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26화.
룸으로 들어서는 무현을 보고 정우가 폭죽을 터트렸다. 무현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소파에 앉았다.
“뭐야?”
“총각 파티.”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정우는 잔이 넘치게 술을 따라 무현의 앞으로 쭉, 밀어 주었다.
“내일이면 차무현이 유부남 되는데 그냥 넘어가면 서운하잖아?”
“마시면 되는 건가.”
한껏 도발하는데도 무현이 동요하지 않자 정우는 작심하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여자라도 붙여 줘? 원하면 말해.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 테니까.”
“뭐가 불만이야.”
빈정거리는 정우를 더는 못 봐주겠기에 무현은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정우도 만만치 않게 받아친다.
“요즘 내가 어떤 미친놈 때문에 잠을 못 자거든.”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병원 가 봐.”
정우는 질렸다는 듯 무현을 한참 노려보다 말했다.
“잘난 네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 참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제대로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다. 잔소리가 길어질 것 같아 무현은 몸을 느슨하게 하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병 되면 안 되지. 하고 싶은 말 해.”
“너희 가족 다 허수아비 만들고 꼭 이래야겠어?”
“…….”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재고해 봐.”
내일 무현의 웨딩 촬영이 잡혀 있다. 극비리에 일을 진행시킨 건 정우 저였다. 처음엔 돕지 않겠다고 콧방귀를 꼈지만 무현이 직접 나서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생각 있는 녀석이니 알아서 하겠지, 하는 믿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반전이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정우 저가 으뜸으로 꼽는 친구니까. 혹시라도 여자애가 다른 맘 먹으면 어쩌려고? 지금까지 쌓아 놓은 이미지며 커리어는?
“스튜디오, 입단속 시켰지만 믿을 거 못 돼. 말 새어 나가면 감당 될 것 같아?”
“그래서?”
“오늘이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충고 고맙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무현이 챙, 가볍게 정우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쳐 왔다. 정우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결과는?”
“이미 강 건넜어.”
잔을 비우는 무현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컷처럼 보인다. 돌 것 같은 이 상황에서도. 정우는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너 이거 터지면 혼자 독박 쓰는 거 아니야. 꽃뱀이니 뭐니 향기 씨한테도 질타 장난 아닐 거다.”
정우는 저도 모르게 “돌겠네.” 거친 말을 쏟아 내고 고개를 저었다.
“둘이 똑같네. 궁합은 볼 것도 없겠다.”
향기에게도 지금 무현에게 했듯 회유 비슷한 걸 했었다.
「혹시 그런 일이 생겨도 저는 상관없어요.」
흔들림이 없었다.
“무슨 소리야.”
“신기해서 그러지. 팀플레이가 환상이라. 내가 사랑을 위해서 꿈을 포기하는 여잔 봤어도 꿈을 이루겠다고 사랑을 포기한 여잔 처음 보거든.”
무현은 짜증이 확 일었다. 사랑을 포기한다는 말이 유난히 귀에 거슬려서. 오랜만에 취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Chapter. 6
거울에 비친 여자가 너무 낯설었다. 놀라는 것도 잠시, 향기는 팔을 올려 훤히 드러난 어깨를 감싼다.
“언니, 어깨가 너무…….”
“웨딩드레스잖아요. 예쁘기만 한데, 뭘.”
애정은 겁먹은 아이처럼 잔뜩 몸을 움츠린 향기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뽀얗고 생긴 것도 예쁘다. 더구나 되바라져 보이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진달까. 아무리 봐도 이런 깜찍한 짓을 벌일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어제 남편 정우가 만취가 돼 들어와 무현에 대해 황당한 얘기를 했다.
「좀 도와줘.」
지금은 쌍둥이들 때문에 쉬고 있지만 그녀는 전직 메이크업 아티스트.
「미쳤어요? 말리진 못할망정.」
「걔, 고집 못 꺾어.」
못 한다고 팔짝 뛰었지만 무현이라면 죽고 못 사는 남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애정은 멍하니 거울을 응시하고 있는 향기의 얼굴에 색을 입혔다. 보고 있으면 이모 미소가 절로 지어질 만큼 앳된 얼굴이다. 귀엽기 그지없는. 하지만 상대는 한 미모 한다는 뭇 여자들이 몸살을 앓는 차무현. 헤어까지 끝낸 애정은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세미드레스에 어울리게 연한 화장을 해 줬더니 천사가 따로 없다. 웨이브를 넣어 자연스럽게 머리를 땋아 늘어트렸더니 요정 느낌도 나고. 아깝네.
“향기 씨, 기념으로 사진 한 장 남기자. 폰으로 보내 줄게.”
수줍은지 어정쩡한 미소를 짓는데 그 모습이 더 어울렸다.
“무현 씨가 알아서 리드하겠지만 잘해요. 들통 안 나게.”
“네. 고맙습니다.”
향기는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무현은 최선을 다해 약속을 지켜 줬다. 물론 그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결혼식, 하지 않을 거야. 물론 언론에 노출하는 일도 없을 거고.」
유명 연예인인 무현에게도 그녀에게도 세간에 그들의 결혼이 알려져 좋을 건 없었다.
“다 끝났어요. 정말 예쁘다. 진짜 결혼식이면 좋았을 텐데.”
