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화.
정우가 곱창을 뒤집다가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차무현, 왜 안 하던 짓 하는 건데?”
“곱창이 먹고 싶어서.”
“그것도 학생들 바글거리는 대학가 근처에서?”
“맛집이잖아.”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가게다. 학생들 때문에 돈을 벌었다고 몇 년째 가격 동결, 재료는 최상을 쓴다. 주인 나름대로의 프라이드가 대단한 집이었다. 꼭 그래서 온 것만은 아니지만. 무현은 말없이 향기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었다.
“제,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눈도 마주치지 않고 향기가 중얼거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향기를 데려올 거면 룸이 있는 일식집이나 한식집으로 가는 게 맞다. 술이 주가 되는 대학가 근처의 가게가 아니라. 젊은 애들이 넘치는 곳이라 누군가 사인을 해 달라고 물꼬를 트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다. 거절을 하면 거절을 하는 대로, 해 주면 해 주는 대로. 벌써 사진 찍는 소리가 요란하다. 내일이면 포털 사이트에 도배가 될 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무현은 정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향기를 빤히 바라본다.
“술 받아.”
“싫어요.”
향기는 무현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수진이 피식 웃더니 대신 술을 따라 줬다.
“오빠랑 일하는 거 얼마나 힘든지 모르죠?”
“힘들어?”
“스캔들 날까 봐 그러죠. 저도 엄청 고생했거든요.”
수진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무현과 일한 지 5년 차다. 지금은 무현의 팬들도 기자들도 그녀가 무현의 스타일리스트라는 걸 알지만 초기엔 정말 곤혹스러웠다. 무현의 옆에만 서도 사진이 찍혀 포털 사이트에 뜨고 팬들에게 달걀 세례도 받았었다.
“정우도 있고, 너도 있는데 뭘.”
“조심해서 나쁠 거 없죠. 그리고 향기 씨도 무현 오빠 불편할걸요? 그렇지, 향기 씨?”
향기는 익은 곱창을 소스에 찍어 먹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무현이 모르는 척해 주면 고맙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무현은 그럴 마음이 없나 보다. 잔을 비우기 무섭게 술을 따라 준다.
“내가 알아서 먹는다니까요.”
“얼굴 좀 보면서 말하지?”
“싫어요.”
여전히 불판 위에 곱창만 쳐다보고 중얼거리자 무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곳 와 보고 싶었다며.”
향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친구들과 와 보고 싶다는 말이었다.
“별거 없지? 고개 들고 편히 먹어.”
무현의 말에 놀란 건 정우였다. 수진은 별생각이 없는지 “무현 오빠, 웬 친절?” 하며 웃는다.
향기는 곱창이 유난히 질기게 느껴져 씹고 또 씹었다. 빨리 먹고 집에 가고 싶었다.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 * *
청소를 끝내고 어느새 익숙해진 무현의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제 방을 바꿀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무현을 따라 나가게 되면서 미뤄졌다.
오늘도 무현의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몰라 그의 운동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서둘렀다.
비어 있던 화병에 꽃을 사다가 꽂아 놓고 침구류도 새것으로 교체하고 욕실 정리도 끝냈다. 이 정도면 됐나, 그녀의 시선이 휑한 벽에 닿았다.
“아, 사진!”
향기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중얼거렸다.
“이상한 아저씨야.”
드레스 룸에서 사진을 찾아와 제자리에 걸어 놓고 향기는 팔짱을 낀 채 바라보았다.
어제 식사가 끝나고 무현은 한참 대학가 근처를 걸었다. 그의 옆에는 당연히 정우가 있었고 수진과 그녀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방도 그렇고 말없이 배려해 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신세질 생각은 없었는데. 향기는 사진이 무현이라도 되는 듯 말했다.
“……미안해요.”
무현을 따라온 첫날은 경황이 없어서 그의 방을 내준 줄 몰랐었다. 무현에겐 아무렇지 않은 척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도 속으로는 불안하고 두려웠으니까. 그리고 무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싶어 낯이 뜨겁기도 했고.
서울에 도착해서 무현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마음은 반반이었다. 그대로 다시 발길을 돌릴까. 무현이 두 시간이나 늦는데도 확인 전화를 하지 않았던 건 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향기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저와 엮이지만 않았다면 무현은 선을 보고 그에게 맞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을 거다. 가족을 속이지 않아도 되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데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창문을 닫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뭐 해?”
“방 정리했어요.”
“벌써?”
무현은 향기의 짐이 사라진 방을 쓱 훑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향기와 식탁에 마주앉아 그가 입을 열었다.
“이번 주 안으로 할아버지 뵈러 가자.”
무현은 할아버지라는 말만 듣고도 촉촉해지는 향기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몇 번 어르신과 통화를 했지만 이것저것 묻지 않으셨다. 그저 무현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다며 향기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지만 확인하셨다. 무현이 재차 물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
“……네.”
“결혼 진행하겠다는 얘기야.”
“알아요.”
무현은 멍해지는 횟수도 늘고 말수가 줄어든 향기가 신경 쓰여 눈을 떼지 못했다. 어제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보이던 정우 때문인가.
“정우 신경 쓰여?”
“별로요. 이유가 있겠죠.”
“친해지도록 노력해 봐. 착한 녀석이니까.”
어차피 향기가 오디션을 보려면 정우와 친해져야 했다. 벌써부터 매니저를 둔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가 쫓아다닐 수 없으니 정우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가수가 되겠다는 향기에게 화면 밖 연예인과 그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수진의 보조를 하라고 한 거였다.
아이돌 그룹을 보고 꽤 흥미로워하더니 하루 새 약발이 떨어진 건가.
