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식사를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향기는 식사 자리가 불편한데도 열심히 숟가락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제 앞에 있는 반찬을 몇 번이나 바꾸어 주는 말없는 손길들 때문이었다. 그나마 그동안 몇 번 식사를 같이한 이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가, 음식은 입에 맞아?”
“네, 맛있어요. 할아버님.”
성철과 살아온 덕에 무현의 할아버지는 그나마 편했다. 그리고 말씀은 없지만 미소를 보여 주는 무현의 아버지에게 유난히 시선이 간다.
“할아버지는 벌써 언니만 챙기기에요?”
“너는 알아서 잘 먹잖아.”
무현은 말없이 어른들이 권하는 반찬을 계속 집어 먹는 향기가 걱정됐다. 떠들 사람이 없기도 하고 그의 가정은 식사 문화가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반면 향기는 고향에서나 집에서 미주알고주알 있었던 일을 식사 때 풀어놓는 편이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어느새 향기의 습관을 알게 되는 무현이었다. 보다 못한 그가 향기의 팔을 잡았다.
“천천히 먹어.”
“……?”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씹고 있어요.”
잘 먹고 있는데 왜 그래요? 향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최대한 무현에게 붙어서 작게 웅얼거렸다. 가족들의 시선이 제게 몰리는 건 까마득히 모른 채.
“어, 이거 아저씨가 좋아하는 거잖아요. 확실히 어머님 손맛이 아주머니가 해 주신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많이 먹어.”
무현은 그가 좋아하는 반찬까지 참견하는 향기가 황당해서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향기 딴에는 안 보이게 한다고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는데, 그런다고 안 들리고 안 보이나.
두 사람을 지켜보는 가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어이 이진이 믿기 어렵다는 듯 물었다.
“우리 오빠 맞아? 이거 실화야?”
“넌 조용히 하고.”
“언니는 조용하면 안 되는데…….”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향기의 말에 풉, 하고 이진이 웃고 어른들도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향기는 고개를 틀어 무현을 바라보았다.
저 뭐 실수했어요? 무현이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를 저었다.
“식사할 때 조용한 편이야.”
“아. 말하면 음식 튈까 봐요?”
“크게 말해도 돼. 어차피 다 들리니까.”
고개 들고. 무현의 말에 향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들자 정말 가족들이 저만 쳐다보고 있었다.
범석은 손자의 변화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가, 크게 얘기해. 할아버지 귀가 어두워서 잘 안 들리니까.”
“정말요? 전혀 몰랐어요. 죄송해요, 할아버님.”
한껏 커진 향기의 목소리에 무현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가족 모두 향기를 바라보느라 숟가락질을 멈춘 채였다.
“잘 들리셔. 너 놀리시는 거야.”
“할아버님이 저를요?”
“밥 먹어.”
연선은 아예 숟가락을 내려놓고 무현을 바라보았다. 뭘 하나 물어봐도 네, 아니오, 혹은 단답형으로 대답하던 무현이었다. 그런 아들이 향기를 챙긴다. 그것도 불편할까 봐 먼저 물어보고 알아서 대답까지 해 주고. 너 내 아들 맞니? 연선의 시선이 범석과 마주쳤다.
“어멈아, 내가 지켜보자고 했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 * *
이상하게 잠결에도 미소가 지어질 만큼 포근했다. 아쉽게도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몸에 밴 습관은 일어날 시간이라고 몽롱한 정신을 흔드는데 향기는 오랜만에 느끼는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온기를 파고들다 겹쳐지는 기억에 입꼬리를 올렸다. 산골의 새벽은 유난히 추웠다. 투명한 유리창에 하얗게 이슬이 맺히고 어는 시간. 나무가 빽빽한 숲, 장독대 할 것 없이. 그런 어스름 새벽이면 잠에서 깬 향기는 꼬물꼬물 엄마의 품을 찾았다. 투정 부리듯 칭얼대면 엄마는 늘 품어 주고 향기는 그녀의 품에서 늦은 아침을 맞이했었다. 그 온기를 잃은 후 새벽 단잠도 잃어버렸는데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포근함이었다.
안개가 걷히듯 정신이 들자 향기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동굴에 갇힌 것처럼 몸이 후끈하고 시야가 캄캄한 걸 보니 또 이불 속으로 파고든 모양이었다.
‘아, 갑갑해.’
가만. 이불 속? 깜빡깜빡, 킁킁. 코끝을 파고드는 강렬한 향이 왠지 익숙해서 불안했다.
향기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민첩하게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분명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왜 침대에 누워 있는 걸까.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하는 게 두렵지만 용기를 냈다.
헉.
무현이 그림처럼 잠들어 있었다. 향기는 속으로 끙, 앓는 소리를 내고 살그머니 침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손을 올려 그의 눈앞에 대고 휙휙 흔들어 보았다.
새근새근.
다행히 깊이 잠들었는지 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왜 확인하는 제 심장이 도둑질하는 사람의 것처럼 벌렁대는 걸까. 향기는 손을 올려 제 가슴을 살포시 눌렀다.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한 향기는 오한이 든 사람처럼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우, 정말 ‘헐’이야.”
십 년 감수했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마음이 바빴다. 향기는 잽싸게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무현은 문 닫는 소리에 눈을 뜨고 입술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두 번만 지켜 줬다가는 사람 잡겠네.”
헐, 할 사람이 누군데. 생으로 날밤을 샌 여파가 컸다. 눈은 뻑뻑하고 움직일 수 없었던 몸은 근육이 경직돼 뻐근하고. 정말 기나긴 밤이었다.
