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25화.
상견례가 끝나자마자 성철은 바로 시골로 내려가겠다고 길을 나섰다. 조금 더 머물렀다 가시라고 잡아 봤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성철을 배웅하기 위해 무현과 향기는 서울역으로 왔다.
“할아버지 정말 며칠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또 올게. 기죽지 말고.”
“안 죽어요.”
열차 시간이 임박해 오자 향기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또 올려다보았다. 속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수백 번은 하면서. 성철이 무현의 가족들에게 저를 예쁘게 봐 달라고 거듭 당부하는데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나마 무현이 잘 대처해 줘서 다행이었다.
“식사 잘 챙기셔야 해요.”
“어른들한테 잘하고. 덤벙대지 말고.”
“제 걱정은 마세요.”
몸이 약한 엄마를 보고 자라 그런지 어릴 때부터 제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향기였다. 성철은 서운한 마음에 눈가가 젖어 든다. 저 녀석만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향기였다. 원망스러우면서도 손녀 옆에 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 건 왜일까. 할아버지가 싫다면 서울에 가지 않겠다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제 할머니 등쌀에 갇혀 살다시피 했던 손녀였다. 그 억지를 알기에 이제라도 넓은 곳으로 보내 주는 게 맞겠지. 제 엄마의 외모만 아니라 재능, 고집까지도 똑 닮았다.
“저놈이 그렇게 좋아?”
“……네.”
성철이 허허 웃었다. 향기가 아무리 좋다고 했어도 무현이 눈에 차지 않았다면 절대 주지 않았을 거다.
“어른들 말씀 잘 듣고.”
무현은 시각을 확인하고 말했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함세.”
“결혼사진 나오는 대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바쁜데 올 거 없이 택배로 보내.”
무현은 저가 준비한 선물과 성철의 짐을 들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 * *
차에 타면서부터 창밖에만 시선을 둔 향기가 걱정됐다. 그의 사기극에 동원된 양가 어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자 새삼 양심에 가책이랄까, 마음이 불편했다. 향기는 더하겠지. 거기다 성철이 바로 내려가니 더 침울해하는 것 같았다.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떠나는 향기의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며 성철이 극구 마다했다. 더는 만류할 수 없어서 혼자 가시게 했지만 무현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젠장.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일을 꾸미면서 쉬울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모든 게 엉망이다. 특히 감정이라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 미묘해진다. 마치 미로처럼. 출발점이 틀렸는데 출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현은 여전히 창밖을 주시하고 있는 향기를 흘긋 쳐다보고 말했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아?”
“……무슨?”
향기는 얼결에 무현을 바라보고 놀란 눈을 했다.
“좋다며.”
“언제요?”
“할아버지한테 고백했잖아.”
향기는 한참을 생각하다 발끈했다.
“그렇게 물어보시는데 그럼 뭐라고 대답해요?”
“난 또 진심인 줄 알았지.”
반은 농담으로, 반은 혹시나 해서.
“네에?”
“웃으라고.”
무현의 잘생긴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뭘 또 그렇게까지 놀라고 그래? 서운하게시리. 무현은 찌르면 튀어 오르는 장난감처럼 반응하는 향기를 보고 안심이 돼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가신 게 그렇게 서운해.”
“죄송해서요.”
“평생 한적한 곳에 사시던 분이야. 서울 갑갑하셨을 거야.”
“할아버지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요.”
무현은 이틀 동안 스케줄까지 변경해 가며 성철의 서울 안내를 도맡았다. 물론 정우와 함께였다. 덕분에 할아버지가 안심하는 눈치였고 저도 마음이 놓였다.
“그런 인사는 안 해도 돼.”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에요.”
좋은 사람이라. 향기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는 남자? 그저 옆에서 장승처럼 서있어 주면 되는 남자? 맑기만 한 그녀의 취향이 보통 까다로워야 말이지. 저를 남자로 보지 않는 향기가 부담스럽지 않아 결혼을 결심했다. 그래 놓고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게 서운하다니. 은근히 패배감을 주는 여자다.
“이상형 없어?”
“생각해 본 적 없는데요.”
“이성에 관심 많을 때 아닌가.”
“딱히 없는데, 뭐 고르라면 책임감 있는 남자요.”
뭐 하나 평범한 게 없다. 이상형을 물으면 연예인이나 아이돌 이름을 읊어 댈 나이다. 언젠가 향기가 말했던 사랑의 정의가 떠오른다.
「사랑은 양팔 저울 같아요.」
「왜?」
「세상에 공짜 없잖아요. 받은 만큼 수평을 맞춰야 하니까요.」
사랑이 질량이야? 아니면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 그때부터 독특하다고 생각했었다.
무현은 “아저씨.” 하는 향기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 빨리 끝내요.”
“뭘?”
“결혼요. 빨리 해치웠으면 좋겠어요.”
“그래, 빨리 해치우자.”
각오를 다지듯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씨익, 입술을 늘렸다.
* * *
무현은 향기를 집에 데려다주고 본가를 찾았다. 봄단장을 하는지 낯선 사람들이 정원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묵은 잔디를 걷어 내고 전정을 한다. 매년 관리비만 해도 대기업 임직원의 연봉만큼이나 드는데 조모의 낙이니 조부는 기꺼이 지갑을 연다. 정작 본인은 일조량이 풍부한 뒷마당에 꾸민 텃밭을 기꺼워하면서도.
