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31화.
라이브 클럽에서의 공연은 다른 세상 같았다. 클럽도 인디밴드도 향기의 눈엔 모든 게 경이로웠다. 총 다섯 팀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고 인디밴드를 모르던 향기에겐 그들의 음악이 생소했다.
에너지를 뿜으며 공연하는 사람이나 열광하는 관객이나. 연주와 노래는 뜨거웠다. 분명 평범함을 쓴 가사인데. 그런데도 본능으로 그들의 음악을 흡수하고 감히 끼어들었다.
영국 투어까지 하고 왔다는 밴드는 퍼포먼스까지 완벽했다. 특히 여자 드러머에게 향기는 반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인디밴드의 공연은 정오의 태양 같이 뜨거웠다. 적어도 향기가 느끼기에는.
나디아에게 주어진 시간은 삼십 분. 그중 향기에게 솔로로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전자 기타도 아니고 어쿠스틱 기타로는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는데도.
나디아가 먼저 포문을 열어 주고 향기가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이렇게 많은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처음 노래하는 거라 떨렸다. 더구나 밴드들의 화려한 퍼포먼스 후라 더 걱정이 됐다. 향기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했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정진이 달려와 덥석 안았고 향기는 반사적으로 그를 확 밀쳐 냈다.
“아, 미안. 관객들이 완전 환호하는 바람에 흥분했어.”
“저도 미안해요. 놀라서 그랬어요.”
“사람들 동영상 찍고, 난리도 아니었어. 봤어?”
“눈 감고 있어서 못 봤어요.”
정진은 강심장인 줄 알았던 향기가 떨리는 목소리를 하자 어깨를 툭툭 쳐 줬다.
“틀림없이 뜰 거야. 나중에 유명해진다고 모르는 척하면 안 돼.”
“절대 안 그래요.”
향기는 아직도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 * *
가게를 나온 향기는 건물 외부로 난 계단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끌시끌한 호프집이 정신없고 답답했는데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뒤풀이를 한다고 다 같이 술집에 몰려왔다. 공연의 흥분이 가라앉질 않아 집에 가서 혼자 음미하고 싶은데 빠질 수가 없었다.
구름을 밟고 걷는 기분이 이럴까. 별빛이 멀다. 고향에선 선명했던 별빛이.
“엄마도 이런 기분이었어?”
그래서 가수가 되겠다고 서울에 왔던 거야? 묘하게 마음을 들뜨게 한다. 마치 할아버지가 담근 과실주를 마시고 몽롱해지는 것처럼. 그래도 난 절대 잡아먹히지 않을 거야.
그런데 왜 무현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공연 내내 노래를 부르면서도 무현의 얼굴이 떠올라 힘이 났다. 어쩌면 은주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 잘난 남자를 매일 보는데 버틸 수 있겠어?」
무현만 보면 가슴이 떨리는데 안 보면 보고 싶다. 욕심내면 절대 안 되는 사람인데.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였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향기의 얼굴이 환해진다.
“아저씨?”
-아직도 홍대야?
“네. 호프집이요.”
-…….
향기는 아무 말이 없는 무현을 아저씨, 하고 다시 불렀다.
“저 첫 공연인데 되게 잘했대요.”
-언제 끝나?
“잘 몰라요.”
-상호 찍어 보내.
“왜요?”
-보내 놔. 바로.
향기는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기분이 안 좋은가…….”
무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피곤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면 들어오기 힘들다던 무현이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고 있다. 새벽에 들어와서 아침 일찍 나가더라도. 아무래도 저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하지만 무현이 집에 들어오는 게 좋았다.
실은 넓은 집에서 혼자 자는 게 무서웠다. 몇 번씩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동이 트면 잠들곤 했는데 새벽에라도 무현이 들어오고부터는 편히 잘 수 있었다.
향기는 휴대폰이 무현이라도 되는 듯 암팡지게 노려보며 일어섰다.
“이러니까 연애를 못 하는 거예요!”
무현은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 버릇이 있다. 어쩌다 전화를 못 받으면 화를 엄청 내면서. 부재중 전화가 뜨면 보는 즉시 전화해라, 이동할 때마다 문자 메시지 남겨라, 잔소리가 날아온다. 대신 정우 아저씨의 잔소리는 사라졌지만.
향기는 툴툴거리면서도 무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 얼른 메시지를 작성해 보낸다. 공연도 그렇고 창원과 인서를 만나는 것도 주말이 편했다. 어렵게 말을 꺼내자 무현이 본가에 가는 요일을 바꾸어 주었다. 그 덕에 주말 버스킹을 할 수 있게 됐으니 그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테이블에 합석하자 창원이 물었다.
“괜찮아?”
“뭐가요?”
“난 처음 관객들 앞에서 노래하고 다리 풀렸었거든.”
“완전 공감해요. 오다리 춤, 추는 줄 알았어요.”
향기가 익살스러운 얼굴을 하고 창원의 말에 동감한다고 했다.
