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3화 (43/56)

# 43

43화.

“그런데 어떻게 하냐. 내가 오디션 봐 줘도 너 여기서 가수하기 힘들어.”

“네?”

“애들한테 밉보여서 힘들다고.”

다가오지는 못하고 곳곳에서 사람들이 그들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얘 내보내고 올라와.”

같잖다는 듯 향기를 훑고 말하던 천승언이 등을 돌릴 때였다. 마스크를 쓴 여자가 빠르게 다가왔다. 천승언에게 인사를 하고 귓속말을 했다.

“그러니까 대표님 한 번만 들어 봐 주세요.”

“정아 너, 감 떨어졌구나. 자고 일어나면 뜨는 게 동영상이야. 선수가 왜 이래?”

“제가 보장해요.”

천승언은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애를 뚫어지게 응시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는 의자에 앉아 줄을 고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Havana ooh na na ay〉

라틴 리듬이 반복되고 허스키한 듯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 보고 있어? 엄마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저 남자 내가 보여 줄게. 기다려.’

향기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자 이영훈도 천승언도 말이 없었다. 정아라는 여자가 “대표님?” 부르고서야 그가 말했다.

“가요, 불러 봐.”

향기가 다시 노래를 시작하자 정아가 소곤댔다.

“대표님, 쟤는 무조건 돼요. 타고났어요. 외모도 괜찮고요.”

그렇지 않아도 눈여겨보던 동영상 주인공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영훈이 한 건 했다며 정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천승언은 말없이 향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노래를 듣는 내내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 * *

잘 익은 삼겹살을 향기의 앞에 놓아주며 창원이 말했다.

“목 혹사한 날은 돼지기름이 최고야.”

“미안하고 고마워요.”

“그건 우리가 할 말이지. 그동안 수고 많았어.”

향기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창원이 아쉬운 얼굴을 했다. 소속사에 들어가게 된 향기 때문에 갖는 술자리였다. 인서도 서운하긴 마찬가지라 불퉁한 목소리를 했다.

“그런데 왜 SJ야? 무현 선배네 기획사가 훨씬 나을 텐데.”

“그냥요.”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닌데, 거기 소문 안 좋아. 소송도 크게 걸려 있고.”

“그래도 거기 못 들어가서 안달하는 애들 많아.”

창원이 말을 거들었다. 작은 기획사에 들어가서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었다.

“알아서 하겠지만 계약할 때 무현 선배 도움 받아. 아직 도장 안 찍었지?”

“네. 피처링한 거 앨범 나오면 하려고요.”

“넌 꼭 뜰 거다. 내가 장담해.”

창원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마음 씀씀이가 예쁜 향기였다. 소속사에 들어가면 개인적으로 돕지 못한다고 밤샘 작업도 마다하지 않고 작업을 끝낸 향기였다.

“뜨고 나서 우리 모르는 척하면 안 된다?”

“절대요. 오빠들하고 공연해서 정말 좋았어요.”

진심이었다. 이들과 처음 해 본 게 너무 많았다. 처음 자유롭게 움직여 봤고 또래의 언어를 쓰며 흉허물 없이 어울려 봤다. 무엇보다 같이 음악하는 게 행복했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코끝이 찡해 향기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소주가 무척 달았다.

* * *

씻고 나오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향기는 멍하니 통창을 바라보다 베란다로 향했다. 밖으로 나 있는 베란다 창을 활짝 열자 시원한 빗소리가 여과 없이 들린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 같았다.

“잘 계시려나.”

오늘은 할아버지에게 안부 전화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벌써부터 이러면 서운해하실 텐데. 그러면서도 선뜻 전화를 걸지 못한 향기는 기타를 끌어안고 바닥에 앉았다. 몸도 마음도 자꾸만 축 처진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자신을 달래도 소용없었다. 향기는 힘없이 기타 줄을 하나씩 튕겼다.

“그 남자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자기가 선물해 준 기타도 몰라보는 남자인데. 신경질적으로 줄을 긁어내리다 다시 기타 바디를 쓰다듬는다.

“거짓말쟁이. 바보.”

아기가 생긴 걸 알고 정말 기뻐했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고.

‘넌 아빠가 없는 게 아니야. 돌아가신 거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늘 당당하라고 말해 줬었다.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엄마의 거짓말 덕분에 상처받는 일은 드물었다.

「너 나 알아?」

향기는 문득 재생되는 남자의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모르거든요! 절대 몰라요.”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보다 남자는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생긴 건, 생긴 건.

