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28화 (28/56)

# 28

28화.

경험해 보지 못한 빛바랜 70년대 감성이 전해져 정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창원이 정진을 흔들며 말했다.

“현실 아니지? 어디서 데려왔어?”

“아르바이트.”

“저건 완전 사기캐다.”

잘 보이기 위해 부르는 노래가 아니었다. 저 정도면 누구보다 본인이 자신의 실력을 안다. 그래서 대부분 기교를 부린다. 그런데 향기는 담담히 책을 읽어 내리듯 부른다. 그 목소리가 듣고 싶어 귀가 솔깃해지게.

어느새 곡이 바뀌어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라고 랩을 하듯 읽어 내리는데 목소리가 감미로웠다. 기타 연주도 특별한 기교가 없다. 툭툭 뜯고 튕기는데 향기만의 색이 있었다. 인서는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키보드로 다가섰다. 하지만…….

“하, 건반을 못 누르겠네.”

흠집 낼까 봐. 피아노를 전공한 그가 건반 누르는 게 망설여진다. 정진이 하도 부탁을 해서 마지못해 데려오라고 했지만 번거롭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얼른 테스트를 끝내고 보내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완벽한 반전이었다. 그의 반주가 노래에 방해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니.

어느덧 노래가 고음으로 올라가는 팝으로 바뀌었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목에 핏대도 안 돋아.”

“저 정도면 사기 피치지?”

완벽한 고음 처리에 인서도 혀를 내둘렀다.

연달아 세 곡을 부르고 난 향기는 마무리로 기타 줄을 고르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창원이 박수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합시다. 해.”

“네?”

“우리 피처링도 해 주고 버스킹도 같이 하고.”

향기의 얼굴이 활짝 펴자 인서가 물었다.

“보컬 트레이닝 받았어요?”

“아니요.”

“기타는요?”

배워 본 적 없다는 말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혹시 자작곡도 있어요?”

“조금요.”

창원과 인서는 장르가 달라서 너무 아쉽다며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바로 열띤 설명이 시작됐다.

“당장 공연해도 손색없어요. 아니 넘쳐요.”

“향기 씨 실력 정도면 바로 대형 소속사에서 데려간다. 내가 장담해요.”

홍대 버스킹은 주말에 관객이 몰린다며 평일에는 라이브 클럽 공연이 잡혀 있다고 했다. 진심이 담긴 말에 향기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마이크에 대고 노래해 본 건 노래방 빼고 처음이었는데.

엄마 말이 맞았어.

향기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 * *

정식 부부가 되고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아, 무현은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짜증을 내는 건가.

그의 방에 침대가 바뀌었고 그의 사진을 걸어 놓았던 곳에 거실 것과 비슷한 웨딩 사진이 걸려 있다. 결혼이 싫어서 계약 결혼까지 한 무현이다. 말하지 않아도 꿈자리가 얼마나 뒤숭숭할지 이해된다.

향기는 여전히 손님방을 쓰고 있었다. 불시에 들이닥치는 어머니와 이진 때문에 그녀의 물건은 그의 침실에 둔 채. 외롭게 자랐던 탓에 그녀들의 방문이 싫지만은 않았다. 적응하기 힘든 건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소품인 거실에 걸린 웨딩 사진.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흠칫했고 무현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래도 무현의 고충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불편함쯤이야 감수할 수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평화로웠던 생활이었다. 정원이 넓은 2층집을 밖에서 볼 때까지만 해도. 본가로 들어와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2층에 어머니와 같이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공사한 2층은 넓은 거실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와 있어서 포근한 느낌이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네. 되게 밝고 좋아요. 고맙습니다. 어, 어머님.”

연습을 했는데도 어머님과 아버님이란 호칭이 입에 배지 않아 힘들었다. 그리고 무현을 아저씨라고 부르지 못하고 무현 씨라고 호칭하는 것도.

“답답할까 봐 이진이 쓰던 방 없애고 편히 쓰라고 거실도 넓혔다. 너희들 방에 욕실도 만들고.”

아저씨는 알고 있었어요? 향기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며 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현은 그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캐리어를 들고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연선에게 쫓기듯 무현을 따라 들어온 향기는 침대에 걸터앉은 그를 애원조로 바라보았다.

“왜?”

“아저씨, 우리 방 같이 써야 한대요.”

향기의 목소리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것처럼 고저 없이 흘러나왔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이제야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거야? 묻고 싶었지만 향기의 표정이 굳이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충분히 깨달은 얼굴이었다.

무현은 일어서서 향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티 테이블 의자를 가져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미니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 그가 뚜껑을 열어 건넸다.

“마셔.”

무현은 넓어진 방을 둘러보았다. 왠지 불안했다. 그래서 촬영 핑계를 대고 2주나 본가 방문을 미뤘던 거다.

「향기라도 보내.」

다른 가족은 몰라도 조부와 연선은 그냥 넘어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며느리가 왜 시아버지를 닮는 건지 모르겠지만 생각하는 것도, 성격도 두 사람은 부녀(父女)지간처럼 꼭 닮았다.

