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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4화 (24/56)

# 24

24화.

향기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손바닥을 펴서 입에 댔다. 그리고 하, 하고 숨을 뱉어 냄새를 맡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껌으로는 커버가 안 되네.”

살짝 땅도 흔들리는 것 같고 막걸리 냄새가 제 코로도 맡아지니 큰일이었다.

은주를 오랜만에 보는 데다 서울에서 만났으니 잔치 분위기였다. 거기다 제 문제로 대화가 길어지면서 주량을 생각하지 않고 마셨다. 그리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목을 풀었다. 은주가 원하는 신청곡을 맥주로 입가심하며 원 없이 불러 줬던 것 같다.

술 냄새를 없애기 위해 연신 ‘푸푸.’ 하고 숨을 몰아쉴 때였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타?”

천천히 고개를 들던 향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도 잊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거기 있어요, 아저씨?”

“그런다고 마신 술이 사라져?”

무현은 멍하니 서 있는 향기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힘없이 딸려 온 그녀의 몸을 팔로 지지해 주며 미간을 좁혔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엘리베이터 안이 금세 막걸리 냄새로 채워졌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아주 조금, 음 많이? 헤헤. 그렇게 됐어요.”

“하, 혀까지 꼬이고.”

“아, 아닌데요.”

무현은 눈까지 접으며 샐샐 웃는 향기를 내려다보고 길게 숨을 뱉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길이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애들처럼 손바닥을 펴고 푸푸, 하는 향기가 보였다. 뭘 하고 있는 걸까. 의구심은 잠깐, 술 냄새가 진동했다. 아주 늦은 시각은 아닌데 이 정도로 취하려면 언제부터 마신 걸까.

“재미있게 놀다 왔어?”

“네. 완전요. 노래방도 가고, 술도 마시고 클럽…….”

“클럽도 갔어?”

“아니요. 그건 다음에 가자고 했어요. 너무 늦을 거 같아서.”

그건 잘했네. 미간을 잔뜩 구겼던 무현의 얼굴이 스륵 풀어졌다.

집으로 들어온 무현은 향기를 식탁에 앉혀 놓고 꿀물을 탔다.

“마셔.”

“고마워요. 그런데요, 아저씨.”

“또 뭐?”

“저 술 안 취했어요.”

꿀물을 마시고 젖은 입술을 혀를 내어 핥는다. 그리고 눈이 감기는지 주저앉는 눈꺼풀을 힘 줘 올린다. 그런 그녀의 뺨과 입술이 유독 빨갰다.

무현은 야단치는 것도 포기하고 팔짱을 낀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까딱까딱. 가냘픈 목이 몇 번이나 앞뒤로 꺾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꼿꼿이 세워진다. 그러곤 일어서서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거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무현은 향기가 발을 뗄 때마다 아슬아슬해 보여 눈썹을 긁적였다. 성큼 다가간 그가 향기를 안아 들었다. 향기의 눈이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동그래지고 입술을 달싹거린다. 하지만 무현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다. 서늘한.

“술 냄새 나니까 말하지 마.”

무현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향기를 침대에 내려 주고 혀를 찼다.

“적당히 마실 것이지.”

향기는 방을 빠져 나가는 무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내가 향기 씨니까 특별히 기회를 주는 거야.”

“저 이런 거 못 해요.”

“자기 길 잘 모르잖아?”

무현의 화보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꼼꼼히 챙긴다고 챙겼는데 신발 사이즈가 작은 게 왔다. 차라리 큰 사이즈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작은 건, 답이 없다.

시간은 다 돼 가지, 정우는 전화를 받지 않지, 다행히 매장이 가까워 중간에서 만나 물건을 받기로 했다. 초보 때나 하던 실수를 한 게 어이없지만 우선은 해결을 해야 했다.

절대 못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는 향기의 손을 수진이 꼭 잡았다.

“누구나 처음은 있는 거야.”

“그래도 저는 못 해요.”

“어려운 거 하나도 없어. 무현 오빠 옆에만 있으면 돼. 촬영 전이니까 수정해 줄 것도 없고.”

수진은 난감해하는 향기에게 수정용 퍼프를 쥐여 주고 어떻게 하는지 요령을 알려 줬다. 향기는 수진의 생각보다 눈썰미도 좋고 행동이 날렵했다. 매장에서 의상이나 소품을 받아 오는 건 아직 무리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향기가 실수를 하더라도 무현의 집안과는 막역한 사이라니 야단맞을 일도 없을 거고. 수진은 놀란 눈을 하는 향기의 어깨를 다독였다.

“일은 해 봐야 느는 거야. 대스타를 연습용으로 쓰는 기회가 흔한 일인 줄 알아? 20분이면 돼.”

향기는 부리나케 나가는 수진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제 일 때문에 무현을 보기가 민망한데 딱 붙어 있으라니. 도대체 왜 저를 안아 든 걸까. 과음을 하긴 했다. 은주도 간신히 일어났다며 죽을 것 같다고 톡을 보내왔으니까. 취하도록 술을 마셔 본 건 처음이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한몫했고, 은주에게 속을 털어놓자 술이 절로 들어갔다. 덕분에 마음은 홀가분해졌지만.

그래도 몸을 추스르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하진 않았었다. 잘 자라는 인사까지 했으니까. 어디에 걸려 휘청한 것도 아닌데 사람을 왜 번쩍 들었을까. 상황이 그러니 고맙다고 말하기도, 따지기도 애매했다.