며칠 전 인사를 시키려고 향기를 이 집에 데려왔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향기가 넓은 정원을 보고 무척 반가워했었다. 좋은 가구나 화려한 집 내부를 보고 그저 그런 눈빛을 하던 여자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2층에서 내려오던 이진과 연선이 반색을 한다.
“오빠 왔어?”
“뭐 하는 거야?”
“이 층 리모델링. 신혼부부를 위한 최적의 공간을 만들어 주신다네? 우리 마마님께서.”
“얼굴 닳을까 봐 혼자 오는 거니?”
연선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드러내 놓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데 데려올 수 있겠습니까. 무현은 혼자 왔다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치는 연선을 뒤로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진이 너, 친정 출입이 너무 잦은 거 아니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리 보고 싶어 하셔서 왔거든. 왜 트집이실까. 결혼하려니까 싱숭생숭해?”
눈을 흘기던 이진이 무현만 들을 수 있게 다시 소곤거린다.
“그리고 갑자기 웬 드라마야?”
“대본이 좋아.”
“오빠, 내가 그쪽 일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나오면 협조 못 하지. 오빠 작품 같던데, 아니야?”
이진의 시아버지가 드라마 제작국 국장이었다. 남편 또한 미디어 관련 업무를 하고 있고. 무현은 호기심 담긴 이진의 시선을 무시했다.
급하게 드라마 출연을 결정했다. 그것도 그가 꺼려하는 멜로드라마에. 데뷔 초창기에만 TV에 얼굴을 보이고 바로 충무로로 방향을 틀었다.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거쳐 수 개월간 촬영하는 영화와 달리 작품과 캐릭터 준비 시간이 부족한 드라마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거다. 지난번 드라마도 사전 제작이라 출연을 결심했던 거고. 누구나 그렇겠지만 무현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걸 워낙 싫어한다. 하루에 최소 몇백에서 몇천만 원이나 되는 세트를 빌려 긴박하게 촬영해야 하는 열악한 시스템. 쪽대본에 생방송 촬영이 비일비재해 밤샘 작업을 밥 먹듯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폐인처럼 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출연을 결정한 건 결혼 발표를 하지 못하는 타당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드라마 성격상 끝날 때까지 결혼은 숨겨야 합니다.」
연선과 조모는 마지못해 수긍을 해 줬다. 아버지와 조부는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고.
무현은 과일을 깎아 들고 오는 연선에게 물었다.
“하실 말씀 있어서 부르신 거예요?”
“너 드라마 들어가면 집에 들어오기 힘들잖아.”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뜸을 들이는지 모르겠다. 연선은 입술을 달싹이는 이진에게 가만있으라고 눈질을 했다.
“향기 집에 와 있으라고 해.”
“어머니.”
“혼자 있는 거보다 낫잖니. 밤에 혼자 자는 것도 걱정되고.”
“향기 바쁩니다. 학교도 알아봐야 하고, 따로 할 것도 있어요.”
향기 얘기만 나오면 무현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원천 봉쇄하는 느낌이랄까. 연선은 뭔지 모르게 찜찜해 눈을 가늘게 접었다.
“대학까지 보내야 하니?”
“하고 싶다면요.”
“흥, 현대판 열부 났다고 기사 뜨겠구나.”
연선은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아들의 결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 냉수를 들이켠다. 있는 집 딸을 바란 건 아니다. 요즘 시대에 대학도 안 나온 여자라니. 믿었던 어머니마저 강 건너 불구경이다. 얼굴 본 첫날 향기의 사주를 받아서 득달같이 무속인에게 다녀오시더니 ‘인연이란다.’ 그 한마디를 하곤 그만이셨다.
“같이 지내는 거 나도 달갑지 않아. 옆에서 봐야 어떤 앤 줄 알 거 아니야.”
“일주일에 두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겠다고 하면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아 간신히 참는 무현이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연선이 기어이 한숨을 뱉었다.
“나도 말 좀 하자. 지금이라도 이 결혼 없던 거로 하면 안 되겠니?”
“그 말씀 하시려고 부른 거세요?”
무현의 목소리가 너무 서늘했다. 얼굴 표정도. 연선은 이왕 속을 보인 김에 다 말하자 싶었다.
“내가 속물 같겠지만, 네가 뭐가 부족해서 대학도 안 나온 애를 데려와? 아들이 둘만 돼도 내가 이러지 않는다.”
“엄마, 할아버지 들으시면 큰일 나려고 그래요?”
이진이 화들짝 놀라며 현관 쪽을 살폈다. 대학원까지 나온 엄마를 할아버지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할머니 때문에. 엄마 연선은 무뚝뚝한 성격의 조모 눈에 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 사랑꾼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무현은 무뚝뚝하고 차갑다.
“엄마, 이미 늦었어요. 그리고 오빠가 좋다잖아. 포기해요.”
“넌 너희 집에 안 가?”
“아리가 와야 가죠. 난 주워 온 자식인가. 맨날 천덕꾸러기 취급이야.”
“투덜거리지 말고 속 시끄러우니까 빨리 가.”
“우리 어머님은 나 예뻐하는데. 향기 씬 시어머니 사랑받긴 다 틀렸네.”
“향기 씨가 뭐야? 버릇없이.”
새언니라고 불러라, 나이 차이가 너무 나서 그게 쉽지 않다. 이진과 연선이 옥신각신한다. 무현은 그들을 외면하고 2층을 바라보았다. 무슨 공사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만났다 하면 앙숙처럼 다투는 연선과 이진보다 2층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더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