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37화.
내리깔린 눈까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도 예쁘다. 새카맣고 풍성한 속눈썹도. 지랄맞게 욕구가 들끓는 이 순간에도 향기의 걱정이 먼저다.
“그리고 너 섹시하지 않다고 누가 그래?”
“그건, 눈 달린 사람은 다 알아요.”
어느새 입을 삐죽거린다. 남은 시험대에 올려놓고. 가지가지 한다는 생각에 그의 입술이 미소를 머금는다. 밤새 크기 조절에 여념 없는 녀석을 달래야 하는 그의 사정을 안다면 저런 말이 쏙 들어가려나. 무현이 체념하듯 말했다.
“너 물고 빨고 싶을 만큼 예뻐. 사랑스럽고.”
“갖지 못했으니까.”
“섹스하고 나면 변할 것 같아? 아니면 홀가분해지고 싶어?”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어떻게 알았지?’ 딱 그 눈빛이었다.
“드라마도 안 보는 게 어디서 삼류 극본을!”
향기가 더 많이 미안해했으면 좋겠다. 아예 발 뺄 생각도 못 할 만큼. 저를 들었다 놨다 하는 게 괘씸해 무현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침대를 짚었던 팔을 접어 향기의 등이 매트리스에 닿게 하고 몸을 반쯤 겹쳤다.
“이게 안 느껴져?”
허벅지를 누르는 묵직한 무현을 느끼며 향기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그런데 왜 안 해요?”
눈도 못 마주치면서 할 말은 다 하지. 하는 짓이 맹랑하면서도 귀여웠다. 당장 덮치고 싶을 만큼.
“그러게 왜 안 하는 걸까.”
얼린 것처럼 단단해진 녀석을 당장에라도 향기와 공유하고 싶었다.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하도록. 내가 이렇게 일차원적인 인간이었나. 그런데도 참는 건, 성인인데 어른은 아닌 향기가 본인의 마음을 제대로 알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다.
무현이 돌연 얼굴이 맞닿을 만큼 몸을 낮췄다.
“그래도 너무 억울해서 이대로는 못 물러나.”
입술만 붙였는데 향기가 흡, 하고 숨을 멈춘다. 무현은 붉은 입술을 살짝 물고 혀로 핥았다. 입술이 튼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보드라웠다.
“숨 쉬어. 인공호흡 해 줄 생각 없으니까.”
하, 숨을 쉬는 틈에 혀를 밀어 넣었다.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숨결이 달콤하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성욕을 부추기는 질척함이 아니었다. 마치 새콤달콤한 색색의 캔디가 담긴 유리병에 혀를 담근 것처럼 군침이 돌았다. 뒷목을 잡아 살짝 틀어 혀를 섞었다. 그리고 도망 다니는 말캉한 혀를 낚아채 빨았다.
서툰 신음에 욕망이 터질 것처럼 아렸다. 그가 넘겨준 타액을 삼키지 못해 맞물린 입술 주변이 범람하고, 뒷목을 들어 주자 꼴깍 소리가 나게 그의 타액을 삼키고 움찔 몸을 떤다.
딥키스도 처음인 건가.
이러다 일을 내지 싶은데 멈출 수가 없었다. 작은 살덩이를 빨아 댈수록 갈증만 일었다. 이성은 멈추라고 하는데 본능이 작은 몸을 깊숙이 누른다. 뭉클하게 눌리는 가슴. 격렬하게 덜컥대는 심장.
향기는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 눈을 감았다.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 같아 무현의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다리를 오므려도 아래로 뭔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간지러워. 내 몸이 이상해.
뜨거운 돌덩이 같은 무현의 몸이 허벅지 사이로 찾아들자 온몸이 떨렸다. 무현은 가는 허리를 스쳐 둥근 골반을 쓸어내렸다. 더는 무리였다.
그새 도톰하게 부은 입술을 쪽쪽 소리가 나게 빨고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 그녀의 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네 곁에 항상 있을 거니까. 열기가 일렁이는 눈을 엄지로 쓸어 주고 욕실로 향했다.
한참 후. 씻고 나온 무현은 향기와 침대를 같이 쓰고 처음으로 등을 돌려 누웠다. 수그러들지 않는 욕망 때문에. 어느새 그의 등에 달라붙는 향기의 체온이 느껴진다.
무현은 난생처음 남녀 생식기에 대해 생각했다. 튀어나온 게 없는 여자는 참 편하겠다고. 욕망을 감출 수 있으니까.
* * *
어둑해진 광장이 텅 비어 있었다. 호수 주변을 거니는 연인들, 보드를 타는 청소년 몇몇. 그 많던 사람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향기는 명함을 꼭 쥔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 갔네.”
초저녁에 일산 호수 공원에서 버스킹 공연이 있었다. 그들의 순서가 끝나고 음료를 사러 가는데 남자가 다가와 명함을 주었다. 그동안 기획사에서 받은 명함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원하던 곳은 아니었다.
「기회 되면 연락드릴게요.」
딱 잘라 싫다고 거절하지 말라는 인서의 조언대로 인사를 했다.
