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33화 (33/56)

# 33

33화.

벨 소리에 현관으로 나갔던 향기는 무현을 보고 놀란 눈을 했다. 평소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던 사람이 벨을 누른 것도 이상한데 이미 들어와 있었다.

“아저씨, 인터폰 누르지 않았어요?”

“씻고 나올 거야.”

“네?”

“들어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방으로 들어가는 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향기는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일 본가에 가려고 짐을 챙기던 중이었다. 그들이 머무는 2층에 모든 게 준비돼 있지만 그래도 필요한 게 있었다. 무현의 옷을 접어 가방에 넣던 향기는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겠지.”

무현이 벨을 누른 건, 저를 부른 거다. 더는 피하지 말라는 경고 같은 것. 주말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일 때문이 아니라 무현 때문에.

길거리 공연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오히려 클럽 공연보다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창원과 인서는 틈만 나면 무현과 어떻게 되는 사이냐고 물어보고 지인이라고 말해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포털 사이트는 잠잠한 걸까.

잡다한 생각이 아니더라도 무현의 생각으로 노래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주변에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쁜 여자들이 차고 넘치는 무현이 왜 제게. 수진의 말로는 무현은 그런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고 했다. 좀처럼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러다 든 생각. 무현도 남잔데 여자와 같이 침대를 쓰면서 다른 마음이 생긴 건 아닌지.

주방으로 가자 무현이 벌써 나와 있었다.

“앉아. 차 마실래, 아니면 술 할까.”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어요.”

뭐가 그렇게 전투적이야? 향기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현은 소주와 안주를 준비해 식탁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술을 채운 잔을 향기의 앞에 밀어 주고 그도 잔을 채웠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향기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생각해 봤는데요. 혹시 섹스 때문에 그래요?”

컥, 소리와 함께 무현이 술을 뿜었고 얼굴을 찌푸린 향기가 그에게 휴지를 건넸다. 무현이 거칠게 휴지를 낚아채 입가를 닦았다.

“뭐?”

“본능, 그런 거 있잖아요. 아저씨도 남잔데.”

할 말을 잃은 무현은 향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기가 막히다 못해 돌 것 같아서. 싫다, 좋다, 가 분명한 향기였다. 대답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할지언정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 그래도 그렇지 이런 돌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다.

“그게 궁금해?”

“그런 게 아니면 갑자기 제가 여자로 보일 리 없잖아요.”

“갑자기가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대놓고 물어봤으면 얼굴이라도 빨개지지 말든지. 대담한 척하면서도 떨고 있는 게 고스란히 보여 무현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삼켰다.

“아니라고 말 못 해. 더구나 새벽마다 고문하는데 그런 생각 안 하면 정상 아니지.”

“고, 고문요?”

“잠버릇 고약한 류향기.”

“아, 알고 있었어요?”

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커졌던 향기의 눈이 애처롭게 닫혔다. 본가에서 새벽에 깨어 보면 저도 모르게 무현의 온기를 훔치고 있었다.

“……따뜻해서, 미안해요.”

“미안할 거 없어. 나도 따뜻했으니까.”

본가에 가면 앉아서 조는 향기를 침대에 눕혀 주는 게 당연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고 나면 꼬물꼬물 옆구리를 파고들고, 새벽에 깨서 번개같이 방을 빠져나가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요.”

“또 뭘.”

“그게 다른 여자였어도 같았을 거예요. 한 침대를 쓰면.”

답을 구한 듯 밝아지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절대 만만한 여잔 아니었다. 여자라, 그렇다면 말하는 게 훨씬 수월해지겠지.

“넌?”

“네?”

“너도 옆에 누가 있든 파고들고 그래? 아무 남자나?”

“그건! 아니에요.”

발끈하다 꼬리를 내리는 향기가 귀여워 무현은 피식 입술을 늘렸다.

“오류가 많아. 일단 너 아니었으면 계약 결혼 같은 얘긴 꺼내지 않았겠지. 옆에 둘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고. 참고로 남자들 욕구 해결 방법은 많아. 결혼하지 않아도. 싫어서 안 할 뿐이지.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직은 맑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향기에게 노골적인 단어를 쓸 수 없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삐죽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들은 나중에 한 거고, 네가 신경 쓰였어, 처음부터. 궁금하고.”

무현은 그래서 네가 받아들이길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진 말.

“연애, 하자.”

향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무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많은 생각이 담긴 눈빛을 하고. 좋다. 설렌다. 심장이 남의 것처럼 나댈 정도로.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유는?”

“저는 이성 간의 사랑 믿지 않아요. 원래 약속대로 해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싫은지 좋은지만 말해.”

돌연 향기가 배시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차무현을 싫다고 말할 수 있는 여자가 과연 있을까. 뭐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다. 욕심 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하지만 잘난 무현을 좋아했던 게 아니다. 저를 걱정해 주던 눈빛. 그게 저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말해 봐, 내가 싫어?”

“아뇨.”

“그럼 됐어. 나머진 천천히 생각하자.”