2층에 올라온 후 서로 침대를 양보하겠다고 꽤 긴 실랑이를 벌였었다. 결국 무현이 방을 나가려 하자 향기가 절대 안 된다며 그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제안대로 킹사이즈 침대 양쪽 끝을 각각 차지하고 한 침대에 올랐다.
「아저씨, 이불 좋아하잖아요? 헤헤.」
오해를 단단히 한 것 같았다. 열이 많아 한겨울에도 시트 정도면 되는데 무슨. 더구나 혼자라면 입지 않을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너나 덮어.」
사양하지 말라며 그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향기는 침대 헤드에 기대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무현도 똑같은 자세로 책을 펼쳤다.
「밤 새려고?」
「피곤하면 잘게요. 수진 언니가 다운받아 준 영화 볼 거예요.」
핑계를 대는 게 빤히 보이지만 모르는 척해 줬다. 잠시 후 무현은 책장 넘기는 걸 포기해야 했다. 다채롭게 표정을 바꾸며 헤드셋을 낀 채 소리 내어 웃는 향기 때문에.
흥행이 된 영화도 아닌데 그렇게 재미있어? 이불을 팡팡 두드릴 때마다 이미 익숙해진 향기의 체향이 후각을 파고들었다. 그가 쳐다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향기는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다. 향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료하지 않았다.
‘오랜만이네.’
함께 살면서도 웨딩 촬영 이후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급히 드라마 출연을 결정한 거였지만. 어느 순간 툭,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렸더니 헤드셋을 낀 채 향기가 노트북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조용히 일어나 노트북을 치워 주고 안아서 누이고 이불을 덮어 줬다.
‘세상모르고 자면서 고집은.’
이마가 보이게 짧았던 앞머리가 길어져 어느새 눈썹을 덮고 있었다.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 더 작아 보여 머리카락을 치워 주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전생이 거북이였나. 잠버릇인지 이불 속으로 쏙 사라지는 얼굴. 숨 쉬는 게 걱정돼 이불을 내려 주길 여러 차례, 그도 피곤이 몰려와 침대 끝에 누웠다.
불멸의 밤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향기가 꼼지락거리며 이불과 함께 다가오더니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여자를 멀리하는 건 그의 의지지 남성 기능에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독자 노선을 걷는 방종한 녀석을 달래랴, 향기가 숨 막혀 잘못될까 봐 이불을 들고 있으랴. 새벽까지 바빴다. 그가 살아오면서 침대에서 보낸 가장 뜨거운 밤이 아닐까 싶었다.
무현이 마른세수를 하고 일어나 앉았다. 향기의 숨결로 데워진 옆구리에 열기가 가셨는데 아직도 그녀의 입술이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왜 밀어내지 않았을까. 확실한 건 얼굴을 푹 파묻고 저를 더듬는 손길이 싫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 어쩌라고…….”
무현은 아직도 뜨겁게 느껴지는 몸을 추스르며 밖의 욕실로 향했다.
* * *
계단을 내려가는데 드물게 집안에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무현이 주방으로 들어서자 가족들이 유난히 화기애애했다.
“넌, 네 안사람 쉬게 하지 않고 뭐 했어?”
안사람? 생소한 호칭에 무현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피곤했을 텐데, 푹 쉬게 하지. 정 없기는. 쯧.”
알 수 없는 질타에 무현은 묵묵히 향기의 옆에 앉았고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 무현 씨, 잘 잤어요?”
“아주 잘 잤어. 덕분에.”
비아냥이 실린 목소리를 내면서도 헛웃음을 참아야 했다. 사람 코앞에다 대고 손을 붕붕 젓고 욕실로 사라지더니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땐 향기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 간 거냐고 찾아다닐 수도 없고. 향기가 부지런한 건 알고 있었지만 본가는 그녀에게 낯선 곳이었다. 주방에서 이러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걸 다 새아기가 만들었다는구나.”
범석의 말에 연선은 괜히 무현의 눈치가 보였다.
“내가 시킨 거 아니다? 나오기도 전에 향기가 다 차려 놨어.”
어제처럼 풍성하지는 않은데 정갈하고 색감이 화려한 식탁이었다.
“수고 많았다. 향기 덕에 호강한다.”
목소리를 내지 않던 아버지까지 거드는 게 놀라워 무현이 미소를 보였다.
“맛은 있는데 다신 이러지 마.”
“그래. 누가 보면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 시집살이시키는 줄 알겠다.”
연선의 목소리에 애정과 아쉬움이 듬뿍 묻어났다. 시어른들이 계시니 차마 이런 상차림보다 늦게 일어나는 걸 바란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무현과 향기가 늦게 내려오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 늑장을 부렸다. 주방에 나와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주방 일을 시킬 생각도 없었지만, 나이가 어려서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재료를 다 손질해서 익히기만 하면 되게 만들어 놨는데 보통 깔끔한 게 아니었다.
맑은 소고기 뭇국도 간이 맞고 애호박을 파내고 갈은 고기와 새우를 넣은 완자는 거의 일품, 혹은 파는 요리 수준이었다. 야채와 향신료를 제대로 이용해 광어를 졸였는데 맛도 모양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맛있다고 하시니 다행이에요.”
“말도 예쁘게 하지.”
조모의 얼굴도 남편의 얼굴도 더없이 환한데 연선은 조금 찜찜했다. 생각지도 못한 반전의 모습을 보여 주는 향기가 예쁘고 기특한데 말이다. 걸음걸이도 그렇고 몸이 빠릿빠릿한 게 너무 팔팔했다. 연선은 체격 좋은 아들과 가냘픈 향기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창때다. 툭 치면 날아갈 것 같이 생긴 향기가 신혼의 밤을 보내고 저렇게 팔팔한 게 의아했다. 아니면? 연선은 무현에게 보약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