애정의 말에 향기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일어섰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향기는 움찔움찔했다. 종국엔 딸꾹질까지 하고. 애정이 가져다준 물을 마시는데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신인이라더니 카메라 앞에 처음 서 보는 거야?”
“아, 죄송해요.”
향기는 하얀 드레스에 손바닥을 문지르고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입꼬리마저 파르르 떨린다.
“정신 차리라고!”
무현은 포토그래퍼의 짜증 밴 목소리에 정우를 노려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정우는 그의 시선을 피한다.
「소속사에서 미는 애라고 했어.」
「향기를?」
「그럼 너겠어?」
「네 후배라고 하지 않았어? 내 화보 찍게 해 주는 조건이라며?」
「누굴 믿어?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전도유망한 신인을 위해 CN의 이사로서 무현이 회사를 돕는 거로 얘기가 됐단다. 확실히 포토그래퍼는 향기를 안중에 없어 했다.
“신인 너, 차 배우님 모셔 놓고 이게 얼마나 큰 기횐 줄 모르는 거야?”
무현은 참다못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참견 마시고 셔터나 눌러요. 콘셉트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니, 난…….”
“하루 종일 찍을 겁니까? 내 화보 촬영도 해야 하는데?”
무현의 서늘한 목소리에 포토그래퍼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현은 슈트를 벗어 향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처음, 드레스도 처음. 떠는 게 당연했다. 무현은 향기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눈이 이리저리 민망함에 흔들린다.
“미안해요. 잘하려고 했는데.”
“뭐가 미안해. 포토그래퍼한테도 사과할 필요 없어. 누구에게도.”
“그래도 저 때문에.”
“렌즈 보지 말고 나만 봐.”
겨우 고개를 끄덕이자 무현이 작게 말했다.
“놀라지 말고.”
무현은 슈트 위로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당겨 안았다. 향기는 천천히 내려오는 그를 보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넣어 숨겼다. 그때였다.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은 건.
콩닥콩닥, 쿵쿵.
그리고 허리에 감긴 무현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 것도.
따뜻해. 곧 포근한 열기가 얼굴로 쏟아졌다.
“차 배우님, 좋아요. 바로 아래로 내려갑니다.”
닿는다, 닿을 거야. 향기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살짝 실눈을 뜨자 짙은 눈빛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만 보면서. 향기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좋아요. 신인, 잘하네.”
역시 노련한 차 배우라며 직접적인 스킨십보다 몇 배는 짜릿하다고 말했다. 순수해 보이는 신인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고. 무현의 시선이 향기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이젠 춥지 않지?”
끄덕끄덕.
향기의 어깨에 둘러 주었던 슈트를 입은 무현이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카메라를 등지고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어깨에 기대.”
끄덕끄덕.
카메라 플래시가 연신 터졌다.
“이번엔 등에 기대고.”
말을 잃은 아이처럼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현의 말에 따랐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그녀의 손을 무현이 꼭 잡아 주었다. 그의 손도 등도 포근했다. 너른 어깨도. 신기하게도 화사한 꽃으로 장식된 세트장이 그제야 향기의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 * *
“이런 곳에 와도 돼요?”
매니저가 음식을 세팅하고 나가자 향기는 불안한 얼굴을 했다.
“이런 곳이 어떤 곳인데? 밥집밖에 더 돼.”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은 예약을 해야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드라마 촬영 때 장소 협찬을 받았었는데 수진의 말을 빌리자면 특히 여자들이 오고 싶어 하는 레스토랑이라고 했다. 무현도 음식 맛이 괜찮아서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지만.
“아저씨는 연예인인데 왜 사람들 신경을 안 써요? 들어올 때도 흘끔거렸단 말이에요.”
듣는 사람 없는 룸인데 목소리를 낮추는 향기 때문에 무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매니저는 한 명이면 충분해.”
“저도 준 매니저나 다름없어요.”
“네가?”
“정우 아저씨가 잘 지키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이상한 짓 하나.”
향기의 말에 무현은 실소했다. 같은 말을 들어도 해석이 이렇게 달라서야. 집에 가기 서운하다며 어제 정우 부부가 그의 집에 다녀갔다.
「이상한 짓 하면 바로 연락해요. 특히 밤에. 동참하지 말고.」
분명 정우는 가해자는 무현, 피해자는 향기를 지칭했다. 음란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간이 덜 된 건강 음식처럼 담백하기만 한 향기를 보며 무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준 매니저님, 우리 그만하고 밥 좀 먹자.”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곳에 왔어요?”
그러게 왜 왔을까. 무현은 물끄러미 향기를 바라보았다. 요새 어머니와 이진에게 끌려다니느라 눈에 띄게 핼쑥해졌다. 그것까지 못 하게 하면 연선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제는 웨딩 촬영을 했고 오늘은 조부와 신경전을 벌이다 혼인 신고를 마쳤다. 조부는 기어이 구청까지 따라와 증인란에 그의 이름을 적어 넣고야 흐뭇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향기가 힘들다고 투정이라도 부린다면, 닳고 닳은 여자들처럼 명품을 욕심낸다면 그의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았을까. 아니, 저를 남자로 봐 주면 깨끗이 정리될 텐데. 바다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는데 향기의 배는 흔들림이 없고 그의 배는 물이 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