무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기죽을 필요 없으니까 나한테 하듯이 편하게 대해. 그리고 오디션 준비하고.”
CN의 전신은 가수 중심의 연예 기획사였다. 무현이 들어오면서 배우와 프로듀서를 영입하고 영상 콘텐츠 사업까지 확장, 지금은 명실상부한 대형 기획사가 됐지만, 대표는 아직도 음악에 대한 열정이 컸다. 돈이 안 되는, 상업성이 부족한 언더에서 음악 하는 이들을 아낌없이 돕고 있으니까. 향기의 실력은 모르지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오디션이란 말에 향기의 눈이 동그래졌다.
“오디션이요?”
“그래.”
“싫어요.”
“뭐?”
의외의 대답에 무현은 향기가 그의 소속사가 어딘지 모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소속사가 어딘지 알아?”
“알아요. 얼마나 유명한지도 알고요.”
정진과 수진에게 충분히 듣기도 했지만 시간 날 때마다 검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싫다고?”
“네. 그 회사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우리 소속사가?”
“네.”
이쯤 되니 향기의 머릿속이 너무 궁금해진다. 매년 솔로 가수든 그룹이든 수십 팀이 생겨난다. 오죽하면 PD나 관계자들이 가슴에 이름표를 달게 할까. 이름을 못 외울 만큼 많기도 하고 대부분 단발성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CN을 마다해? 오디션 한 번 보겠다고 줄을 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네 취향이 어떤데?”
“지난번에도 말했는데,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혹시 꿈은 하늘을 찌르는데 실력이 안 되는 건가. 무현은 매번 단호하게 그의 도움을 거절하는 향기가 황당했다.
“노래는 잘해?”
“뭘 그런 걸 물어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야단치듯 쳐다본다. 곧 죽어도 못한다는 말은 절대 안 하지? 무현은 결국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제 침대에 누웠는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향기가 고집을 부려 기어이 방을 바꿨는데 왠지 불편하다. 원래 그의 방이었고 침대였는데 뭐가 문제일까. 뒤척이던 무현은 숨을 들이마시다 하, 소리를 내고 말았다.
공기가 달라졌다. 욕실에서도, 새로 교체한 침구류에서도 낯선 향이 난다.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향수나 화장품 냄새가 아닌, 사람 고유의 체취. 향기가 이 집에 오고부터 나던 냄새였다. 주방에서도, 거실에서도, 특히 그녀의 옆을 스칠 때면. 무현은 문득 단전 아래로 힘이 고이는 걸 느끼고 미간을 좁혔다.
“하, 하필이면.”
낭패다. 다른 마음이 있는 거 아니냐며 정우가 채근할 때도 어이가 없어서 콧방귀를 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아니지. 건강한 남자라면 흔히 있는 일인데 괜스레 유난을 떤 것 같아 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이게 다 향기를 떠올렸기 때문이 아니라 정우 녀석 때문이다.
「잤냐?」
잤냐, 잤냐. 안 잤다. 아니 각자 방에서 잘 잤다. 그동안은.
「네가 누군가와 같이 지낼 성격은 못 되잖아?」
정우의 말이 맞다. 개과천선해 보려고 그런다. 어쩔래? 젠장. 걱정되니까. 향기의 말대로 공범이니까. 고마운 여자니까. 신경 쓰이고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게 아니더라도 향기와 같이 지내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종종거리며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어느새 곁에 와서 웃고 있는 게 거슬리지 않았다. 여동생인 이진에게도 향기만큼 편하게 대하진 않았었다. 이진의 일에 간섭할 일이 있어도 부모님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었다.
「잘 생각해 봐. 너랑 친구하고 처음 보는 모습이니까.」
온종일 향기 생각이다. 젠장. 향기가 원하지 않는 일을 알아보고, 수시로 떠올리고. 잠자리에서까지. 지금도. 무현은 설핏 미간을 좁혔다. 어리다고만 생각했는데 여자였던 건가.
무현은 침대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침실이라는 것도 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돌겠네…….”
* * *
향기는 까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은주를 꼭 끌어안았다. 가장 친한 친구인데 만나는 걸 미뤄 왔다. 서울에 온 걸 아는데 얼마나 서운했을까. 향기는 미안한 마음에 야무지게 눈을 흘기는 은주에게 방실방실 미소를 보였다.
“웃음으로 때울 생각 마. 턱도 없거든!”
“백번도 더 미안해.”
“집어치우시지. 어디에 있었어? 계속 서울에 있었던 건 맞아?”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은주의 손을 잡고 커피숍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잡고 주문한 커피를 가져오고도 은주의 눈빛이 사나웠다. 지은 죄가 있는 향기는 딴청을 부렸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여자들, 어깨를 빌려주고 머리를 맞댄 커플들, 노트북을 두드리는 싱글족들. 하나같이 그녀의 눈에는 신기해 보인다.
“은주야, 우리 서울 오면 별 다방 가 보자고 했던 거 기억나?”
“당연하지.”
“드디어 왔다, 우리. 나 여기 꼭 와 보고 싶었는데.”
“지금 별 다방 타령할 때야? 빨리 불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화를 개통했다며 번호를 알려 왔지만 그게 끝이었다. 톡을 해도 어물쩍, 통화가 돼도 빙빙 돌리고, 곧 연락하겠다는 말만 남긴 게 벌써 보름이 넘었다.
향기는 새삼스럽게 은주의 몸을 쭉 훑었다.
“너, 원피스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꽃향기,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 빨리 말해.”
향기는 난처한 표정을 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은주에겐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결혼할 거야.”
“누가? 친척 결혼식에 왔던 거야?”
“아니.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