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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3화 (23/56)

# 23

23화.

멍하니 저를 바라보는 은주에게 향기는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은주는 제 몫의 커피와 물을 다 마시고 향기의 물 잔까지 비웠다. 그리고 꿀꺽 침을 삼키고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구해 준 사람이 차무현이고, 그 사람과 겨, 결혼을 하려고 서울에 왔고, 차무현과 동거…….”

“쉿! 조용히 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 사람들이 흘끔거리자 은주도 움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톱스타 차무현의 얘기였다. 은주는 주변을 살피고는 상체를 숙였다.

“CH 씨와 잤어?”

“야아!”

“여태 CH 씨네 집에서 지냈다며?”

“우린 그런 사이 아니야.”

“동거하면서 리얼 클린 버전이라고? 그게 가능해?”

듣고도 믿기지 않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은주에게 향기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계약 결혼이니까.”

“무슨 소리야?”

향기는 포옥 한숨을 내쉬고 조금 더 상세하게 얘기를 풀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은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꽃향기 너, 포기한 거 아니었어?”

“어. 포기가 안 돼. 기회가 왔고. 난 잡았어.”

“일어나. 당장 일어나라고!”

“왜?”

“그 남자 찾아가자. 가서 말해. 내가 당신 딸이다. 우리 엄마한테 가자!”

“싫어.”

양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꼭 잡고 향기가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은주의 성격을 알기에. 성난 사자처럼 은주가 으르렁거렸다.

“계약 결혼이 말이 돼? 그러다 가수 안 되면? 그 남자네 소속사에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할 건데?”

가수가 되고 안 되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한때 꿈이었지만 깨끗이 접었다.

“은주야, 난 그 남자 딸이 아니야, 엄마 딸이지. 그리고 내가 나타나면 반갑게 기다렸다, 하겠어? 엄마가 다시 버림받는 건 내가 용서 못 해.”

자신의 딸이 있는지도 모르는 남자다. 그런 남자를 찾아가서 구걸하듯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다 좋아. 네 계획대로 됐다 쳐.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

“…….”

“이혼하고 시골 가서 할아버지랑 살 거야? 그럼 네 인생은 뭐야?”

“받기만 했잖아. 나 때문에 할머니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힘들기만 했잖아.”

향기의 말에 은주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얼음이 가득 든 물을 가져온 그녀가 단숨에 잔을 비웠다.

“너도 너지만 CH 씨, 정말 황당하다. 나이도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한참 어린 너랑 그런 작당을 할 수 있어?”

“아저씬 잘못 없어. 내가 먼저 결혼해 달라고 한 거야.”

“너 지금 CH 씨, 편드는 거야?”

“사실을 말하는 거야. 아저씬 좋은 사람이야.”

은주는 한참을 생각하다 말했다.

“이왕 그렇게 된 거 진짜 결혼을 해.”

“그건 안 돼.”

“할아버지 때문에?”

“것도 그렇지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 거랬어. 아저씨가.”

“넌?”

대답을 못 하고 눈만 깜빡이는 향기를 보고 은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향기가 벌인 일이 하도 황당해서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 연예인 1위.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벗어도 입어도 완벽한 바디. 연예인의 연예인. 개념 제대로 박힌 뇌섹남. 기부 천사, 등등. 이 모두가 차무현을 가리키는 수식어다. 그녀의 학교에도 차무현 덕질하는 애들이 차고 넘친다. 남자에 대한 면역력이 없는 모태 솔로인 향기가 그와 같이 지내면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안과부터 시작해서 가정의학과까지.

“솔직히 말해 봐. CH 씨 좋아하지?”

커다란 향기의 눈동자가 도르르 구른다.

“좋다기보다, 이상하게 처음부터 편했어.”

“맹추야. 그게 좋아하는 거지! 너 어쩌려고 그래? 아니지. 혹시 차, 아니.”

은주가 제 입을 때리며 마구 도리질을 한다.

“CH 씨도 너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생각해 봐. 죽을 뻔했다가 눈을 딱 떴는데 천사 같은 애가 눈앞에 있어. 그런데 목숨도 구해 줬네? 반할 수 있는 거지. 네가 좀 예쁘긴 하잖아.”

은주의 말에 언제 심각했냐는 듯 향기가 “내가 좀 예쁘긴 하지.”라고 말하곤 맑게 웃는다.

“그런데 은주야, 송충이는 솔잎이 주식이잖아. 그것만 먹어도 행복하고.”

“무슨 소리야?”

“아저씨 옆에 있으면 내가 너무 못나 보여. 나 한 번도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는데.”

대학을 가지 못했어도, 미혼모의 딸이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누구 앞에서나 당당했었다. 그건 가족들에게 사랑을 충분히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무현의 옆에 있으면 위축이 된다.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서. 많이 배우고 똑똑하고 멋있어서. 그리고 진짜 결혼이었다면 무현이 손을 내밀었을 리 없다.

은주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바보야, 너 하나도 안 꿀리거든? 차무현은 늙었잖아! 넌 젊고 예쁘고.”

“쉿. 조용히 해. 나도 알아. 하지만 아저씨는 상상 그 이상이야. 겁나 잘생겼잖아.”

물에 젖은 듯 무거웠던 향기의 목소리에 어느새 웃음기가 섞여 나왔다.

“하, CH 씨 다시 봐야겠네. 기자들이 냄새라도 맡으면 어쩌려고 이런 일을 벌여? 들통나 봐? 너도 CH 씨도 만신창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끝장이라고.”

