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35화.
“돗자리를 깔아 줬는데 못 하는 이유가 뭐야?”
“글쎄.”
“연애한 지 너무 오래돼서 그래? 좀 도와줘? 킥킥.”
무현이 눈을 부릅떴다. 잊을 게 따로 있지! 혼자서 크기를 조절하며 열일하는 녀석을 달래는 것도 이제는 한계다.
“그러면 왜 합체를 못 하는데?”
정우의 말에 무현은 입술을 삐딱하게 만들었다. 이제라도 제대로 된 시작을 하고 싶은 마음이랄까. 정상적이지 않은 시작. 포기하듯 결혼 생활을 하겠다는 향기를 안는 게 꺼림칙했다.
향기가 마음을 열고 저를 원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쓸데없는 얘기 말고 향기 부모에 대해 좀 알아봐.”
“마음에 걸려?”
무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눈을 감은 채 시트에 등을 기댔다. 직접 말해 주길 기다렸지만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길거리에서 고생하는 것도 보기 싫고 고집을 꺾지 않으니 나설 수밖에.
“뭐가 걸리는데?”
상당한 재력가인 조부나 가정적인 아버지나 여자 집 배경을 따질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어른들 밑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란 무현도 그런 인간은 아니고.
“할아버님이 연예인이라면 경기하셔. 향기는 입을 열지 않고.”
“그래? 의외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건 알고 있었지만 밝은 성향이라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진도는 언제 나갈 거야?”
“그런 게 왜 궁금한데.”
“네가 향기 씨를 너무 어리게 보는 것 같아서. 일방적인 배려, 그거 받는 사람은 안 좋을 수도 있어. 네가 생각하는 만큼 어리지 않을 수 있고. 향기 씨도 요즘 애들이잖아.”
요즘의 무현을 보면 다른 녀석을 보는 느낌이다. 여자에게 몸 달아 하는 무현이라니. 오죽하면 친구 녀석들이 머지않아 무현이 산도 옮기는 마법을 부릴 거라고 뼈 있는 농담을 다 할까.
“날아가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잡아. 간만에 형님이 친구 찬스 써서 알려 주는 거니까.”
누가 날아가게 둔대? 무현은 속으로 말을 삼키고 비릿 입술을 틀었다.
“명동으로 가.”
“이 대낮에 명동에?”
향기가 명동에서 공연한다는 무현의 말에 정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미쳤구나? 명동 한복판에 가서 뭐 하게?”
“그냥 가. 가다가 캐주얼 매장에 들르고.”
백미러로 무현을 보곤 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단색 셔츠에 남색 슈트, 딱 떨어지는 의상에 걸맞게 머리도 이마가 보이게 깔끔하게 빗어 넘긴 상태였다. 저 모습 그대로 레드 카펫을 밟아도 손색없을 만큼 근사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저 잘난 얼굴이 숨겨질 거라고 생각하다니.
“연애 한번 요란하게 한다.”
저 인간 매니저를 때려 치든지 해야지. 요즘 들어 말수는 더 줄어들고 하는 짓은 기행에 가깝다. 언제 터지려나,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 * *
명동 예술 극장 앞 광장이 인파로 북적였다. 가뜩이나 혼잡한 곳인데 인디 뮤지션의 합동 공연이 잡혀 있어 더했다. 매장들은 문을 활짝 열었고, 관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이름이 알려진 뮤지션, 드라마 OST를 불러 유명세를 얻은 이들, 연예인을 쫓느라 정신이 없다. 곳곳에서 장비를 점검하고 공연과 흡사한 리허설을 하고. 그들 사이에 나디아와 향기도 끼어 있었다.
창원이 향기를 챙기며 미소를 지었다.
“떨리고 얼떨떨하지?”
“실수하면 어쩌죠.”
“정진이 못 와서 더 불안한 건 아니고?”
“그런 사이 아니에요.”
향기가 손까지 저으며 부정했다. 무현의 등장을 무마하느라 정진과 가까운 모습을 연출했더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정진이 공연마다 쫓아다녀서 오해가 부풀어졌다.
“긴장 풀라고 한 말이야. 너 놀리는 거 은근 재미있거든. 우리 팬들도 많이 왔으니까 힘내.”
“이렇게 인기 있는 분들인 줄 몰랐어요.”
“뭐, 우리가 한 인기 하지. 언더에서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나디아의 인기가 생각보다 굉장했다. 덕분에 향기는 큰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았다. 규제가 강화돼 인디밴드가 설 무대가 줄고 있어 더 소중한 기회였다. 향기 같은 싱어송 라이터에게는 더더욱.
언제 왔는지 인서가 무선 마이크를 향기에게 장착해 주며 말했다.
“우리는 록 밴드라 괜찮지만, 향기 네 목소리는 묻힐지도 몰라. 할 수 있겠어?”
“그래도 해 봐야죠.”
“앞에 공연하는 팀이 댄스 퍼포먼스가 있어서 좀 걱정되는데.”
“너 지금 향기 기죽이냐?”
발끈하는 창원을 보고 인서가 미간을 심하게 좁혔다.
“걱정돼서 그러지.”
