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5화 (45/56)

# 45

45화.

“이제 괜찮지?”

향기의 눈동자가 잠시 기대감에 흔들렸다. 무현은 천천히 향기와 몸을 겹쳤다.

“하아……!”

온몸에 솜털이 바짝 설만큼 짜릿했다. 무현은 몸을 떠는 향기를 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열흘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간 것 같다.

“흐흑.”

무현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통증에 신음이 절로 나왔다.

무현은 송골송골 땀이 맺힌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이대로 있을까?”

“그래야 해요?”

“아니. 달리고 싶어서. 네가 너무 좋으니까.”

하루하루 무현이 달라지고 있다. 야하고 이상하게. 그런데 싫지 않다.

향기는 용기를 내 엉덩이를 들썩였고 무현은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몸이 움직여진다.

“하, 향기야.”

눈을 감은 무현의 눈 주위가 불그스름했다.

강한 무현의 힘에 신음이 크게 터졌지만 통증마저 짜릿했다.

무현은 향기의 몸을 제 몸처럼 자유롭게 휘둘렀다.

“아, 그 그만……….”

“후우, 조그만 더.”

멈출 수 있을 리가. 저를 원하는 향기를 밤새도록 여자로 거듭나게 해 줄 생각이다.

향기의 신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하읏!”

무현은 본능적으로 속도를 맞춰 향기와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몸을 굳혔던 무현은 향기에게 손님이 다녀간 날을 헤아리고 비로소 안도했다. 피임을 챙길 정신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하데.

그는 여전히 흉흉했다.

* * *

연선은 제 옆에서 얌전하게 전을 붙이는 향기를 유심히 살폈다. 무현이 빈말을 한 건 아니었나 보다.

「아프니까 방에서 쉬게 해 주세요.」

정말 몸살이라도 났는지 오늘따라 얼굴도 핼쑥하고 움직이는 게 불편해 보였다.

“올라가서 쉬라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꾀가 없어서 어떻게 하니?”

배시시 웃는 향기를 보고 연선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며느리 자리에 대한 욕심도 컸다. 그러니 향기가 눈에 찰 리가 있나. 하지만 눈앞에서 바지런 떠는 향기를 보고 있자니 안쓰럽다. 이진이보다도 훨씬 어린데 잘해 보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그런데 또 무현을 생각하면 괘씸하고.

갱년기도 지났는데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연선의 목소리가 불퉁했다.

“내일 제사라고 무현이가 말해 줬니?”

“아뇨. 알람 맞춰 놨어요.”

“알람?”

“휴대폰에요. 어머니도 사용해 보실래요? 되게 편해요.”

“됐다. 별게 다 있네.”

제사 준비야 늘 하던 거다. 일하는 아주머니도 둘이나 있고 향기의 손까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르쳐야 하지 않나 고민은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린 게 뭘 할까 싶어 올해는 그냥 넘어가자는 생각으로 일부러 연락을 넣지 않았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무현을 앞세우고 향기가 들이닥쳤다.

정말 의외였다. 무현은 바로 정우가 와서 촬영이 있다고 나가고 향기 혼자 종일 제 옆에 붙어 있는 거다. 연선은 쟁반 가득히 전을 부쳐 놓은 걸 보고 아주머니를 불렀다.

“베란다에 내다 놓고 보자기 씌어 둬요.”

“아휴, 얌전하게도 부쳤네요. 새댁이 손끝이 야물어요.”

연선이 보기에도 그랬다. 그새 다른 일거리를 찾는 향기를 보고 연선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 안 올라갈 거니?”

“이거 어머니 혼자 못 하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아주머니들 계시잖아. 정 그러면 커피나 타 오던지.”

시골에서 자라 그런지 요즘 애들같이 약지 못한 향기였다. 이곳에서 지내는 이틀 동안에도 꼭 아침은 제 손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향기가 그럴수록 시어머니 노릇을 하는 것 같아 연선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언제 오세요?”

“내일 새벽 비행기로 오셔.”

“저희가 마중 나갈까요?”

“뭐 하러, 비서 있는데.”

제사를 코앞에 두고 일본 온천 여행을 가신다고 해서 연선도 놀랐다. 정말로 제사를 줄이시려는 건지 아버님의 속을 모르겠다. 어느새 커피를 준비해 연선의 앞에 놓아 주는 향기였다.

“무현이가 잘해 주니.”

