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38화.
향기는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날이 풀려 푸근한데 몸살이 올 것처럼 으슬으슬 몸이 떨렸다. 무현의 말대로 전화를 빌릴 수 있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무슨 경찰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차비를 지불할 수 있고 은주에게 연락을 해도 됐다. 그건 나중에 떠오른 생각.
힘줘 쥔 탓에 꼬깃꼬깃해진 명함을 본 순간 엄마가 떠올랐다.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랑이기에 그렇게 힘든 삶을 선택했을까. 어떤 남자이기에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복합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방향 감각을 잃었고 내친김에 걷고 또 걸었던 거다.
작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광장에 도착했을 땐 텅 빈 광장이 오히려 반가웠다. 손가락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실컷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했다. 자꾸 무현이 떠올랐다. 보고 싶었다. 몰래 훔쳤던 무현의 온기가 그리웠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무현이 눈앞에 나타났다.
“미안해요.”
“왜 울었어?”
“아저씨 보니까 반가워서요.”
직감으로 향기가 처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번만 속아 줄게. 무현은 제게 기대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향기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느새 환한 얼굴을 하고 웃는다.
“꼬맹이들이 돈을 주는 거예요. 너무 귀엽고 웃겼어요.”
“내가 아니더라도 수진이도 있고 정우도 있잖아. 네가 좋아하는 나디아 녀석들도. 앞으론 꼭, 바로 연락해.”
무현의 말에 향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이상하게 아저씨 생각밖에 안 났어요.”
“…….”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나서 좋았어요.”
무현이 향기의 뺨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물기 흥건한 눈동자가 마치 반짝이는 별무리처럼 빛이 났다. 빨갛게 익은 코끝에 입을 맞추고 두 눈에 입을 맞췄다.
“류향기, 나 원조교제하는 기분이야. 아저씨 말고 이름 불러.”
향기는 무현의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배시시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의 뺨을 잡아 목을 곧추세우고 입맞춤을 했다.
“아저씨라서 좋은 거예요. 그리고 저 원조교제 들먹일 나이 아니에요.”
그녀의 돌발 행동에 무현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돼?”
스륵 힘을 잃은 듯 향기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다시 파묻혔다. 무현은 미간을 크게 좁히고 차를 움직였다.
* * *
“비슷한가.”
무현은 제 것과 향기의 이마를 번갈아 짚어 보고 중얼거렸다. 체온계로 열을 재고도 안심되지 않았던 거다. 다시 한번 체온을 잰 무현은 디지털 숫자가 36.7 고정 값을 표시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꽃향기, 자꾸 속 썩일래?”
그의 뒤에 서면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 그런 주제에 어지간히 속을 썩인다. 도망갈 기회 따윈 주고 싶지 않게 말이다.
어제 일산에서 돌아오는데 향기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응급실로 차를 돌렸고 의사는 가벼운 몸살이라고 했다. 링거를 맞고 집에 와서도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횡설수설. 생전 보이지 않던 속을 내보이며 사람 속을 홀라당 뒤집더니. 무현의 한숨이 깊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깊이 잠든 향기가 어이없어서. 늘 밝아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나도 아저씨가 정말 좋아요.」
온몸을 불덩이처럼 달구면서 무슨 사랑 고백을 이렇게 열렬히 하시나. 황송하게스리. 하지만 스멀스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잠시.
「그런데요, 아저씨 옆에 있으면 내가 초라해지는 것 같아서 싫었어요.」
그래서 어쩌라고? 평범하지 못한 자신의 가정환경, 눈에 빤히 보이는 격차가 그를 좋아할수록 크게 다가온단다. 자존감이 바닥에 깔려 감당이 안 된단다. 목숨 구해 준 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닐까, 그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고.
「제가 협박했잖아요.」
네가 나를? 협박받은 적도 없지만 그런 것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이 펄펄 끓어 정신없는 여자를 데리고 무슨 말을 할까.
「동정받는 건 정말 싫어하거든요.」
비참해지는 것보다 처음 약속대로 그를 떠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단다.
「이렇게 형편없는 난데 아저씨 욕심내도 돼요?」
뭐가 형편없는데? 반짝거리는 너 때문에 세상 무서운 거 없는 내가 바짝 엎드린 게 안 보여? 묻고 대답할 새 없이 향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무현은 손을 뻗어 향기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기분 좋게 감긴다.
“포기라……. 난 그렇게 못 하겠는데, 넌 그게 되나 보네.”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에 무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래서였나.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생활비 통장에 들어 있는 돈도 그대로, 카드도 쓰지 않는 향기였다.
