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일식집 룸으로 들어서자 이미 테이블에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무현이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죠.”
서로 통성명을 하고 인서와 창원이 무현의 앞에 앉았다. 무현은 우물쭈물하는 향기의 팔을 잡아 제 옆에 앉혔다. 그리고 입고 있는 야상을 벗어 그녀의 다리에 덮어 주었다.
“괜찮은데, 요.”
서늘한 무현의 눈빛에 향기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원래는 청바지 차림이었다. 창원이 퍼포먼스에 밀린다며 어디선가 노란 주름 스커트를 공수해 왔다.
「향기야, 이거라도 입자. 우린 귀여운 콘셉트로!」
남자들 의상은 거기서 거기지만 여자들 의상은 레깅스 아니면 하의 실종, 화려했다. 그래서 거절하지 못하고 갈아입었는데 제가 생각해도 좀 짧았다.
무현은 얌전하게 제 말을 따르는 향기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우리 향기 도와줘서 고마워요.”
“네? 아, 네.”
우리 향기? 이거 뭐지. 창원은 고개를 갸웃했다. 친화력 좋고 쾌활한 성격인데도 무현을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주눅이 든다. 무현을 면전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톱스타 차무현의 밴에 탄 것도 기절할 일인데 함께 식사라니.
창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말 놓으세요. 저희, 선배님 후뱁니다.”
“그럴까. 남자들끼리니까 형이라고 해도 좋고.”
“네? 저희야 영광이죠.”
“아까는 고마웠어.”
무현이 인서의 잔에 술을 채워 주고 말했다. 인서가 저도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를 했다.
“우리를 꽤 믿으시나 봐요?”
“향기가 나디아를 믿으니까.”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서도 무현의 눈빛이 서늘해서 인서는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우리가 소문이라도 내면 어쩌시려고요.”
“나는 상관은 없는데…….”
옆에 앉아 입도 벙긋 못 하는 향기를 바라보며 무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향기가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무현의 말에 인서와 창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향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원이 어렵게 입을 뗐다.
“혹시 그 말씀은, 두 분이 사귄다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현은 주먹을 꼭 쥔 채 저를 보고 고개를 젓는 향기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했어. 한창 신혼.”
무현의 말에 룸에 있는 모두가 얼어붙은 듯 입을 벌렸다. 톱스타 차무현이 왜 밑도 끝도 없는 커밍아웃을? 그것도 그와 아무 연관 없는 사람들에게. 아, 그건 둘째 치고 향기가 결혼했다고? 창원과 인서는 믿기지 않아 시선을 마주한 채 침을 꿀꺽 삼켰고 향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침묵을 깬 건 무현이었다.
“앞으로 우리 향기 잘 부탁해. 돕고 싶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햐, 향기야, 정말 결혼했어, 요?”
창원은 끝내 무현의 눈치를 보며 향기에게 말을 높였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네.”
“걱정 마. 이 친구들 입 무거워 보이니까.”
무현이 주먹을 꼭 쥔 향기의 손은 자연스럽게 잡았다. 향기는 흠칫하며 눈을 내리깔고 그를 째려보았다.
정우는 무현이 하는 꼴이 하도 기막혀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내시경을 받아 보진 않았지만 제 속이 새카맣게 타 있을 것 같았다. 갑자기 ‘식사할 만한 곳 좀 예약해.’ 말하기에 예약을 잡았었다. 설마 하니 인파를 뚫고 향기에게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채.
그나마 고마운 건 향기를 덥석 끌어안지 않고 이성을 지켜 준 것. 그리고 나디아의 팬인 것처럼 남자들에게 악수를 청해 준 것.
이거다 싶으면 끝을 보는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대차게 영역 표시를 할 줄은 몰랐다. 정우는 회를 입안으로 쑤셔 넣으며 향기의 다리에 덮인 무현의 점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향기는 결국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섰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소주를 꺼내고 안주도 없이 식탁에 앉았다.
쪼르르, 술을 따라 잔을 비우고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래요.”
저녁 식사 후 저를 집에 데려다주고 무현은 촬영이 있다며 다시 나갔다. 정우가 있어서 화를 내진 못했지만 무현의 행동은 정말 당혹스러웠다.
「꼭 그래야 했어요? 정말 너무해요.」
「결혼한 거 맞잖아.」
명동 한복판에 무현이 나타났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리고 인서와 창원에게 결혼했다고 말할 땐 아예 체념이 됐다.
원하는 대로 부부 생활을 하겠다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면서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다. 첫날은 그의 팔을 베고 하도 긴장이 돼 온몸이 삐걱댈 정도로 몸이 굳더니 어느새 무현의 옆에서 잠드는 게 익숙해졌다. 그럴수록 두려움도, 마음의 부채도 늘어만 가고. 모든 걸 포기하고 할아버지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빠가 우리 향기랑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하늘만큼 땅만큼. 돌아가시기 전까지 노래처럼 매일 들려주던 얘기였다. 얼마나 근사하게 생겼는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아빠 이야기를 해 주며 행복해하던 엄마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흔들지 마요, 아저씨.”