그리고…… 하며 말을 이은 무현이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을 찾았다. 그리고 향기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설명해 봐.”

“아저씨도 봤어요? 그런데 뭘 말해야 해요? 버스킹하는 건 말했잖아요.”

향기가 해맑은 표정을 하자 무현은 무력감이 밀려왔다. 방금 전까지 각자의 길을 가자고 말했던 여자가 맞나 싶어서. 야무진 거절 끝에 툭 던져 준 싫지 않다는, 말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자신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러게. 알고 있었는데 왜 화가 날까.”

“동영상 올라온 거 말 안 해서 그래요?”

“아니. 널 어떻게 해야 하나 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무현은 느릿한 시선으로 눈을 깜빡이는 향기를 훑어 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눈에 빤히 보이는 것들. 평범하지 않은 환경, 독특한 사고, 상처받은 마음, 뭐 하나 쉬워 보이는 게 없는 향기였다.

지금도 ‘결혼이 뭐 대순가요?’ 말하던 덤덤한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제가 느끼는 감정이 연민인지, 애정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사이 향기는 태풍 한가운데로 들어가 있었고.

무현은 생각을 뒤로하고 물었다.

“네 취향에 맞는 소속사가 어디야. 말해 봐. 괜찮은 곳이면 연결해 줄게.”

“고맙지만 싫어요.”

“그럼, 뭐가 하고 싶은지 말하든지.”

향기는 저를 걱정하는 무현의 마음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저었다. 무현이 도울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었다.

무현은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날 믿고 여기까지 왔으면 그 정도는 말해 줘야지. 안 그래?”

“정확히 말하면 아저씨가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 돼요.”

향기의 말에 무현이 미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처음엔 순진해서 거절한다고 생각했고, 나중엔 성격인가 했다. 유난히 독립심이 강한 친구들이 있으니까.

“나도 너처럼 생각이라는 걸 해 봤는데 말이야.”

“무슨…….”

“류향기도 하고 싶은 것만 하잖아.”

무현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 좀 해 보려고.”

사랑이 꼭 쌍방향만 있는 건 아니다. 더뎌도 제게 올 거라 믿었기에 느긋했는데 도망칠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마음이 급해진다. 혼자 성큼 내디딘 마음이.

“네가 믿지 않는 사랑도 해 보고, 결혼 발표도 하려고.”

“결혼 발표는 아직 안 돼요!”

“사랑은 되고?”

향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현이 좋다.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면서 진짜 결혼을 한 거 같다는 앙큼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본가에 가는 날엔 더더욱. 그리고……. 향기는 저도 모르게 무현의 입술을 응시하고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좋아요.”

잠깐, 잠시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곳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무현을 욕심내고 싶었다.

“이혼해 준다는 약속은 지켜 줘요. 발표도 미뤄 주고요.”

“……?”

무슨 말이지? 무현은 꽤나 심각한 얼굴을 하는 향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향기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부부 생활, 해요. 침대, 같이 써요.”

“지금 한 말이 무슨 의민 줄 알아?”

어렵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끝까지 저를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자신감은 있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언뜻언뜻 저를 향한 향기의 낯붉힘을 모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엉뚱함의 끝을 보여 주는 향기가 황당하다. 제게 마음을 열라는 말이었는데 몸부터 다가오겠다니. 뭐가 먼저든 다가오겠다는 향기를 무현은 기꺼이 품을 생각이다.

“후회 안 하겠어?”

“안 해요.”

무현은 일어서서 향기에게 다가갔다. 얼결에 일어선 향기가 주춤 뒤로 물러서자 삐익,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현은 얼어 버린 향기를 보고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양손을 올려 그녀의 뺨을 감싸 올렸다.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파르르 떠는 게 느껴진다.

“눈 감아.”

“……!”

샛눈 뜬 얄팍한 눈까풀이 파들파들 경련하자 무현이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숨결에도 향이 난다. 향기를 닮은 상큼한 체향이.

“아, 아저씨! 지, 지금부터 하는 거예요?”

향기의 말에 무현은 뺨을 감싼 손을 내려서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당겨 안았다. 웃음 터진 얼굴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아, 얘를 어떻게 하지.

키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알려 주려고 했을 뿐인데.

쿵쿵, 엇박자로 뛰는 향기의 심장이 그의 몸을 심하게 두드렸고 무현의 어깨가 들썩였다.

향기는 숨쉬기가 곤란해 겨우 얼굴을 틀었다. 무현의 가슴에 뺨이 눌려 입술이 뾰족해졌다.

한참 향기를 안고 있던 무현이 그녀의 이마에 딱, 소리가 나게 알밤을 먹였다. 화들짝 놀란 향기가 고개를 들자 무현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긴 뭘 해. 이렇게 떨면서.”

이런 와중에도 무현의 심장이 삐걱댄다. 제 몸의 반이나 될까 싶은 향기가 예뻐서. 새빨갛게 익은 얼굴도, 연두색 잎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도 그의 몸을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