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32화 (32/56)

# 32

32화.

“혹시 포털 사이트에 뜨면 삼촌이라고 하는 거예요. 제 생각 괜찮죠?”

“남편이 삼촌이라는 게 말이 돼?”

“헐.”

“숨기다 밝혀지면 더 힘들어져.”

“그럼 어떻게 해요?”

누가 보면 세상이 무너진 줄 알겠다. 향기의 표정이 딱 그랬다. 무현은 무심히 말했다.

“나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그야 아저씨가 먼저죠!”

“넌 괜찮고?”

“저는…….”

잠시 생각하던 향기가 제법 비장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심각하게 생각해 봐.”

“뭘요?”

“우리 결혼 사실화하는 거.”

향기가 사실화라면? 하고 물었고 무현은 빙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진짜 부부가 되는 거.”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으냐고 말하는 향기를 무현은 한참을 응시했다.

“방 같이 쓰고 같이 일어나는 거.”

“하고 있잖아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매일.”

무현의 말에 향기의 눈이 커다래지더니 체념하듯 한숨을 포옥 내쉬고 그를 쳐다보았다.

“결국, 본가에 들어가게 됐어요?”

“……?”

“내가 그럴 줄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뭐.”

향기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본가에 가는 날이면 무현과 저를 반기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마음에 걸렸었다. 들어와 살아 줬으면 하는 눈치.

무현은 어렵게 속을 보였는데 다른 길로 새는 향기가 답답했다.

“넌 내가 남자로 안 보여?”

“아저씨는 가끔 이상해요. 당연한 걸 왜 물어요?”

아저씨가 남자지 여자냐는 향기의 말에 무현은 오를 산이 꽤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사람 말고, 남자.”

“무슨……?”

“난 네가 여자로 보이거든. 그러니까 생각해 봐.”

음 소거된 향기의 입술이 벙싯거렸고 무현은 자동차 속력을 높였다.

* * *

너무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뛰고, 총체적 난국이다. 근처에 학교가 있던가. 시원한 바람이 맞고 싶었다. 학교 운동장이라도 몇 바퀴 돌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것 같아서. 하지만 방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향기는 떠오르는 목소리에 이불을 꼭 쥐고 부르르 떨었다.

「오래됐어. 너 여자로 본지.」

무현은 오래전부터 남자였다. 처음 그녀의 집을 찾아왔을 때부터. 처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엘프’ 같은 존재였으니까.

이불을 잡았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잖아요.”

하찮은 말에도 귀를 기울여 줬다. 관심을 끌기 위해 어린아이가 아무 말이나 주워 삼키듯 그에게 쉼 없이 조잘댔다. 황당한 얼굴을 하는 무현이 보고 싶어서. 까칠한 그가 슬쩍 미소 짓는 게 보기 좋아서.

무현은 근사했다. 왠지 믿어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무현을 보고 가슴이 콩닥거린 건, 어설픈 감정놀음. 무현은 그에게 어울리는 사랑하는 여자를 찾고 저는 제자리로 돌아가면 된다.

“약속했거든요. 잡아먹히지 않겠다고.”

잠깐의 흔들림에 저를 내어 줄 생각은 없다. 아끼고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게 사랑이라는데 향기가 엿본 실체는 그렇지 못했다.

“엄마도 엘프를 사랑했던 거야?”

향기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거실로 나온 향기는 멈칫했다. 무현이 소파에 길게 누워 잠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또 새벽에 들어온 건가. 어제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나가 봐야 한다고 했던 무현이었다.

향기는 발소리를 죽여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그의 몸을 덮어 주고 소파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길게 찢어진 눈에 날카롭게 솟은 콧대. 여자처럼 얼굴도 작다. 피부는 보드랍고. 하나도 착하게 생기지 않았는데 너무 착한 사람.

「욕심내는 것 같았어.」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저를 좋아하는 게 욕심 같아서 망설였다고 말했다.

향기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엘프 맞네.”

요정은 요술 주머니가 아니다. 손만 넣으면 뭐든 쥐여 주는 만능 주머니가 아니다. 그런데 왜 무현은 모든 걸 주려고 하는 걸까. 자신마저도.

향기는 고르게 숨 쉬는 무현의 코에 귀를 대 보았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욕심이 생긴다. 귀 뒤로 양쪽 머리를 넘기고 눈을 감은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내렸다.

닿았다. 폭신하고 보드랍고 뜨겁다. 번쩍 눈을 뜬 향기는 팔딱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얼른 일어섰다. 황급히 종종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무현은 길게 호흡을 하고 슬며시 눈까풀을 들어 올렸다.

엘프? 내가?

이렇게 갑자기 성은을 내려 주시면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의 입가에 난감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야간 촬영을 하고 새벽에 들어왔다. 향기가 일찍 일어나는 걸 알기에 소파에 잠시 누워 있으려던 게 잠이 들고 말았다. 향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잠이 든 것을 확인하려는지 그의 숨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가져다 대는 것 같은 느낌. 그녀의 체향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어른거리는 열기가 점점 내려왔다. 도둑 뽀뽀라니.