연애하자는 말 대신 잠자리를 원했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거다. 무현의 미소에 가슴 떨린 지 오래니까. 남자 경험은 없지만 새벽마다 무현의 품에서 깨어나면 그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향기는 병을 다 비우고 욕실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온 무현은 들고 온 케이크를 주방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벌써 잠든 건지 집 안이 너무 조용했다.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에 샴페인까지 준비해 왔는데. 걸음을 옮긴 무현은 향기의 방문을 열어 보려다 그의 침실을 열었다.
이불이 불뚝 솟아 있었다. 무현은 슬쩍 미소를 짓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저러니 입술이 트지. 저 습관을 어떻게 고쳐 주지. 그래도 제 방으로 가지 않고 그의 침대에 누워 있는 향기가 기특했다.
이불을 들춰 주던 무현은 옅게 맡아지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웬일로 그의 침대를 차지했나 했더니 술을 마신 것 같았다.
“은근 주당이네.”
지난번에는 와인을 한 병 다 비우더니. 전에 정우가 방문했고 뜬금없이 와인 타령을 하기에 선물 받은 걸 땄다. 한 잔이나 마셨나. 정우를 배웅하고 돌아와 보니 테이블 위가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무현은 와인 취향이 아니기에 남은 와인을 와인셀러에 보관해도 시일을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음식 하는 데 쓰려고 주방에 두는 편인데 병의 느낌이 어딘지 이상했다. 잔에 따라 보니 맹물이 나오는 게 아닌가. 다음 날 향기의 답이 너무 간단했다.
「닭은 미림을 더 좋아해요. 요리에 넣는 게 아까워서요.」
기억을 더듬으며 입술을 삐딱하게 만든 그가 향기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고 중얼거렸다.
“예쁘더라. 남들한테 보여 주기 싫을 만큼.”
향기가 쌈닭처럼 싸우자고 달려들 기세라 우선은 피해야 했다. 촬영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정우와 시간을 보내고 왔는데 순하게 잠든 모습을 보니 잘한 것 같았다. 정우가 퍼부은 욕지거리 섞인 잔소리마저 싹 잊을 만큼.
공연 후에 전화를 해서 불러낼 수도 있었고 정우를 시켜 향기를 데려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일식집에서 바로 따질 줄 알았던 향기가 용케 참아 주던 게 고마우면서도 입이 썼다. 쓸데없이 배려심 많은 성격이 그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테니까.
무현은 뽀얀 이마에 입을 맞추고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무현이 침대에 올라 향기의 머리를 들어 팔베개를 해 줄 때였다.
멈칫. 어느새 눈을 뜬 향기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깼어? 미안.”
“아저씨, 우리 그거 해 볼래요?”
“뭘?”
향기는 한숨을 포옥 내쉬고는 무현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섹스, 그거요.”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무현의 머릿속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너! 술 얼마나 마셨어?”
* * *
무현이 팔베개를 해 주려던 팔을 빼내려고 하자 향기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서늘한 그의 피부가 닿자 활활 타오르던 용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향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어서 그래요? 아니면 섹시하지 않아서?”
향기의 말에 무현은 맥이 탁 풀렸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침대를 짚은 팔에 힘줄이 툭툭 불거진다. 그의 목에 매달린 향기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제 욕망이 무거워서.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나도 알 거 다 아니까. 어리지 않다고요.”
당장에라도 꿀꺽 삼키고 싶은 눈으로 봤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지. 필사적으로 그의 목에 매달린 가녀린 팔이 안쓰럽게 떨리고 있어서 놀고 있는 팔로 향기의 등을 받쳐 주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당겨 안지 않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해서.
“적극적인 자세는 마음에 드는데. 말해 봐. 얼마나 마셨는지.”
“취, 취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얼마나 마셨는데?”
“한 병, 요.”
목소리도 또렷하고 술주정하는 것 같진 않았다. 다만 맑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있고 코끝이 붉다. 그리고 불덩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닿은 향기의 몸이 뜨거웠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바로 그에게 전이될 만큼. 방금 전에 찬물로 샤워한 게 무색할 지경이었다. 무현은 혹시나 해서 물었다.
“어디 아파?”
“아뇨.”
대답 하나는 시원스럽게 잘하지. 사람 고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라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온다.
“지금 유혹하는 거야?”
보는 사람이 힘겨울 정도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 이렇게 비장해? 네가 논개야? 나는 오랑캐 적장이고? 무현이 피식 입술을 늘리는데 향기가 말했다.
“아저씨도 말해 봐요. 왜 날 안지 않는지.”
“매를 벌지?”
하, 제대로 홀렸나 보다. 무현은 뚫어지게 향기를 응시하다 젠장, 하고 거친 말을 뱉었다. 뭐든지 작고 가냘프다. 얄밉게 쫑알대는 붉은 입술도, 동그스름한 코도, 얼굴도. 한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을 입은 것도 아니다. 그녀의 취향인 추리닝 바지에 섹시와 동떨어진 반팔 티셔츠 차림. 그런데 그 어떤 야한 슬립을 입은 것보다 그를 흔든다. 내 상태가 이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도 상체를 최대한 떼느라 자연스럽게 겹쳐진 다리가 폭발 직전이다.
“축구에서 자책골 알아?”
“네.”
“자살골은 취미가 아니라서 참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