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1화 (21/56)

# 21

21화.

Chapter. 5

“나 좀 꼬집어 봐.”

무현은 얼굴을 들이미는 정우의 이마를 밀쳤다. 정우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장난이지?”

“장난, 아니야.”

“이 미친놈아, 너 별종인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결혼을!”

황당한 나머지 정우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술잔을 연거푸 비운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막장 대본은 쳐다보지도 않는 녀석이 막장 드라마 찍겠다는 거야?”

“그게 왜 막장이야.”

“네가 대본 속 재벌 남주도 아니고. 계약 결혼이 말이 되냐고?”

“맞선 보고 대충 상대 골라서 애 낳고 사는 건 제대로 된 거고?”

정우는 넋을 놓고 무현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해서 신이 나서 따라나섰다. 그런데 대 배우님이 하는 말이 하도 기막혀서 몇 잔 마신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넌 그렇다 쳐도, 그 여잔 뭐야? 어린애가 왜 그러고 사는 건데?”

“함부로 말하지 마.”

무현의 얼굴에 짜증이 서렸다. 정우에게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일처리가 확실한 매니저이기도 하지만 가장 믿는 친구였다. 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요즘 애들 무섭다. 목숨 구해 준 거로 딜하고, 연예인 되겠다고 호적도 과감히 더럽히고.”

“그런 여자 아니야.”

“네가 그 여자애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막말로 그런 애가 연예인 되면 몸 로비도 불사할걸.”

“결혼은 내가 하자고 했어.”

사실이다. 향기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말을 곱씹고 고민한 건 그였다. 그리고 결혼하자고 설득한 것도. 정우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목숨 구해 준 여자가 마침 꿈이 가수네, 한류 스타 차무현도 못 알아보고. 냄새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 안 해?”

“안 해.”

정우는 순진한 얼굴에 단단히 속아 넘어간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다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좋아하는 건 아니지?”

냉철한 녀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게 이상했다. 향기라는 여자와 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모습도 의외였고.

“혹시 잤어?”

“뭐?”

“뭘 그렇게 놀라? 미성년자도 아닌데. 마음 맞으면 그럴 수도 있지.”

정우는 생각해 보라며 말을 이었다.

“성인 남녀가 한집에서 지내는데 누가 그런 상상을 안 하겠냐?”

“다 너 같은 줄 알아?”

무현은 험악하게 눈을 치켜떴다. 향기를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 없기에 짜증이 일었다. 그런 무현을 보고 정우는 혀를 찼다.

“유별 떨긴. 어째든 결혼은 아니라고 본다. 가순지 뭔지 하겠다는 건 내가 도울 테니까 넌 빠져.”

“도와주지 않을 거면 입이나 다물고 있어.”

“그러고 싶은데 내가 네 매니저라 안 되겠다.”

열을 가라앉힌 정우의 입에서 심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이거 언론에 터지면 배우 인생 끝이야. 기껏 쌓아 놓은 이미지 한 방에 날려 버릴래?”

“할 만큼 해 봤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무현은 멍한 표정을 하는 정우의 어깨를 위로하듯 툭툭 치고 일어섰다.

* * *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던 향기의 눈이 있는 대로 커다래졌다. 아침에 무현으로부터 당분간 그의 일을 도우라는 통보가 있었다. 그리고 매니저인 정우, 스타일리스트 수진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녀가 할 일은 수진의 보조.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무슨 보조? 어쨌든 이곳 일산 세트장까지 밴에 태워져 끌려왔다. 광고 촬영을 하러 간다기에 작은 스튜디오라고 생각했는데 서로 다르게 세팅된 세트장이 여러 개였다.

크레인까지 동원돼 장비를 나르고 사람들도 족히 백 명은 넘을 것 같은 큰 규모라 절로 입이 벌어진다.

“크다…….”

뒤늦게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무현의 일행을 찾는데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따라오지 않고 뭐 하고 있어요?”

“아, 죄송해요.”

“사람들하고 함부로 얘기하지 말고.”

“네.”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우의 뒤를 따랐다.

내가 미운가. 아니면 원래 저런 성격인가? 며칠 전 집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저렇게 사나운 얼굴은 아니었다.

향기는 의자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는 무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무현이 나오는 드라마가 고공 행진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드라마 극중 인물인 남녀 주인공이 같이 CF를 찍게 되었단다. 메이크업을 받는 사이에도 사인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다들 무현을 힐끔거린다. 향기는 새삼 무현의 유명세가 피부로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남자와 결혼이라니.’

무현이 배우인지 모를 때는 낯선 사람인데도 신기하게 편했었다. 개들과 여유롭게 산책하고 자주 미소도 짓고, 말썽은 좀 부렸지만 친근하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골려 먹기도 하고 놀리기도 했는데 서울에 오고 하루가 다르게 무현이 멀게만 느껴진다.

향기는 종아리를 툭 치는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통해 무현이 가늘게 눈을 뜨고는 물었다.

“뭐 해?”

“그냥 서 있는 건데요.”

“돌아다니지 마. 길 잃어버려.”

왜 발로 차고 난리야. 향기는 삐죽 입술을 내밀려다 정우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져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현과 상대 배우가 세트장 안으로 들어서자 감독이 뭔가를 지시하고 두 사람이 포즈를 취한다. 당연히 예쁘니까 연예인이 됐겠지만 여배우의 얼굴이 실종 직전이었다.

