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0화 (40/56)

# 40

40화.

향기는 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창과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간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한참 눈을 깜박이는데 방문이 열리고 무현이 들어왔다.

“깼어?”

향기는 늦잠을 제공해 준 무현에게 눈을 흘겼다.

“밥 먹자.”

고소한 냄새를 맡자 배가 고팠지만 온몸이 쑤셔서 일어나 앉기가 힘들었다.

무현은 빙글거리며 티 테이블을 침대 가까이에 끌어다 놓고 쟁반을 올렸다. 그리고 침대로 올라가 향기의 뒤에 앉았다.

“기대.”

“저 환자 아니에요. 그리고 씻어야 해요.”

“먹고 씻어도 안 죽어.”

무현은 쪽, 소리가 나게 볼에 뽀뽀를 해 주고 그녀를 바짝 당겨 안았다.

“떠먹여 줘?”

“제, 제가 먹을게요.”

정말 환자 취급을 하려는지 전복죽이었다. 향기는 등으로 퍼지는 그의 온기를 느끼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작 하룻밤을 같이 보냈을 뿐인데 무현과의 스킨십이 낯설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그러니까, 이렇게 안고 그러는 거요.”

“우리, 부부잖아. 결혼한 사람들.”

그의 말에 향기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 숟가락을 들었다. 한 입 맛보고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오물오물 죽을 삼키는 향기를 보는 무현의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밥을 꼭 챙겨 먹는 습관만 아니라면 더 재우고 싶었다. 향기를 만나고 처음 풀어진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어제 무리를 한 것도 있지만 새벽이면 기어이 일어나는 향기였다.

품에 안겨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자는 모습이 예뻤다. 그걸 보느라 거의 날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진짜 이유는 늦게 배운 도둑질이었지만.

“이번 주엔 어디서 버스킹해?”

“이젠 버스킹 안 해요.”

“음?”

“안 해도 돼요.”

오늘은 나디아를 만나러 나가 봐야 한다며 향기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소속사 들어갈 거예요.”

무현은 향기가 말하는 곳이 그의 소속사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향기가 지금처럼 그가 뒤에 버티고 있다는 것만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무현은 향기를 더 꼭 끌어안았다.

“좀 놔주세요.”

“내가 말했지. 우리 신혼이라고.”

“아저씨가 이런 사람인 줄 아무도 모를 거예요.”

“다른 사람은 알 필요 없어. 너만 알면 되니까.”

다정한 목소리였다면 소오름! 하겠지만 덤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다. 가만 생각해 보면 무현은 처음과 달라진 게 없다. 늘 같은 목소리로 저를 대했고 적당한 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이만큼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무현의 변화에 향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쿠션 역할 해 주겠다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왜.”

“그때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요. 아저씨 정말 황당했거든요.”

무현이 “뭐가?”라고 물었고 향기는 흐흥 콧소리를 내며 회상하듯 말했다. 의식이 없는 무현이 죽는 건 아닌가, 많이 걱정됐었다고.

“그런데 이 사람 살겠구나, 언제 안심했는지 알아요?”

“말해 봐.”

“건강하더라고요.”

음? 무현의 의문에 향기는 엉덩이를 그에게서 떼어 냈다.

“새벽에 이불이 들려 있었어요. 텐트처럼.”

향기가 두 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붙여 산 모양을 만들었다.

그걸 본 무현은 한참을 생각하다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쁘고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향기는 저를 끌어안고 키득거리는 무현이 불편해서 몸을 움츠렸다. 간지럽기도 하고 뒷덜미가 뜨끈하기도 해서. 아무튼 묘하게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리고 이건 엄연히 민폐예요.”

“하하하.”

“나한테 업힌 거잖아요, 누가 봐도 쿠션 역할을 해 주는 게 아니에요.”

무현은 잽싸게 그의 품을 벗어나려는 향기를 낚아채 같이 침대에 누웠다.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는 향기의 얼굴로 다가갈 때였다. 그를 밀쳐 낸 향기가 빠르게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제가 장군이를 예뻐하는데 절대 안 하는 게 있어요.”

“뭐?”

“뽀뽀요. 걘 다 예쁜데 양치를 안 하거든요.”

혀를 쏙 내밀고는 욕실로 사라지는 향기를 무현은 멍하니 바라보다 ‘나 지금 개랑 비교당한 거야?’ 하는 생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난 양치했거든! 네가 안 한 거잖아.”

무현이 크게 소리쳤다. 사랑하는 덴 10년이라는 갭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마치 쭉 찢으면 찢겨 나가는 종이처럼.

Chapter. 9

녹음실에서 녹음 중인 무현을 유심히 쳐다보는 정우에게 윤 엔지니어가 말했다.

“오늘 차 배우님, 컨디션 좋은가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답하는 정우의 목소리가 시니컬했다.

“보이스가 안정적이라 그런지 차 배우님이 녹음한 책, 인기가 많아요.”

“다행이네요. 팬레터도 꽤 와요.”

무현은 3년 전부터 시각 장애인들에게 책 읽어 주기 봉사, 목소리 기부를 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도 하는데, 물론 무료로 참여하는 일이다.

