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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4화 (44/56)

# 44

44화.

곧게 쏟아지던 비가 안으로 들이치자 향기는 창문을 닫으려고 일어섰다.

“놔둬. 내가 해.”

고개를 돌리자 머그잔을 든 무현이 서 있었다.

“언제 왔어요?”

무현은 놀란 눈을 한 향기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고 걸음을 옮겨 창문을 닫았다.

“기타 오래 치면 손가락 안 아파?”

“아, 이건 뭐. 습관 돼서 괜찮아요. 그것보다 혹시 듣고 있었어요?”

집에 들어온 지 한참 됐는지 무현은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향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상하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괜찮은데 무현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부끄러웠다. 그래서 몇 번이나 노래 좀 해 보라고 하는 무현의 말을 못 들은 척했었다.

“이벤트 같아서 좋았어.”

“민원 들어올까 잘 못 불렀는데…….”

빗소리가 듣기 좋아 창문을 닫지 않았다. 혹시라도 이웃에서 항의를 해 올까 봐 목소리를 죽여 불렀다.

“신경 쓰이면 방음실 만들까?”

“아니에요. 그 정도는 필요 없어요.”

무현은 향기의 손가락을 잡아 꼭꼭 눌러 주었다. 기타를 오래 쳐서 그런지 손끝에 기타 줄 흔적이 남아 단단했다.

“마사지해 줘야겠다. 내가 반주해 줄까?”

“기타 칠 줄 알아요?”

“조금.”

기타도 피아노도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 연주할 수준은 된다.

“바람 쐬러 나갈래?”

“이 밤에요?”

“답답해서 창문 연 거 아니야?”

“애들 습기 먹으라고 열어 둔 거예요. 빗소리도 듣기 좋고요.”

이젠 제법 시선을 맞춰 온다. 무현은 짓궂은 마음에 입술을 삐딱하게 만들고 향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오늘 힘들었는데 제대로 인사 좀 해 봐.”

“다녀오셨어요?”

“발전 버전으로.”

그새 맞춰 오던 눈동자를 도르르 굴린다. 내가 뭘 바랄까. 무현은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떼고 말했다.

“나가자. 배고프다.”

“지금까지 식사도 안 했어요?”

향기가 큰일이라도 난 듯 말릴 새도 없이 쪼르르 주방으로 향한다. 무현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나가자니까.”

“비 오는데 집에 있어요. 잔치 국수 해 줄게요.”

출출하기보다 향기가 생각이 많아 보여 바람을 쏘여 주고 싶었다. 무현은 굵어진 빗줄기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향기는 얼려 놓았던 육수를 냄비에 담고 다른 냄비에 국수 삶을 물을 올렸다. 연선이 무현이 잔치 국수를 좋아한다고 멸치 육수는 늘 준비해 두라고 알려 주었다.

“이 시간까지 식사도 안 하고 뭐 했어요?”

“먹었는데 출출해서. 아까 부른 노래 영화 OST인 거 알지? 혹시 봤어?”

“아니요.”

“그럼 같이 볼래?”

“내용은 알아요.”

향기는 그런 영화는 취향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무현은 그녀의 거절에 머쓱해져 애먼 국수만 휘저었다.

“가만 보면 너 나한테만 인색한 거 알아?”

“제가요?”

“그래. 어른들 말에는 무조건 좋다고 하잖아. 왜 그러는 건데?”

“아하, 그건. 자다가도 떡 얻어먹으려고?”

무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하자 향기가 헤헤, 웃는다. 저럴 때 보면 영락없는 개구쟁이 모습이다.

“서운했어요? 별거 아닌데.”

“말해 봐.”

“어른들은 나쁜 거 안 시키잖아요. 잘되라고 하시는 말인데 어떻게 싫다고 해요.”

“나는? 나는 나쁜 거 시켰어?”

“저는 어른들에게 면역이 없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의외의 대답에 무현은 멈칫했다. 고집 세고 주관 뚜렷한 향기가 성철에게 말랑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이상했는데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거다.

무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가족도 중요하지만 자신도 중요한 거야.”

“알아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딸을 앞세운 분들이다. 저만 바라보는 분들을 웃게 해 드리고 싶었다. 무현은 싱크대 서랍을 열어 그릇을 꺼냈다.