“향기 너, 실전 타입 같아. 연습할 때보다 더 잘했어.”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세 번째 부른 곡, 처음 듣는데. 그거 자작곡이지? 좋던데?”
“엉망이에요. 나중에 오빠들이 봐주세요.”
향기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자작곡이라는 말이 아직도 어색하기만 향기였다. 그런 그녀를 보는 인서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앙코르 박수에 연습도 하지 않은 곡을 과감하게 불러 놓고 저런 얼굴을 하다니. 향기는 아직 본인이 얼마나 큰 재능을 가졌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인서가 말을 이었다.
“프로듀싱이 뭔지 알지? 필요하면 말해.”
“맞추기 어려울 거예요.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악보 보는 것도 잘 몰라요.”
“그럼 작곡은 어떻게 한 건데?”
“그냥 듣기 좋아서?”
재능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금만 다듬으면 더 좋을 것 같아.”
노래를 듣는 내내 ‘자고 일어났더니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어 있더라.’ 하는 말이 향기의 얘기 같았다. 완성도가 다소 떨어지는 곡이었다. 그런데 꾸미지 않은 목소리에 꼭 맞는 기타 선율이 보태져 사람을 들뜨게 했다. 그만큼 흡입력이 대단했다.
그들은 연신 잔을 부딪쳤다.
호프집을 나오자 정진이 말했다.
“향기 너도 2차 갈 거지?”
“네? 그게…….”
“여기서 가까운 단골 포차 있어. 가자.”
향기가 잠시 망설일 때였다. 음산한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향기도 일행들도 동시에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얼어붙고 말았다. 청바지에 무채색 카디건만 걸치고 차에 기대 서 있는 남자는 무현이었다. 선글라스도 쓰지 않는 무현이 무려 홍대 먹자골목에 나타났다. 창원이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사람 차무현이지? 나 제대로 본 거 맞아? 향기 불렀던 거 같은데.”
향기가 안절부절못하자 정진이 먼저 무현에게 인사를 했다. 창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차무현 씨 알아?”
“어. 사촌형이 선배 매니저야.”
정진이 그렇게 포석을 깔아 줬지만 무현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류향기 뭐 해?”
“네?”
“이리 와.”
향기는 어느새 저를 잡아당기는 무현의 손에 이끌려 그의 옆에 섰다.
“기타 주고.”
벌써 무현을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기타를 뒷좌석에 실은 무현은 입꼬리를 올리고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같이 술자리 한번 갖죠.”
무현은 얼이 빠진 사람들처럼 저를 보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향기의 어깨를 감싸 보조석에 태우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먹자골목을 빠져나오고서야 향기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뭐가?”
“여기 왜, 아니 미쳤어요?”
“데리러 온 거잖아.”
무현이 대수롭지 않은 얼굴을 하자 향기는 황당했다.
“아까 사진 찍혔어요.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네가 책임져.”
“내가 어떻게요?”
울상을 짓는 향기와 달리 무현은 얼굴도 목소리도 편안해 보였다.
“잘 생각해 봐.”
무현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향기에 대한 제 감정의 색을 찾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여자로 인식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향기에게 기회를 준다는 생각으로 한 결혼이었다. 잠깐의 충동이라면 저보다 향기를 위해서 감쪽같이 숨겨야 했다. 혼자 앓더라도.
향기가 없는 집에 들어가는 게 꺼려졌다. 혼자 잠드는 게 걱정됐다.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피곤해도 잠들 수 없었다. 그리고 안고 싶었다. 그동안 저를 원하는 여자들은 많았다. 누가 봐도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 그런 여자들에게 동요하지 않던 몸이 향기에게 반응했다. 그것조차 무시했다. 한집에서 같이 지내고 일주일에 두 번은 함께 침대를 사용한다. 남자라면 성욕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더 신중해야 했다. 그게 이유라면 마음을 접어야 하니까.
그런데 확실해졌다. 평범한 언어로 웃게 만드는 향기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 그의 감정이 춤을 춘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어린 향기에게 화도 내고. 저렇게 젊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게 불안했다.
무현은 향기가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틀었다.
“술 많이 마셨어?”
“아저씨가 많이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무현의 잔소리 탓도 있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취하고 싶지 않았다.
“나 봐.”
향기가 고개를 틀자 또렷한 눈동자가 보인다. 무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저 또래 남자들의 습성을 잘 안다. 더구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음악 하는 녀석들이다. 걱정돼서 집에 앉아서 기다릴 수 없었다.
또래들과 섞여 있는 향기는 누구나 탐낼 만큼 예뻤다. 그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들과 어울려 웃고 있는데 묘하게 심사가 뒤틀릴 정도로.
“저녁은?”
“김밥이요. 지금 이런 말 할 때예요?”
“그럼.”
“아저씨, 내가 생각해 봤는데요.”
골똘히 생각하던 향기가 어느새 눈을 반짝이자 무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