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화.
“아직 소식 없니?”
“무슨 소식요?”
향기가 연선을 빤히 바라보고 미소를 짓자 그녀가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속이 거북하다거나 먹고 싶은 게 있다거나.”
“어머니.”
무현의 낮은 부름에 연선은 “알았어, 무슨 말을 못하게 하니?”라고 말하며 눈을 흘겼다. 향기에게 말 좀 붙이려고 하면 어느새 나타나서 약속을 들먹이는 통에 입을 뗄 수가 없다.
“그만들 해라. 아이야 차차 생기겠지.”
향기는 열 오른 뺨을 손등으로 누르고 숟가락을 들었다. 올 때마다 풍성한 식탁을 차려 주는 어머니가 고마워서라도 밥그릇을 비워야 하는데 오늘따라 입맛이 없다.
“혹시 입맛이 없니?”
“아니요!”
쓸데없는 오해를 받을까 무서워 얼른 밥을 뜰 때였다. 무현의 손이 다가오더니 절반의 밥을 덜어 간다.
뭐 하는 거예요? 향기가 항의하듯 입술을 오물거리자 무현이 입술을 길게 늘였다.
“향기, 점심을 늦게 했어요.”
“넌 일찍 했고? 밥 모자라면 더 줄까!”
연선은 무현이 하는 짓이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발끈했다. 성격이 까탈해서 반찬도 개인 접시를 쓰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향기가 먹던 밥을 덜어 가는 걸 보니 속에서 열불이 일었다.
할아버지 범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새아가는 요즘 뭐 하고 지내누.”
“네? 아. 낮에는 친구들 만나고…… 그냥 있어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현이가 잘해 줘?”
“……네.”
살이 좀 빠진 것 같다며 할아버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자 향기가 밝은 얼굴을 했다.
“할아버님 저 통뼈에요. 걱정 마세요.”
“대답도 잘하고 예뻐. 힘든 건 없고?”
“네. 요즘은 서울 지리도 많이 익숙해졌어요.”
“그래도 초행길은 무현이한테 데려다 달라고 해.”
향기는 살갑게 대답하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런 향기를 보는 범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젠 제법 식구들이 편해졌나 했는데 이번 주엔 향기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근심 가득한 사람처럼.
“식사 다 했으면 올라가서 둘이 놀아.”
“네? 네.”
연선도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현에게 눈을 흘겼다. 혼자 집에 올 때는 2층에서 내려올 생각도 않던 녀석이 향기가 움직이면 따라붙는다. 누가 제 색시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아는지.
“무현인 드라마 촬영 막바지 아니야? 안 가 봐도 돼?”
“이번 주 촬영은 끝났어요.”
향기는 연선이 말리는데도 극구 설거지까지 끝내고 2층으로 향했다.
무현은 거실에서 범석의 대국 상대를 해 주며 피식 입술을 늘였다. 연선이 화낼 만했다. 입맛이 없을 걸 알기에 향기의 밥을 덜어 와 놓고 그도 제가 한 행동에 당황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멜로나 로맨스 작품을 기피하는 이유도 스킨십 때문인데 타인의 타액이 섞인 밥을 먹다니.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데 범석이 무현을 불렀다.
“살아 볼 만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사고 좀 쳤더구나. 요새 애들은 왜 그러는지, 원.”
향기와 함께 찍힌 동영상을 범석이 처리했다. 평범해 보이는 향기와 그쪽으로는 워낙 깔끔했던 무현이라 그 덕을 좀 봤다. 조회 수가 높지 않고 댓글조차 헛다리를 짚었다고 달려 처리하는 게 힘들지 않았던 거다.
“아직 결혼 발표는 할 생각 없고?”
“조만간 할 예정입니다.”
“그래? 새아기가 바쁜 것 같던데 괜찮겠어?”
무현은 멈칫하고 범석을 바라보았다. 혹시 사람이라도 붙인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거리 공연 몇 번 한 게 범석의 귀에 들어갈 리 없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업 기밀을 공짜로 말해 줄 순 없지. 어멈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다. 말릴 생각은 없고?”
“그건 말릴 수 없습니다.”
“애가 반듯해서 걱정은 없다만. 손 타서 좋을 건 없다.”
무현은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고 화제를 돌렸다.
* * *
“살아서 왔네?”
“그러게요.”
“구하러 갈 뻔했어. 욕조에 빠진 줄 알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무현이 시선을 책에 둔 채 말했다. 향기는 입을 삐죽이고 티 테이블에 앉았다.
누구 때문인데. 샤워를 끝내고도 욕실에서 거의 한 시간 넘게 있었다. 넓다고 해도 욕실, 쉴 새 없이 서성여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무현은 향기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느껴져 입술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올라와서 자.”
“하, 할 게 있어요.”
“다시 말해?”
무현이 한쪽 이불을 들춰 놓자 향기는 쭈뼛거리며 침대로 올라갔다. 잠들어서 같이 눕는 것과 말짱한 정신에 함께 눕는 건 차이가 컸다. 무현은 비스듬히 누운 채 팔만 들어줬다. 꼼지락거리다 파고들 테니까.
“미리 빌려 줘?”