“저는 차 배우님이 이렇게 오래 할 줄 몰랐습니다. 솔직히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잠깐 얼굴 비치고 마는 연예인이 많거든요.”

“저도 이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쨌든 저 차무현 배우님 팬 됐습니다.”

멋쩍은지 윤 엔지니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정우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이 일을 하는 연예인이 꽤 된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대부분 단발성으로 끝나고. 바쁜 차무현이 3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봉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무현이 이 일에 관심을 보였을 때 말렸었다. 매주 녹음을 하고 한 번 시작한 책은 끝내야 하고. 스케줄에 변수가 많은 연예인에겐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무현은 스케줄이 겹치면 자비를 들여서라도 따로 녹음을 했다.

“녹음 끝났나 보네요.”

“수고 많았어요.”

정우는 윤 엔지니어와 악수를 나누고 생수를 준비했다.

무현이 녹음실을 나오자 정우가 의아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뭐야?”

“뭐가.”

뜬금없는 질문에 무현은 흘깃 시선을 주고는 정우가 건네는 생수병을 받았다.

“하룻밤 새 쾌청이잖아.”

요 며칠 얼마나 예민하게 굴던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오늘 녹음을 미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을 했을까. 그런데 구름 한 점 없다 못해 빛이 난다. 돌변한 무현의 사연이 궁금하다. 그에게 영향을 준 변수가 떠오르긴 하지만.

“쓸데없는 얘기 말고, 알아보라고 한 건?”

“나가자. 가면서 얘기할게.”

그들이 녹음실을 나섰다.

바 테이블에 앉아 무현의 눈치를 보던 정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혹시, 너 합방했냐? 거사 치렀구나?”

“그게 왜 궁금한데.”

“도둑놈, 도둑놈. 했네, 했어.”

“내가 왜 도둑놈이야.”

목소리는 서늘한데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무현이었다. 정우는 만감이 교차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너랑 내가 깊긴 깊은가 보다. 어쨌든 축하한다.”

“그게 축하받을 일이야.”

“오죽 유별났어야지. 그래서 선물 받은 건가.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을. 아니 꽃봉오리지.”

부럽다는 듯 지그시 무현을 바라보았다. 만으로 스물하나. 보고만 있어도 상큼 발랄. 삼촌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향기였다. 그런 향기를 사대독자의 여자로 만들다니. 무현이 친구라 등을 떠밀었지만 한편으론 도둑놈 소리가 절로 나온다.

“복도 많은 자식. 어떻게 그 산골 오지에서 영계를 다 만났을까. 그것도 재능 넘치는 꽃띠를.”

“언젠 어리지 않다며.”

“아무리 너라고 해도 향기 씨랑 같이 나가 봐라. 아저씨뻘로 보이지.”

놀리는데 재미 붙인 정우가 계속 구시렁거렸다.

“어쩐지 얼굴이 확 피었다 했다.”

무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았다.

“부추길 땐 언제고.”

“그래서 좋아 죽겠어? 어린 신부님 몸살은 안 났고? 예뻐 죽겠지? 생각만 해도 불끈거리지?”

무현이 서늘한 눈빛을 해도 정우는 한참을 이죽거렸다.

“그만하랬다.”

“부러워서 그런다. 하룻밤이 신혼이었던 친구도 못 봐주냐.”

아내 애정을 만난 걸 후회하진 않지만 원 나이트 스탠드에 쌍둥이가 생겼다. 임신해서 나타난 애정과 신혼을 즐길 새가 없었다. 지금은 설욕전을 하고 있지만.

한참 너스레를 떨던 정우가 망설이다 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뭐야.”

“향기 어머니. 어렵게 구했어.”

사진은 대충 봐도 헤어스타일만 빼면 향기와 똑 닮아 있었다.

“꽤 유명했더라고.”

혜성처럼 나타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재능만 있다면 꿈을 키우는 게 어떻게 보면 쉬워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가창력이든 댄스든 승부수가 있어야 주목을 받던 시대. 귀여운 외모와 뛰어난 가창력으로 단숨에 대중의 인기를 끌던 그녀가 반년도 안 돼서 삼각관계 스캔들로 추락했다고 한다.

“스캔들이 크게 터졌어. 상대는 지금의 SJ 천승언 대표. 그때 향기 어머니 매니저였대.”

“뭐?”

“이런저런 해명 없이 향기 어머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천 대표는 결혼하고.”

무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날 향기가 씻으러 간 사이에 화장대 서랍에서 본 명함은 분명 SJ 명함이었다.

“천승언 씨가 대표된 게 지금의 와이프 덕이거든. SJ의 사위가 된 거지.”

대충 그림이 나온다며 정우가 잔을 비우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설마 향기 씨가 천 대표 딸은 아니겠지?”

“임신설 있었어?”

“아니. 그런데 연도가 딱 맞잖아.”

“향기한텐 모르는 거로 해.”

“당연하지. 너도 당분간 내색하지 마.”

“그래야겠지.”

향기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면 모르지만 무현의 임의대로 뒷조사를 했다. 그가 먼저 알은체를 할 수 없다.

“너도 알겠지만 천 대표 평판 바닥인데 걱정된다.”

무현은 대답 없이 술잔을 비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