무현은 손가락빗질을 해 주며 중얼거렸다.
“이 작은 머릿속 좀 열어 보고 싶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의 것도 보여 주고 싶다. 보고 나면 실망하려나. 향기를 여자로 인식하고 저급한 상상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그의 실체를 안다면 말이다. 안고 싶었다. 질펀하게 몸을 잇고 그의 것으로 향기를 흠뻑 적시고 싶었다. 이혼 같은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향기에게 최소한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들의 관계가 알려지면 차무현의 여자로 가려질 게 빤하니까.
무현은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내렸다.
“너 나한테 아까워. 내가 욕심낸 거야.”
더는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 다시는 향기가 그의 가슴이 흠뻑 젖도록 울게 만들고 싶지 않다. 누구 때문이든.
* * *
욕실에서 나오던 향기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무현을 보고 주춤했다.
“그러고 보면 욕실 참 좋아해?”
“아 아닌데.”
“난 또. 거기서 밤 새려는 줄 알았지.”
무현의 말에 향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플 거면 곱게 아플 일이지 그런 추태를. 깨어나서 멍한 건 잠시, 무현이 보이지 않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를 붙잡고 술주정을 하듯 주절주절했던 게 고스란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만? 옷도 갈아입혀 줬다. 이불 속으로 손만 넣어서였지만. 그리고 가장 핵심은 고백을 한 거다. 덥다, 춥다 밤새 그를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현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리는 게 아닌가. 번개처럼 욕실로 숨어들었고 무현의 부름을 못 들은 척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끈끈한 몸을 개운하게 씻는 것까지는 좋았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결국 백기를 들었고, 무현이 베스 가운을 넣어 주었다. 하여튼 신선하다는 무현의 어이없어하는 무현의 목소리와 함께. 향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어제 고마웠어요.”
무현은 겨우 눈을 맞춰 오는 향기를 찬찬히 살폈다. 링거 덕인지 얼굴이 평소보다 반짝반짝하다. 하긴 꼬박 하루를 푹 잤으니 당연한 건가.
“무슨 말 했는지 기억은 나?”
당연하죠. 향기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무현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향기의 뺨을 감싸 저를 보게 했다.
“사랑 고백 받은 거 어떻게 돌려줄까.”
추처럼 왔다 갔다 동글려지는 눈동자마저 귀여웠다. 무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내가 욕심낸 거야. 너 놓치고 싶지 않아서.”
“……!”
“이혼해 달라고 했던 거.”
“……?”
“말 같지 않아서 대꾸하지 않았던 거고.”
그의 침묵을 향기는 약속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짚어 알려 줄 생각이다. 제가 향기를 얼마나 원하는지도. 무현은 가볍게 향기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제 기다리는 거 안 해.”
키 차이가 상당히 나는 덕에 상당히 상체를 숙여야 했다. 긴 팔로 가는 허리를 감아 당겨 무현이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싫어?”
물어보는 것도 마지막이라고 짚어 줬다. 향기는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지난번처럼 키스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무현은 느릿하게 고개를 젓는 향기의 입술을 엄지로 쓸어 주었다. 태생 자체가 망설임을 모르는 그였다. 한 번 이거다 결정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 그런데 향기에 관해서는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키스하고 싶었어. 매일.”
무현의 입술이 붉은 향기의 입술 위에서 간지럽게 움직였다. 수채화 속 소녀처럼 발갛게 색을 더한 볼을 손으로 쓸고 혀로 빨간 입술을 뭉근히 눌렀다.
“열어 줘.”
파르르 떨리는 눈썹이 닫히고 입이 어설프게 열렸다. 무현은 혀를 넣어 향기를 맛봤다. 부드러운 입천장도 여린 점막도 너무 달았다. 콧대를 비껴 깊게 혀를 얽고 호흡을 나눴다. 질척해진 키스에 그의 몸과 벽 사이에 가둔 향기의 몸이 바르작댄다. 그럴수록 그는 점점 흥분하고. 호흡조차 어설픈 향기를 마음껏 휘젓고야 무현은 겨우 입술을 떼 냈다.
“하아, 하아.”
급하게 숨을 고르는 향기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향기의 몸을 태운 매트리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무현은 다급히 옷을 벗어 냈다. 멍하니 제게 눈을 떼지 못하는 향기를 보면서.
“내 옷 잘라 낼 때.”
그의 말에 향기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혹시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