“……하나도 닮지 않았어.”

향기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리고 기타를 튕기며 음을 타기 시작했다.

불이 꺼진 거실로 들어서던 무현은 낯선 소음에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거실 벽에 닿았다. TV에서 나오는 노랜 줄 알았는데 화면이 꺼져 있었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던 무현은 입꼬리를 올렸다.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 놓고 노래를 부르는 향기가 정지된 영상처럼 그의 눈에 담긴다. 벨을 누르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현은 기척을 죽여 소파로 향했다.

연예인을 가까이서 보는 것처럼 설렌다. 아니, 정정하자. 흐뭇한 삼촌 미소가 지어진다.

“비가 고마워 보긴 처음이네.”

조금 전까지는 날씨까지 사람 피곤하게 한다고 짜증을 냈었는데.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오전부터 시작한 촬영이 저녁까지 이어졌다. 원인은 여주인공께서 신인 티를 제대로 내 줬기 때문이었다. 거듭되는 NG에 표정 관리가 안 될 지경이었다. 잘하면 내일 저녁에 다시 촬영이 잡힐 판이었다. 어떻게든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얼어 버린 여배우를 달래고 어르고, 그러던 차에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러니 짜증이 날 수밖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정우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는 길이었다.

「아차, 내가 깜빡했다. 차무현 집에 꿀단지 숨겨 놓은 거.」

비웃든지 말든지. 정우의 말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그의 머릿속엔 온통 향기 생각뿐이었다.

멜로디만 맞추는 기교 뺀 기타 연주도 좋고, 말랑말랑한 목소리도 좋다. 빗소리까지 더해져 감상에 빠져든 무현은 소파에 등을 묻고 느른한 시선을 향기에게 두었다.

‘내 취향이 저랬던가.’

인터뷰를 할 때면 빠지지 않는 질문이 이상형, 취향 얘기였다. 취향이라고 정의할 만큼 여자를 대상으로 생각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

간혹 여자에게 시선을 준 건 모든 남자들이 그렇듯 이성에 대한 조건 반사. 막연히 머릿속으로 그려 대답하곤 했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느낌?」

「키는요? 아무래도 크신 분이 낫겠죠?」

「아무래도요. 집안 여자들이 큰 편이거든요.」

「연상, 연하. 어느 쪽을 더 선호하세요?」

「연하는 좀. 비슷한 또래 정도?」

실제로도 무현은 실수로라도 어린 친구들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걸그룹에 열광하는 정우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향기라니. 단정과 거리가 멀다. 차분하지 않다. 160센티미터나 되려나. 무현은 복근이 조이도록 숨죽여 웃고 말았다.

「어디서 젖비린내도 안 가신 애를. 쯧.」

본가에 가는 날이면 어머니가 저를 붙잡고 탄식하듯 하는 말이었다.

“어려 보이긴 하네.”

가뜩이나 작은 얼굴인데 앞머리를 잘라 이마를 가리니 더욱 작아 보인다. 가끔 자연스럽게 앞머리가 커튼처럼 반으로 갈라지면 넓은 이마가 드러나는데 그것도 예쁘다. 놀란 눈을 하는 건 또 어떻고. 긴 속눈썹이 바짝 올라가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도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씻고 나와도 가지런한 눈썹이 그대로 있는 것도 예쁘다. 반 토막이 사라진 동생 이진의 눈썹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던 걸 보면 눈썹이 풍성한 여자가 좋았나 보다.

색소가 짙지 않은 갈색 머리카락은 쓸어내리면 살결처럼 부드럽다. 한 팔에 들어오는 몸을 부서져라 안던 생각만 하면. 몸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며 무현은 애써 눈을 감았다.

알아, 안다고!

한 번도 안 한 놈은 있어도 한 번만 한 놈은 없다더니 제가 그 짝이다. 불끈거리는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이 얼마나 건강한지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나저나 누구를 붙여 줄까.’

수진이나 정우를 붙여 주고 싶은데 사람들 시선이 신경 쓰이고 아무나 붙여 주자니 불안하다. 연이어 이어지는 노래에 무현의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오래된 영화 Once에 삽입된 곡 《Falling Slowly》였다.

사랑도 못 해 본 주제에 왜 저렇게 애절하게 부르는 건데? 마치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 본 사람처럼 혼을 쏙 빼놓는다.

노래 가사는 ‘천천히 빠져들어요, 천천히 스며들어요.’라고 말하는데 노래가 끝나 가자 무현은 풍덩 소리가 나게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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