“아니요.”
얼굴만 내놓고 철봉에 매달린 사람처럼 이불을 양손으로 꼭 쥔 모습에 무현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현이 일부러 손을 뻗어 향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왜?”
“우리 매일 이렇게 자야 해요?”
“아니.”
책에서 눈을 뗀 무현이 고개를 틀어 향기를 내려다봤다.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한숨 끝에 장난기 섞인 낮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부부가 잠만 자겠어?”
또 눈을 질끈 감는다. 이렇게 바로바로 반응을 보여 주니 더 놀리고 싶다. 무현은 리모컨으로 불을 끄고 무드등을 밝혔다.
그리고 향기를 볼 수 있게 모로 누웠다.
“오늘 팔 베고 자면 넘어가 주고.”
팔을 뻗어 주자 한참을 꼼지락거리다 마지못해 그의 팔을 벤다.
팔을 감자 작은 체구의 몸이 그의 품에 들어왔다.
“자.”
대놓고 품을 빌려줬는데, 대놓고 몸은 언제쯤 받아 가려나. 느슨하게 향기를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막으며 무현은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Chapter. 8
“차무현 씨만 믿겠습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 계시는데 제가 들을 말은 아닙니다.”
무현의 말에 제작사 대표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사라가 많이 부족한데, 무현 씨가 잘 이끌어 줘요.”
“선배님, 잘 부탁드려요. 열심히 할게요.”
무현은 대답 없이 여주인공을 맡은 정사라를 짧게 훑었다. 신인이라 신선하고 귀여운 상이어서 극중 이미지에 맞는 얼굴이었다. 다만 주말 드라마에 투입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돈을 대는 제작사에서 밀겠다는데 무현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정사라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이현미 작가님이 차무현 선배님 팬이래요. 저도 팬이고요.”
“네.”
“선배님, 제가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친하게 지냈으면 해서요.”
무현이 대답 없이 감독에게로 시선을 두자 의외였던지 사라의 낯이 굳어졌다.
“장 감독님, 작가님한테는 제가 따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작년부터 검토하던 극본이었다. 호흡이 긴 주말 드라마라 망설였는데 작가가 무현의 데뷔 작품을 집필한 이현미였다. 그가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떼게 해 준 작품의 작가. 작가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무현이 주연을 꿰차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런저런 불편을 감수하고 보은하는 마음에서 출연 결정을 했는데 여주인공이 아무래도 걸린다. 너무 치대는 경향이 있어서.
무현의 고민을 읽었는지 장 감독이 말했다.
“여전하네, 차무현. 상대 배운데 친하게 지내면 어디가 덧나나.”
“책임 확실하게 지실 거죠?”
굳이 연기력이라고 짚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눈치였다. 장 감독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감독님이 계신데 제가 왜 걱정을 합니까.”
“칭찬 맞지? 빈말이라도 고맙다.”
배우의 역량을 어떻게든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감독이었다. 장 감독이 시원하게 웃고는 제작사 대표를 보고 말했다.
“편성받느라 개고생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차 배우도 있겠다, 주말 드라마라 시청률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제작비나 팍팍 밀어줘요.”
화기애애하게 회의가 끝나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여자 주인공을 맡은 정사라가 따라 나왔다.
“선배님, 감독님하고 같이 식사하고 가세요.”
“다음에 합시다.”
“말씀 놓으세요. 대선배님이신데요.”
“천천히 하죠.”
그리고…… 하며 운을 떼고 무현이 사라를 훑어 내렸다.
“선배님 앞에 내 이름 꼭 붙여요.”
호흡을 맞춰야 하는 상대 배우라 친해져야 하는데 썩 달갑지 않다. 어린 친구가 너무 되바라져 보인다고 해야 하나. 감독의 팔짱을 스스럼없이 끼고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 게 신경 거슬렸다. 아무튼 이 여자를 보는 내내 비슷한 또래여서 그랬는지 향기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리딩 때 봅시다.”
차갑게 돌아서는 무현을 따르며 정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밴에 오르자 정우가 물었다.
“좀 피곤해 보인다?”
“조금.”
“어제도 잠 못 잤어?”
무현은 저만 아는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잠을 자 본 게 언젠지 모르겠다.
본가에 다녀온 후로 향기와 침실을 같이 쓰고 있다. 무현이 쳐다보면 쭈뼛대면서도 그의 침실로 들어오는 향기였다. 그녀의 입으로 부부 생활을 하겠다고 했는데도 좀처럼 손을 뻗는 게 쉽지 않았다. 향기의 무한 믿음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셈이다.
“혹시 아직도 그 상태야?”
“아는 척 마.”
“하하하. 첫날밤도 못 치르고 쌍코피 쏟겠다. 어떻게, 지혈제라도 미리 사 줄까.”
정우는 이죽거리다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며칠 전, 새벽 촬영이 있어서 이른 아침 무현을 픽업하러 그의 집에 들렀었다. 하던 대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는데 무현의 침실에서 향기가 나오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뒤따라 나온 무현은 정우 저를 보고도 덤덤한 얼굴이었다. 이틀을 추궁한 끝에 사건의 전말을 듣고 처음으로 무현이 안됐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