“본가에 가서도 나한테 하듯이 똑같이 해. 무조건 ‘네’ 하지 말고.”

“왜요?”

“나중에 힘들어져. 나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들고.”

성철에게 하듯 본가 가족들에게 똑같이 하는 향기였다. 나쁜 건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향기가 버거워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연선의 욕심이 커지고 있었다. 옆에 서 계신 예스 걸 향기 때문에. 잘하면 합가하자는 말이 나오게 생겼다.

“생각해 볼게요.”

찬물에 국수를 헹궈 그릇에 담고 육수를 부었다. 계란 고명을 얹어 식탁 위에 올려놓자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향기는 급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는 무현을 보고 속으로 말했다.

‘저 오늘 그 남자 봤어요.’

아까까지 마음이 무거웠는데 아저씨가 와서 거짓말처럼 괜찮아졌어요. 향기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 무현에게만 싫다, 좋다, 제 뜻을 내보이는 걸까. 생전 해 보지 못한 투정을 부리듯 말이다.

Chapter. 10

“뭐라고 했어?”

무현은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놓았다. 향기의 시선이 서재 바닥에 달라붙을 것 같았다.

“내가 싫어졌냐고…….”

보들보들한 베스 가운이 그녀의 손에서 수없이 구겨진다.

무현은 눈치 없는 향기가 야속했다. SJ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향기는 나디아와 음원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도 했지만 마음도 지쳐 있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 향기는 무현 앞에서는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그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 주고 팔을 빌려주는 정도.

오늘도 야식 핑계를 대서 향기와 같이 보낼 시간을 만든 그였다. 그리고 일부러 서재를 찾았다. 대본 검토를 한다는 없는 이유를 찾아서. 그런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무현이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이리 와.”

다가오는 향기를 안아 그의 무릎에 앉혔다. 하얀 샤워 가운을 가르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자 하얀 손이 다급히 여민다.

“많이 바빠서 그래요?”

“아니.”

“그럼, 싫어서…….”

부부 관계를 한 지 한참 됐다. 처음엔 힘들 정도로 저를 원하던 무현이 피하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해진 향기였다.

“어떻게 싫어? 일하다가도 네 생각뿐인데.”

“그럼 왜.”

“너 피곤해했잖아. 생리도 겹치고.”

생리통에 대해 전혀 모르던 그였다. 그 기간의 향기는 유난히 창백해진다. 옆에 가기라도 하면 질색하고.

“끄, 끝났는데.”

“지난주에…….”라고 말을 잇는 향기를 보고 무현이 미소를 지었다.

“신랑이 그리운 거야, 쓸데없는 코치를 받은 거야.”

향기의 친구 은주를 만나 보니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거침없는 성격이랄까. 향기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둘 다요.”

무현은 이대로 안고 싶다는 욕구에 베스 가운을 헤쳤다. 인사처럼 하는 키스도 자제하는 중이었다. 뒷감당이 안 될 게 뻔해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입술을 삼켰다. 향기가 묻는 듯했다.

여기서?

음. 여기서, 지금 당장.

그들의 숨결이 바로 뜨거워졌다. 향기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무현은 저를 보게 향기를 고쳐 안았다. 입술은 여전히 포갠 채로.

굴곡진 허리를 쓰다듬으며 손을 내렸다. 손바닥만 한 속옷이 그녀의 다리를 빠져 나간다. 무현이 그녀의 어깨에 그의 얼굴을 비볐다. 부드러운 살결이 그의 콧대를, 입술을, 뺨을 누른다.

“좋다. 꽃향기 것은 다 좋아. 예쁘고.”

무현 역시 옷을 벗고 나신이 되었다.

열흘이 지옥 같았다. 몇 년 동안 어떻게 참고 살았는지 자신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생리하는 동안엔 다른 방을 쓰겠다고 해서 사람을 기절시킨 향기였다. 그러면서도 키스는 왜 안 해 주냐고 불퉁한 목소리를 냈었다. 저도 모르게 덮칠까 봐 그런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아직도 부끄러워?”

“아 아니요!”

죽어도 부끄럽다는 말은 안 한다. 온몸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져 놓고.

무현은 크림처럼 보드라운 몸을 쓸어내리며 붉은 입술을 열고 혀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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