지난번 가족들 앞에서는 예고 없이 손을 잡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때야 연인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해서 그랬다지만 어제는 왜? 저를 여자로 보지 않는 건 알고 있지만 어린애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슴 쪼그라드는 사람 생각 좀 해 줄 것이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무현이 보였다. 어떻게 하지? 향기는 손에 들린 퍼프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뒤에 서 있는데 무현이 눈을 떴다.

움찔. 아침 식사 때도 매운 내를 폴폴 풍기더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 할 말 없어?”

“고마워요. 꿀물.”

“그거 말고.”

“그게…… 아저씨, 저 왜 운반해 줬어요?”

운반? 무현은 향기의 표현이 매우 적절하다는 생각에 굳혔던 입매를 바짝 올렸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여자들의 로망인 공주님 안기를 해 줬다. 다른 여자였다면 남자의 목에 팔을 두르고 가슴에 기댈 텐데 향기는 기다란 통나무 같았다. 그러니 운반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주독이 빠지지 않은 뺨이 발그스름하다. 고생 좀 하라고 일부러 데리고 나왔더니 상태가 말이 아니다. 아니. 눈앞에 안 보이면 궁금해서, 자꾸 아른거려서 데리고 나왔다. 하룻밤 새 얼굴이 반쪽이 된 여자를 굳이.

거울에 비친 향기를 바라보는 무현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친구 만나더라도 밥 먹어.”

“네?”

“너무 가벼워. 누가 보면 굶기는 줄 알겠어.”

술 마시고 다니지 말란 얘기야. 무현의 부연 설명에 향기가 눈을 껌뻑이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대답이에요?”

“운반 아니고 안아 준 거고. 대답은.”

무현이 잠시 말을 끊고 입꼬리를 올렸다.

“잘 생각해 봐. 내가 왜 안아 줬을까.”

향기가 넘어질 것 같아 안아 줬지만 걱정시킨 값은 치르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머리 터지라고. 저 또한 머리 터지게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아직은 모르겠기에.

향기는 보일 듯 말 듯 묘하게 미소 짓는 무현을 보고 눈을 내리 깔았다. 그리고 커피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카페인 과다 복용 탓이야.

“내일 할아버지 모시러 갈 거야.”

“…….”

“듣고 있어?”

“듣고 있어요.”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이는 향기에게 재차 확인하고 무현은 의상을 갈아입으러 걸음을 옮겼다.

* * *

궁궐 같은 분위기의 한정식 집에서 성철과 향기, 무현의 가족이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무현의 추진력은 대단했다. 그의 말대로 고향에 내려가서 성철을 모셔 왔고 바로 이틀 만에 상견례 자리를 만들었다. 집에다 뭐라고 설명했는지 모르지만 다들 편안한 얼굴이다. 향기는 테이블 아래로 할아버지 성철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 미안해요.’

온화한 눈빛을 한 성철은 향기를 안심시키듯 손을 다독여 줬다. 음식이 들어오고 어른들의 인사가 오갔다. 무현의 조부인 차범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감사합니다. 손녀 따님 덕에 무현이가 살았습니다.”

“인명은 제천이라 했습니다. 인사 받을 일 아니니 괘념치 마세요.”

“서울 나들이는 잘 하셨습니까. 불편하시지는 않았는지요.”

“덕분에요.”

성철은 인사를 하면서도 무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족이 적은 향기와 저를 위해 원형 테이블을 잡아 준 깊은 속이 예뻤다.

“귀한 손녀 따님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가르친다고 가르쳤는데 모자라도 예쁘게 봐 주세요.”

연선은 제게 눈을 맞춰 오는 성철의 눈인사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골에서 향기의 할아버지가 올라왔다는 말에 무현의 집을 방문했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약소한 선물이라며 사과 박스를 주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사과 박스를 열어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초록색 이끼 위에 족히 십 년 근은 돼 보이는 장뇌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사과 박스 하면 본래 용도 외에 뇌물 어쩌고 할 때만 쓰이는 줄 아는 연선이었다. 아무리 장뇌삼이라고 해도 무슨 삼을 사과 박스로 가져오나.

거기다 집안에 여자가 없어서 잘 모른다며 통장을 내미는데 놀랄 정도의 금액이었다. 돌려 드리기는 했지만 향기가 다시 보였다. 시골 사람들이 배포가 큰 건지 향기 할아버지만 그런 건지.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촌에 사는 노인인데 뿜어져 나오는 기가 시아버지 못지않았다. 결국 어른들과 상의 끝에 양쪽 집 다 예단 예물은 생략하기로 합의를 봤다.

“손녀 따님, 주시고 허전하시겠습니다.”

“제 짝을 만나 떠나는 건데 오히려 기쁘지요.”

“서울로 올라오시는 건 어려우시겠지요.”

“평생 흙만 밟아서요. 가끔 놀러 오시지요.”

범석은 생선을 발라 제 할아버지의 밥 위에 올려놓는 향기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몇 번 보진 않았지만 싹싹하고 됨됨이가 된 아이였다. 아니다 싶으면 가만있지 않을 제 안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만 봐도 그렇고. 범석이 차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결혼식을 못 하게 돼서 서운하지 않으십니까.”

“사정이 그렇다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현과 향기가 미리 사정을 말했지만 서운하기는 했다. 일 때문에 그렇다는데 따라 줄 수밖에. 향기의 집 쪽에 여자가 없어서 대부분 범석과 성철만 대화를 나누고 식사는 순조로웠다. 향기는 마치 진짜 상견례라도 되는 양 성철을 일일이 챙기는 무현을 수시로 곁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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