그 증거로 조부는 구청까지 무현과 동행했고 어머니는 멀쩡한 2층을 리노베이션 수준으로 공사를 한 거다.

무현이 이 방을 혼자 쓸 때도 가벽을 세워 서재까지 겸할 정도로 넓은 방이었다. 그런 공간에 욕실을 만들고 붙박이장부터 시작해서 침대와 티 테이블, TV, 오디오 시스템까지 갖춰 놓았다. 마치 밖으로 나올 것 없이 모든 걸 이 방에서 해결하길 바라는 것처럼.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붙박이장을 열어 보던 무현이 하,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역시나 여분의 침구류 비슷한 것이 가득했다.

무현은 들어와 살라는 말에 냉큼 그러겠다고 대답을 해 버려 제대로 사고를 쳐 주신 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돼?”

“그게요. 걱정이라기보다 황당해서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덜컥 들어와서 지내겠다고 한 거야?”

“나중에요. 나중에 생각났단 말이에요.”

향기가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했다.

무현의 가족과 처음 맞닥트린 날, 거의 넋이 빠져 있었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무현의 식구들은 향기에게 낯선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무슨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었을까.

어른들을 속인다는 죄책감에 벌렁대는 심장 단속하기도 바빴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무현과의 결혼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었다.

그런 와중에 집안의 최고 어른이 하는 말씀이었다. 거기에 무슨 토를 달까. 가족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그리고요. 지난번에 왔을 때는 이렇게 공사를 하실 줄 몰랐어요.”

그건 무현도 같은 생각이다. 2층 공사를 한다기에 인테리어를 바꾸는 줄 알았다. 도배나 가구 정도.

“내가 밖에 소파에서 잘 거니까.”

“그, 그건 안 돼요. 아저씨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어요.”

향기가 다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거실에 침대만 한 커다란 소파가 있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위치였다. 언제 누가 올라올지 모르는데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무현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향기를 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미 일은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 수 없다니.

무현은 호기심에 짐짓 심각한 표정을 하고 향기에게 장단을 맞췄다.

“다른 대안이 있어?”

심각하게 고심하던 향기는 목을 꼿꼿이 세우고 무연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를 여자로 보지 않는 무현이었다. 그렇다면 저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아저씨 저 믿죠?”

“믿느냐고?”

“무조건 믿어야 해요. 제가 아저씨 지켜 줄게요.”

향기는 은주의 말이 떠올라 절대 안 될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덮쳐.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덮쳐.」

사람이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다.

무현은 의아해하면서도 속으로 실소하고 말았다. 그러나 대놓고 웃기에는 향기의 표정이 너무 비장했다.

“들킬 순 없잖아요. 같이 자요. 아저씨 옷도 벗겼는데요, 뭘.”

향기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불까지 들어 올리는 무현의 괴력을 엿본 게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르는 척해 줄게요.’

얘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유체 이탈이라도 한 사람처럼 멍하더니 어느새 눈을 반짝인다. 무현은 캐리어를 끌어다 놓고 옷을 정리하는 향기를 보며 입매를 굳혔다.

연선이 앉아 있으라고 했지만, 향기는 그게 쉽지 않았다. 생각 끝에 연선에게 다가갔다.

“제가 도울게요.”

“앉아 있는 게 돕는 거야. 이것만 무치면 돼.”

“그럼…… 식탁이라도 차릴까요?”

“아주머니가 하셔.”

연선은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제 옆에서 서성이는 향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향기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었다. 아무리 사정이 있다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동거. 그리고 조건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짧은 시간이지만 겪어 보니 나쁘지 않았다. 사근사근하고 어지간해서 노여움도 타지 않는 밝은 성격이었다. 연락 없이 집을 방문해도 가식 없이 반기고.

다만 무현을 생각하면 뭔가 석연치 않았다. 제가 낳고 기른 아들인데 그 속을 모를까. 하지만 심증만 가지고 결혼을 반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결혼식도 일 년 뒤로 미뤘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옆에 두고 지켜볼 수밖에.

차라리 향기가 되바라진 아이라면 아들도 남자니까 그러려니 하겠다. 연선의 한숨이 깊어졌다.

‘이거야 원…….’

아무리 봐도 약수터 일급수(一級水)가 떠오르니 의심이 가시지 않는다.

오죽하면 혼인 신고를 하러 가는 당일까지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까. 결혼하라는 말은 다신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줄까. 별별 궁리를 다 했었다.

「어멈아, 무현이를 몰라? 마음에 없는 일은 절대 안 하는 녀석이다. 두고 봐.」

시아버지의 말씀에 그녀도 같은 생각. 똑똑한 애들이 그렇듯 무현은 서운할 정도로 손 갈 게 없는 아들이었다. 그만큼 호불호가 분명하고 까다롭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제 집에 여자를 들였다? 어른들 앞에서 손도 덥석 잡고? 그래서 아버님 말씀에 따르기로 한 거다.

복잡한 마음과 달리 연선의 손은 기계처럼 움직여져 접시에 나물을 담는다.

“어른들께 식사 준비 다 됐다고 전해 줄래?”

“네, 어머님.”

향기에게서 어머니 소리를 듣는 게 낯설어 연선은 낯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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