 몰라요?”
향기가 그게, 라고 운을 떼자 무현이 “내가 말씀 드릴게.”라고 말하곤 향기의 손등을 다독였다.
무현은 집에 오면서 생각해 뒀던 이야기를 풀었다. 어떻게 하면 잡음 없이 일련의 과정을 빠르게 종결지을지 시나리오를 짜 왔으니까.
향기를 만난 이야기부터 결혼을 결심하게 된 동기까지 얘기하자 조모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그, 그러니까 우리 종손이 죽을 뻔했었다고?”
“이 아가씨가 너를 구했고?”
이번엔 조부였다. 그들의 목소리는 신음에 가까웠고 향기는 “네.”라고 작게 말했다. 연선은 놀란 가슴을 누르고 한풀 꺾인 목소리를 냈다.
“그, 그렇다고 결혼을, 보상을 해 주면 되지.”
“제가 원한 결혼입니다.”
“뭐?”
“제가 청혼했고,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첫눈에 반했거든요.”
무현의 말에 가족들의 입술이 음 소거가 된 채 벙싯벙싯 모양만 만들었고 향기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무현은 그의 앞에 있는 찻잔을 들어 향기에게 건넸다. 찻잔이라도 물고 아무 말 하지 말라는 뜻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