언제까지 누워 있어 줘야 할까. 주방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달그락 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와라. 달려와 주면 더 좋고.’

* * *

스타일리스트 수진의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온 무현은 멈춰 뒀던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한동안 응시하다 여운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35%의 시청률을 찍고 종영됐다.

시청률이 나오자마자 속속 환호하는 연락이 오고 그들이 다시 뭉쳤다. 지금 출연하는 드라마와 달리 100% 사전 제작. 이미 촬영 종료 쫑파티와 중간에 자축 파티를 가졌는데도 유난히 합이 좋았던 팀이었다. 종영 쫑파티를 갖는 건 당연했다.

무현도 인터뷰 후 바로 합세했고 촬영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 이례적인 시청률, 풍성한 얘깃거리에 귀를 열어 주고 있었다.

주연으로서의 책임감이랄까. 오늘만큼은 조연이 되어야 하는 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수진이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다급히 찾았다.

「오, 오빠, 이거 틀림없이 향기 맞죠?」

수진이 보여 준 영상은 뜻밖에도 향기였다.

「클럽에서 지난주부터 올라온 영상이에요.」

수진은 인디음악 광팬이었다. 클럽은 물론 한겨울 길거리 버스킹 공연을 찾아다니는 걸 마다하지 않는. 이목이 쏠릴까 싶어 음 소거를 시킨 영상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

「벌써 조회 수가 엄청나요.」

처음 올라온 영상은 조명이 어두워서 가수가 누군지 확인이 안 됐단다. 그런데 주말에 찍은 버스킹 영상이 다시 올라왔고 설마 했다고. 향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워 몇 번이나 돌려 봤단다.

무현은 영상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마음이 착잡하다. 콕 집어 정의할 수 없지만,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맑은 목소리에 묘한 배신감까지 든다.

향기에게 마음을 밝히고 주말 내내 그녀의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전화해도 받지 않고 문자 메시지에 답도 늦고. 저를 피하는 거라 생각하면서도 기다렸다. 향기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영상을 보고 있으니 기가 차서 헛웃음만 나온다.

“이러고 다니느라 바빴던 거야?”

재주도 좋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람 속을 들끓게 하다니.

묵직한 한숨을 쏟을 때였다. 무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우가 손에 휴대폰을 든 채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진이 정우에게도 동영상을 보여 준 모양이다.

“이거 사실이야? 너 알고 있었어?”

“뭘.”

“향기가 이렇게 노래 잘하는 거.”

무현이 고개를 젓자 정우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했다.

“미치겠다. 이 정도면 네 계획 물 건너가는 거야.”

무현이 입매를 삐딱하게 만들었다. 정우의 목소리와 이어폰을 연결하지 않은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당장 우리 소속사로 데려와. 도장 찍자.”

“싫대.”

“가수 되고 싶어 한 거 아니었어?”

“우리 소속사가 취향이 아니란다.”

정확히는 가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고 했다. 그 점이 무현도 의문이다. 도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건지, 상업 음악이 싫다는 건지. 그래서 인디 쪽으로 관심을 보이는 건지. 향기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다.

정우가 나름대로 해석하고 말했다.

“요즘 음악 차트 1위 찍는 애들, 다 인디음악 하는 친구들이야. 향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해도 된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

“스타성 있어. 무조건 데려와. 무드셀라 증후군이라고 들어봤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향기가 딱 복고 그 필이거든. 그러면서도 튀고. 연령대 상관없이 먹힐 거다.”

무드셀라 증후군. 대중문화 전반에 복고 열풍이 불고 있다. 추억 팔이. 드라마도 음악도. 하물며 간식거리까지. 좋았던 시간을 소환하고 싶은 대중의 심리에 향기의 이미지가 부합된단다.

귀여운 외모, 톡톡 튀는 말투 하며, 가식 없는 순수함이 그대로 전해진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천부적인 재능이 또래부터 높은 연령대에게까지 어필될 수 있는 무기라고. 말이 없는 무현을 정우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 같이 산 지가 언젠데 여태껏, 차무현 정말 한심하네.”

“그러게.”

“뜨면 변하는 게 사람이야. 순둥이처럼 생겼어도 맹하진 않잖아.”

너보다 내가 향기에 대해선 세세히 알고 있어. 그러니 입 좀 다물어.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네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인간이 좀 복잡 다양하냐? 호불호 있어. 그러니까 빠르게 움직여.”

향기가 독특한 편이다. 극구 무현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만 봐도. 그래서 향기를 제대로 보게 된 거지만. 다루기 쉽지 않은 여자다. 정우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했다.

“쉽지 않겠다.”

“인사하고 나올게.”

어느새 무표정해진 얼굴을 하고 무현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는 혼잣말을 했다.

“속 좀 타겠네, 차무현.”

정우는 고개를 젓고는 차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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