야외 공연인 데다 관객이 너무 많아 소음이 심했다. 어쿠스틱 기타로 감성을 자극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한 번 공연을 망치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재수 없으면 실수 동영상이 짤로 돌아다녀서 두고두고 흑역사가 되고. 인서가 망설이다 말했다.
“향기야, 우리 노래 ‘with love’ 알지?”
“네.”
“오늘은 기타 내려놓고 그거 불러 보는 거 어때?”
향기의 눈이 커다래졌다. 모던 록 스타일의 곡이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더듬는 듯 감미롭고 감성을 부추기는 사랑스러운 노래. 창원도 눈을 크게 떴다.
“그거 너한테 의미 있는 곡이잖아. 괜찮겠어?”
“추억 끌어안고 있으면 뭐 하겠어. 향기 음색에 어울리잖아.”
“제가 불러도 돼요?”
인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돕는 거 제대로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향기의 재능이 탐났다.
“대신 나중에 이 곡 같이 앨범 내.”
“그래요. 제가 후원할게요.”
음악만 해서는 먹고 사는 게 쉽지 않다. 웬만한 열정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도와주고 있잖아.”
“돈 안 받으면서.”
피아노를 전공한 인서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다. 레슨비 명목으로 돈을 건네도 절대 받지 않았다. 향기가 돕는 거라곤 식사 정도.
얼굴이 붉게 상기된 향기를 보고 창원이 말했다.
“오늘 기획사에서 높은 분들 많이 나올 거야. 잘해 봐.”
“미안해요.”
“넌 언더 색깔 아니야. 미안할 거 없어.”
그들의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무현은 매장에 들어가 향기의 노래를 들었다. 동영상으로 보는 것과 차이가 컸다. 흰색 면 티셔츠에 짧은 노란색 주름 스커트를 입고 듀엣으로 부르는 노래가 그림처럼 그려진다. 사람들의 소음이 가득한데도. 정우가 중얼거렸다.
“완전 연예인이네. 너 어떻게 하냐?”
“…….”
예뻤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보석처럼. 인서라는 나디아 보컬과 간간히 눈을 맞춘다. 진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모습에 관객들의 시선이 사로잡힌다. 두 곡의 모던 록풍의 노래가 끝나고, 남자가 고개를 숙여 향기의 귓가에 뭐라고 속삭이자 관객이 환호했다. 향기가 의자에 앉자 남자가 기타를 가져다주었다.
소란스러웠던 관객이 숨을 죽이고, 인서가 말했다.
“꽃향깁니다. 많이 사랑해 주세요. 관객 여러분과 숲으로 소풍을 가고 싶답니다.”
향기가 일어서서 “꽃향기에요.”라고 말하자, 끝이 올라가는 억양에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곧 향기의 숲 속 이야기가 노랫말로 흘러나왔다. 소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녀의 맑은 음색이 사람들 가슴에 박혔다. 무현은 향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숲으로 달려가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 * *
“향기야, 장비는 우리가 정리할 테니까 쉬고 있어.”
“그래. 정신없을 텐데 좀 앉아 있어.”
인서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창원이 히죽 웃고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를 가리켰다. 향기는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빨리 정리하고 밥 먹으러 가야죠.”
“걷지도 못 할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마.”
“우리 공주님은 쉬십시오.”
창원이 열감기를 앓는 사람의 얼굴을 한 향기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인서의 돌발 행동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게릴라 공연도 아니고 후원을 받아서 하는 공연이었다. 실력 쟁쟁한 뮤지션들이 거의 다 참여한 공연에서 향기의 자작곡 솔로라니.
한 달 전부터 홍보를 해서 동원된 관객 규모가 일반 버스킹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공연했는데 떨지 않으면 이상한 거다.
대여해 온 장비를 점검하던 창원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시끄럽지?”
여기저기서 터지는 까악!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 시선이 그들의 방향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 뭐야?”
인서와 창원의 눈이 커다래지고 향기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저씨?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쓴 사람은 분명 무현이었다. 그리고 무현에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사람은 정우였고.
향기가 넋을 놓고 할 말을 잊은 채 눈을 깜빡이는데 무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성큼 다가와 섰다. 그리고 인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연 잘 봤습니다.”
“아, 네.”
정신을 차린 인서가 묘한 미소를 짓고 무현의 손을 잡았다. 배우의 오라가 이런 거구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무현이었다. 평범한 청바지에 야상을 입었을 뿐인데 단번에 눈에 띈다.
무현은 여전히 시선은 향기에게 둔 채 인서에게 말했다.
“팬입니다. 오늘 공연 인상 깊었어요.”
인서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팬 좋아하시네. 지인일 뿐이라던 향기의 말이 거짓말인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악수는 저와 하고 있지만 선글라스 속 무현의 시선은 향기에게 박혀 있었다.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가죠.”
무현은 인서의 손을 놓지 않고 바짝 다가서서 그만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낮췄다.
“지난번에 그러고 가서 마음에 걸렸거든.”
창원도 대충 눈치를 채고 사람들 시선이 향기에게 몰리지 않게 그녀의 옆에 바짝 섰다. 그리고 무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도 차무현 씨 팬입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차무현이 나디아 팬인가 봐, 인디밴드 음악을 좋아하나 봐, 등등. 그들은 대여해 온 장비를 챙겨 보내고 무현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