“네.”

“혹시 너희들 피임하는 건 아니지?”

화들짝 놀라는 향기를 보고 연선은 아차 싶었다. 무현이 아이 얘기는 절대 꺼내지 말라고 했던 게 떠올라서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무현이 나이가 있으니까. 그게……, 아니다.”

연선은 향기의 몸을 쓱 훑어 내리고 체념하듯 말을 끊었다. 애한테 애를 낳으라는 것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 얘기를 꺼냈더니 펄쩍 뛰던 무현이 이해되면서도 괘씸했다. 무현이 눈에 띄게 변했다. 의심이 싹 가실 만큼.

아침만 해도 하도 기가 막혀서 뒤로 넘어갈 뻔했다. 향기를 쉬게 해 주라고 당부하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직접 ‘방에서 누워만 있어.’ 대놓고 말하는 게 아닌가. 무뚝뚝한 아들의 변화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울화가 치밀었다.

향기는 휴대폰 메모장에 준비된 음식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연선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저 그게…….”

한참 뜸을 들이더니 향기가 말을 이었다.

“아기를 몇 명이나 낳아야 해요?”

“뭐?”

“아들 낳을 때까지 낳아야 해요?”

어머, 얘 좀 봐. 어떻게 그런 얘기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물어보나 모르겠다. 더구나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눈빛이다. 가식이 전혀 없는 눈빛. 저래서 무현이 달라졌나.

“당연한 거 아니니? 사대독잔데.”

“계속 계속요?”

“그래. 줄줄이.”

입술을 꼭꼭 깨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연선은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말을 이었다가는 얼굴이 터지게 생겼다.

“그게 마음대로 되는 줄 아니? 지금이 옛날도 아니고. 주시면 낳는 거지.”

“그러면요, 어머니.”

“……?”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요것 봐라. 은근 할 말 다 하는 맹랑한 구석이 있는 향기였다. 연선은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는 향기가 귀여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기다려 주면?”

“노, 노력해 볼게요.”

어머, 얘를 어쩌면 좋을까. 연선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내가 강요한 거 아니다? 네가 알아서 노력한다고 한 거다?”

“네, 맞아요. 제가 먼저 말한 거예요.”

“이젠 올라가 쉬어. 몸이 건강해야 노력도 하지? 약 올려 보낼 테니까 먹고 한숨 자.”

“진짜 괜찮은데, 그럼 일은 안 하고 어머님 옆에서 놀고 있을 게요.”

“그러던지.”

향기는 연선의 걱정이 고마우면서도 민망했다. 실은 걷는 것도 불편하고 몸이 너무 무거웠다. 제사 하루 전날에 알람을 맞춰 놓고 깜빡했었다. 아침에 울리는 알람 소리에 메모를 확인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미리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어제 어떻게든 무리하지 않았을 텐데.

‘정말 나쁜 아저씨야.’

향기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려 한숨을 내쉬었다.

* * *

“잘 놀고 있었어?”

“……네.”

“누워 봐.”

“또 누우라고요?”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놀라?”

흠칫 놀라는 향기를 보는 무현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향기는 저를 놀리는 무현이 얄미워 눈을 흘겼다. 무현은 티 테이블 앞에 앉은 향기를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에 올려놓았다.

“난 안 올라가니까 걱정 마.”

작은 몸을 꾹꾹 눌러 주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수절하고 살아온 한을 원 없이 풀고 있다. 덕분에 향기는 죽어나고. 끌어안고 있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안을 찾아들게 된다.

“데이트 가자.”

“어디로요?”

“영화 보러. 식사도 하고.”

향기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차 안에서 하는 데이트가 고작이면서. 무현과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영화관이라니 말이 안 된다.

“내일이 제사잖아요. 집에 있을래요.”

“오후에 지내잖아. 오늘 일 많이 했다며.”

“싫어요. 정우 아저씨만 힘들잖아요.”

무현은 향기의 눈치를 살피다 말했다.

“결혼 발표하면 편하게 다닐 수 있는데.”

“기다려 주기로 했잖아요.”

“기다리고 있으니까 나가자.”

무현은 억지로 향기를 일으켰다.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 번을 못 해 본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운 것도. 오죽했으면 연선이 데리고 나갔다 오라는 말을 다 했을까. 보고 있지 않았어도 향기가 하루 종일 얼마나 종종거렸을지 상상이 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