「제대로 보고 말하지. SJ 못 들어 봤어?」
멍하니 명함을 쳐다보자 남자는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의연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수천 번 말해 놓고 단지 명함 한 장 받았을 뿐인데 무작정 인파를 뚫고 달리고 말았다. 그 남자가 직접 준 명함도 아닌데. 한참을 걷다 달리길 반복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서울보다 더 낯선 도시. 멤버들은 저녁 공연이 잡혀 있어서 먼저 떠난 것 같았다. 향기는 제 머리를 쥐어박았다.
“멍청이.”
공연이 있는 것도 잊고 네가 말이야? 무작정 달리게?
집에 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휴대폰과 지갑이 든 가방은 인서의 차에 있는데. 향기는 호수를 바라보며 크게 숨을 몰아쉬고 등에 멘 기타를 내렸다.
“오리지널 버스킹을 해 보는 거지 뭐.”
아자! 엄마,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향기는 기타 케이스를 앞에 펼쳐 놓았다. 그리고 보도블록이 깔린 바닥에 양반 다리를 하고 주저앉았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희미하게 내려앉은 고즈넉한 밤에 그녀의 맑은 목소리가 봄꽃 향기와 함께 울려 퍼졌다.
무현은 주차를 하곤 무작정 호수 공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오후에 향기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주말에는 공연 때문에 통화가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리딩이 끝나고 다시 전화를 하자 통화가 됐다.
-저 창원입니다. 선배님.
일산 호수 공원에서 공연이 있었는데 길이 엇갈린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 공연 때문에 서울에 왔다며 그렇잖아도 연락 오기만 기다렸단다. 그들도 서울에 도착하고서야 향기의 가방을 발견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정우에게 설명할 새도 없이 차를 몰고 일산으로 온 거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서울 지리도 익숙하지 않아 요즘도 가끔 길을 헤매는 향기였다. 그러면서도 버스나 전철을 고집한다. 그래야 지리를 익힐 수 있다고. 초행길인 일산에서 돈도, 휴대폰도 없이 어디를 헤매는 걸까. 더구나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진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길 때였다.
“노래 정말 잘하지?”
“어. 맑더라.”
“비만 아니었으면 동영상 찍었을 텐데. 아쉽다.”
무현은 다짜고짜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차무현이다!”
“혹시 여잡니까?”
“네?”
노래 부르는 사람이 여자냐고 다시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어딥니까?”
“호수 보이는 광장이요.”
감사하다는 말을 겨우 남기고 무현은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뛰었을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무현은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 아저씨!”
다리가 저린지 코끝에 침을 바르고는 씨익 웃으며 일어난다.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향기를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아저씨.”
숨 막혀요. 몸이 조여 숨쉬기가 힘든데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차올랐다.
“나, 돈 벌었어요. 차비.”
무현은 향기를 안은 팔에 힘을 줬다.
“괜찮아? 안 놀랐어?”
향기는 무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갈 방법이 막막했는데 무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었다. 무현이 보고 싶었다. 그 남자가 대표로 있는 기획사에서 명함을 받았다고 무현에게 제일 먼저 얘기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요.”
물기 가득한 향기의 눈을 보고 무현이 입술을 내렸다.
양쪽 뺨이 무현의 손에 눌린 탓에 오리 입이 된 향기는 눈을 굴리기 바빴다. 입술이야 뜯기든 말든. ‘사람들!’이라고 웅얼거리며 야무지게 그의 가슴을 밀쳐 봤지만 소용없었다.
제발. 제발. 여긴 바깥이라고요!
무현의 품에 안긴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무현도 마찬가지. 향기는 발을 동동 굴렀다.
“웅웅, 읍!”
손짓 발짓을 해도 무현이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깊게 얽힌 혀가 얼얼하도록 빨리고 나서야 무현을 밀어내는 걸 포기했다. 그녀의 눈이 스륵 감기자 무현의 키스가 부드러워졌다.
무현은 향기의 반항이 잦아들자 촉촉,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 냈다. 그리고 얼른 카디건을 벗어 향기의 머리에 씌우고 기타를 챙긴 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뛰어.”
먼발치서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도 찍힌 것 같고.
한참을 달려 차에 오르자마자 그가 시동을 걸고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감기라도 걸릴세라 히터를 켜고 향기가 무사한 것이 확인되고 나자 무현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혼자서 겁도 없이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무슨 정신으로 이곳까지 왔는지 모른다. 향기를 찾았다는 안도감은 잠시. 철렁했던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려 무현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전화를 빌리든지, 경찰서라도 가든지. 걱정하는 사람 생각은 안 해?”
향기답지 않게 얌전하게 꾸중 듣는 게 이상해 무현이 흘깃 고개를 틀었다.
“……울어?”
향기의 손등으로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걸 본 무현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향기를 쳐다보았다.
“걱정시켜 놓고 뭘 잘했다고……. 고개 들어. 화낸 거 아니니까.”
“아저씨, 나 안아 주면 안 돼요? 아까처럼.”
“……!”
잠시 멍했던 무현은 안전벨트를 풀고 향기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팡팡 뛰는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가 눈을 감았다. 아파 보였다. 그깟 야단 좀 맞았다고 눈물 보일 성격이 아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그의 가슴팍이 젖도록 눈물을 쏟아 냈다. 무현은 향기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무서웠어?”
고개만 젓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가슴이 저릿해 미간을 좁혔다. 점점 더 저를 의지하는 향기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사랑이면 좋겠다는 생각. 하지만 감정이라는 게 강요에 의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무현이었다. 그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기다려 주려는데 너무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