무슨 냉장고 광고를 저렇게 하고 찍어?

무현에게 매달리듯 밀착하는 여배우를 그가 허리를 감싸듯 안고 있었다. 깨끗한 화이트 셔츠에 블랙 슬랙스를 입은 무현. 붉은 니트 원피스를 입은 여배우. 두 사람을 반사판 네 개가 다른 각도에서 비추자 반짝반짝 빛이 난다.

저렇게 예술이 탄생하는구나, 생각하는데 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기하지?”

“네. 뭐 도와드릴까요?”

“얌전히 있어 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괜히 돌아다니다가 전선줄이라도 건드리면 큰일이거든. 수진의 말에 향기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게요. 방해만 될 것 같은데 나를 왜 데려왔을까요. 속으로 삼킨 말이 풍선처럼 부풀어 가는데 수진이 속삭였다.

“저기 보이는 거 있지. 저게 실제용 모니터야. 두 사람 케미 정말 좋지?”

“네. 잘 어울려요.”

콘셉트가 사랑하는 연인이라 그런지 드라마에서도 CF 촬영에서도 두 사람 다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특히 여배우는 귀까지 빨개져 몇 번이나 NG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수진이 키득거렸다.

“내가 저럴 줄 알았어요. 같이 광고 찍어서 하윤아 소원 풀었지. 무현 오빠 엄청 좋아하거든.”

“다행이네요.”

“저럴 때 보면 무현 오빠도 하윤아한테 마음이 없는 것 같진 않은데.”

수진의 말대로 굳게 다물려 있던 무현의 입술이 미소를 짓고 있다. 마치 진짜 연인을 보듯 다정한 눈빛을 하고. 향기는 돌연 볼이 따끈해지는 것 같아 그들을 외면했다.

“저 냉장고 불티나게 팔리겠다. 웃는 거 봐. 저러니 여심 저격수란 말이 나오지.”

“진짜 사귀는 사람들 같아요.”

“또 모르지. 언제 어떻게 될지.”

같이 드라마 찍고 커플이 된 배우들이 꽤 많다며 향기의 귀에 소곤거렸다.

“참, 집안끼리 잘 아는 사이라며? 무현 오빠와 많이 친해?”

“그냥, 보통요.”

정우가 결혼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그런 당부가 없어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는데 말이다. 수진에게는 집안끼리 아는 사이고 당분간 무현의 일을 도와주러 와 있는 거라고 말해 두겠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혼자 힘들었는데 향기 씨가 와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많이 가르쳐 줄게.”

“……고맙습니다.”

향기는 얘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얼떨결에 끌려온 거라고 말할 수 없어서 인사는 했지만 제 일만으로도 바쁜 향기였다.

수진은 잠깐씩 멍 때리는 향기가 꽤 맘에 들었다. 순정 만화 캐릭터는 아니고 청순과? 그러면서도 말하는 게 당찼다. 화장기 없는 청순한 얼굴에 긴 생머리, 캐주얼한 옷차림. 나이가 깡패라고 꾸미고 가꾼 여자들보다 더 눈길을 끈다.

“화장할 줄 모르지? 해 줄까?”

“괘, 괜찮아요.”

“하긴 화장품이 향기 씨한테는 오염이겠다. 예쁠 때다, 부러워.”

“언니가 훨씬 예뻐요.”

수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향기가 동생처럼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 단속 잘해. 병날라.”

“무슨 말이에요?”

“무현 오빠 계속 보고 있으면 심장이 남아나겠어? 괜히 헛물켜지 말라고.”

“난 또…….”

향기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자 수진이 눈을 크게 떴다.

“향기 씨, 의외로 강심장인가 봐?”

“안 보면 돼요. 볼 새도 없고요.”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무현과 부딪치면 깜짝깜짝 놀란다. 시골에서 볼 때도 그랬지만 서울에 올라와서는 증세가 심해졌다.

그래서 무현이 집에 있을 때는 TV도 켜지 않고 식사가 끝난 후에는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다. 무현 또한 서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수진이 이해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무현 오빠가 많이 바쁘지.”

자기 관리가 철저한 무현은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않는 배우로 유명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 없을 땐 광고 촬영, 작품 들어가면 대본 연구하느라 밤을 새는 게 일상이다.

“참, 향기 씨, 키키 좋아해?”

“노래는 들어 봤어요.”

“저쪽 세트에서 걔네들 CF찍는다?”

“정말요?”

수진이 선심 쓰듯 구경하고 오라는 말에 향기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걸음을 옮겼다.

와, 정말 현실감 없이 예뻤다. 무슨 남자들이 저렇게 예뻐? 메인 보컬의 음색이 귀에 쏙 들어올 만큼 실력 있는 그룹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노래도 들려주지. 아이돌 그룹이 광고하는 음료는 무조건 사서 마신다는 은주의 마음이 백번도 더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도대체 어디에 앉으라는 건데요? 촬영이 끝나고 서울로 넘어오면서 무현이 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래서 온 곳이 곱창집. 향기는 각자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는 무현과 정우를 보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정우의 잔소리가 떠올라 얼른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어디를 가든 향기 씨 자리는 항상 내 옆이에요.」

스캔들이라도 나면 곤란해진다고 정우가 몇 번이나 강조를 했다. 이 정도로 대단한 배우인 줄 알았으면 결혼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향기는 저를 노려보는 무현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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