어디서 상대를 골라도 그런 거물을. 은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머리를 잘게 흔들고 말했다.

“일어나.”

“왜?”

“우리의 로망 실현해야지. 노래방도 가고 술도 한잔하고, 지대로 된 나이트를 경험하게 해 줄게. 가즈아!”

“좋아!”

은주가 서울로 대학을 가기 전까지는 만났다 하면 서울 얘기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친구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 * *

무현은 술병을 들고 일어서서 길게 이어 놓은 테이블을 돌았다. 드라마 시청률이 30퍼센트를 넘었다. 케이블, 종합 편성 채널이 많아져서 아무리 공중파 드라마라고 해도 넘긴 힘든 시청률이었다. 그래서 열게 된 자축 파티. 무현이 삼겹살집을 통째로 빌렸고 출연 배우들과 감독, 스태프들까지 모였다.

“선배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차 배우도 수고 많았어. 덕분에 잘 먹을게.”

“선배님들 덕분입니다.”

빈말이 아니라 안정적인 원로 배우들의 공이 컸다.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연배인 한천수는 꼭 선배님이라고 불러 주길 원했다.

“차 배우는 인성도 좋아요.”

무현은 흡족한 미소를 보이는 한천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스태프들의 술잔에 일일이 술을 채웠다. 모든 테이블을 다 돌고 자리에 앉자 수진이 물었다.

“향기 씨는요?”

“여기가 어디라고 껴?”

정색하는 정우를 보고 무현은 입 닫으라는 의미에서 음료수를 따라 주었다.

“친구 만난대.”

“서울에 친구 있나 보죠?”

“있겠지.”

아침부터 고향 친구를 만나겠다며 그의 스케줄을 묻는데 나가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초저녁에 좀 늦어질 것 같다는 문자를 받긴 했는데 지금쯤 들어왔을까.

정우가 그의 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스태프들이 너 정계 진출하면 무조건 찍겠단다.”

무현이 대꾸 없이 입꼬리만 올리자 정우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변함없이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무현이 무뚝뚝하고 냉미남 스타일이라 그렇지 일에 관련된 사람들은 잘 챙긴다. 사적인 만남은 거절해도 이런 자리는 빼지 않고 참석하고. 데뷔 초창기부터 그래 왔다. 그런 그에게 이미지 관리를 한다, 가식이다, 시샘의 시선과 말도 많았다. 그런데 톱스타가 된 후에도 변하지 않자 이제는 무현을 기특해하다 못해 신기해한다. 정우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참 아이러니해. 어떻게 여자만 싫어할까.”

“실전 같은 연습을 많이 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지겹도록 연애해 보잖아요.”

수진의 말에 무현은 미소만 지을 뿐이다. 직업 때문에 조심하긴 했어도 특별히 여자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가족들 성화가 역효과를 불러온 걸지도 모르고.

정우가 유독 목소리를 낮춰 무현만 듣게 말했다.

“이래서 더 걱정이라는 거지.”

“요점만 말해.”

“원래 나처럼 말썽 부리던 놈이 뻘짓 하면 그러려니 하는데 너처럼 믿는 놈이 그러면 배신감 감당 안 된다.”

“네 입만 조심하면 돼.”

정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한숨이 깊어졌다.

“희대의 사기극에 동참할 생각 없다. 너 혼자 알아서 해.”

“알았으니까 걱정 말고 오디션은 좀 미뤄.”

“왜? 그냥 데뷔시켜 주게?”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게 말이 돼? 싫대.”

정우는 향기가 가수가 된다는 것부터 못마땅했다. 차라리 일반인이라면 이 정도로 걱정되지 않을 거다. 연예인이 되겠다는 건 향기가 노출될 확률이 높다는 거고, 무현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다.

한숨을 내쉬던 정우는 가게 안으로 하윤아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게 생겼네. 나 화장실 갔다 오면 안 되는 거지?”

“알면 자리 지켜.”

정우는 오늘도 오줌보가 터지게 생겼다며 무현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삼겹살집이라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던 여배우의 등장에 스태프 모두 환호성을 보냈다. 그들이 앉은 테이블로 하윤아가 다가왔다.

“선배님, 앉아도 되죠?”

“여기 앉으세요.”

무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수진은 마지못해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하윤아가 무현에게 따라 준 술이 자연스럽게 정우의 앞으로 가자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선배는 왜 내 술 안 받아요?”

“하윤아 씨 술만 안 받는 건 아닙니다.”

“말 놓으시면 안 돼요, 선배님?”

“습관이라서. 하윤아 씨가 이해해 줘요.”

윤아는 서늘함이 묻어나는 깍듯한 존대에 자존심이 상했다. 카메라 앞에서만 다정한 남자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심 제겐 다를 거라고 확신했었다. CF를 같이 찍기도 했고 스태프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둘의 케미가 남다르다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배, 기사 난 거 봤어요?”

“……?”

“S냉장고 물량 부족이래요. 우리 실제 부부 같다고, 사귀는 거 아니냐고요.”

“기자 이름 알려 주면 우리 매니저가 해결할 겁니다. 하윤아 씨한테 피해 가지 않게요.”

대사 빼고는 무현에게 가장 길게 들은 말이 이따위 내용이라니, 붉게 달아오른 윤아의 뺨이 수치심에 더 붉어졌다.

무현은 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남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잔을 받아 비웠다. 그들을 지켜본 수진과 정우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빨리 일어나자는 눈빛 교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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