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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47화 (47/56)

# 47

47화.

“소속사는 옮길 생각 없습니다.”

아나운서라고 해도 손색없을 만큼 정확한 의사 전달이었다. 천승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습니다. 헛소문이겠지만.”

천승언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무현을 간보듯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지요?”

연예인이 되고 스캔들 한 번 없던 차무현이었다. 그런데 찌라시에 버스킹을 하는 향기와 나란히 이름이 올라왔다. 그걸 보고 실장이 부리나케 그에게 달려왔다. 믿기지 않았지만 손해 볼 건 없었다. 사실무근이라는 기사만 나가도 SJ 소속이 된 향기에겐 날개를 다는 일이니까. 그런데 공교롭게 식사를 하자는 무현의 연락을 받은 거다. 무현은 천승언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맞습니다.”

“뭐, 뭐라고요?”

“연애하고 있습니다.”

“하!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

겨우 가수 지망생이다. 그것도 평범하게 보일 정도로 수수한 애였다. 반면에 차무현은 시쳇말로 스펙 종결자. 학력, 집안,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친구다. 순수한 맛에 끌린 건가. 아니면 아청법을 들먹일 만큼 앳되게 생겼던데 대놓고 스폰서? 천승언은 다시 확인해야 했다.

“이 자리, 류향기 때문에 만든 자리, 맞습니까?”

“네.”

“뭐, 취향이니까. 허허허.”

천승언이 크게 웃으며 무현에게 완전한 하대를 하기 시작했다. 가수 지망생 주제에 이렇게 든든한 뒤가 있어서 그렇게 당당했던 건가. 하마터면 대어를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천승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 배우가 스폰서 해 주면 그런 애들이야 횡재한 거지.”

“그런 관계 아니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음?”

“스폰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현은 잠시 표정 관리를 하려고 물 잔을 들었다. 향기가 저런 인간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게 짜증이 났다.

“제 도움받는 걸 원하지 않아서 SJ에 잠시! 맡긴 겁니다.”

무현은 ‘잠시’를 강조했지만 천승언은 야비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하긴 여자가 튕기는 맛이 있어야지. 어쨌든 잘되면 우린 좋지. 그래서 날 만나자고 한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걱정돼서요.”

천승언이 무슨 이야기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무현을 쳐다보았다. 무현이 그런 천승언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채서린 기억하십니까.”

“?!”

“그 외에도.”

무현의 입에서 여자들 이름이 줄줄이 거론되자 천승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무현은 잠시 말을 끊었다 미소를 지었다.

“힘없어서 고소하고도 대표님 대신 뭇매 맞은 여자들입니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

“대표님 운은 거기까지라고 알려 드리는 겁니다. 저는 남는 게 힘이라서.”

물 잔을 들어 올리는 천승언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냉기가 도는 무현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입꼬리에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건데?”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하. 너희들 세트로 뭐 하자는 거야? 아니, 그렇게 애지중지하면서 우리 회사에 집어넣은 속셈이 뭐야?”

“그 친구가 SJ, 무척 괜찮은 회사로 알고 있거든요.”

무현은 향기가 천 대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을 덧붙였다. 천승언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하!”

“저는 끝까지 그 친구가 그렇게 알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더러 띄워 주고, 밀어 주라고?”

“아까 말했다시피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돈은 벌어 드리죠. 원하는 만큼.”

그냥 기다리면서 지켜보기만 하면. 뒷말을 잇는 무현의 목소리가 음산하다 싶게 낮아졌다.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무현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펜을 들어 천승언의 앞에 놓았다.

“이게 뭐지?”

“서류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이 자리 대화 녹음한 겁니다.”

천승언이 이를 악물었다.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왜 차무현이 제게 이러는지.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 없길 바랍니다.”

말을 끝낸 무현이 제 앞에 있는 똑같이 생긴 펜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일어서서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식사는 제가 대접하는 겁니다. 편히 드시고 가세요. 저는 바빠서 이만.”

믿기지 않는 얼굴을 하는 천승언을 뒤로하고 무현은 룸을 빠져 나왔다.

Chapter. 11

언덕길을 뛰어 내려가는 향기를 정우가 겨우 붙잡았다.

“향기 씨, 잠시만.”

“놔주세요.”

8월 중순 막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씨였다. 아스팔트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게 육안으로 보일만큼 뜨거운. 정우는 곧 쓰러질 듯 창백한 얼굴을 한 향기가 걱정돼 미간을 좁혔다.

“무현이 걱정은 안 합니까?”

무현의 얘기에 주춤하는 향기를 정우는 일단 눈에 띄는 커피숍으로 이끌었다.

정우가 주문을 하러 간 사이 향기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자신이 바보 같아서 미칠 것 같았다. 이제 겨우 다른 가수의 피처링을 해 주는 신인. 그것도 정아의 주선으로 얻은 기회였다. 그런 제게 광고가 들어왔다는 말을 믿었다니. 오늘 촬영장인 카페에 들어섰을 때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곳에 무현과 정우가 있었다.

정우는 향기의 앞에 음료를 놓아 주었다.

“마셔요.”

“아저씨가 만든 일 맞죠?”

“맞아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저를 도우려는 무현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부끄러웠다. 알아서 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현실은 무현의 말대로 만만하지 않았다.

계약 이후 두 달이 넘도록 SJ는 그녀를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보컬 트레이닝 선생인 정아가 유일한 아군이었다.

「너 대표님한테 밉보였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왜……. 아니다. 일단 연습해. 너 실력 되니까 기회는 꼭 다시 올 거야.」

점점 지쳐 가고 있었다. 연습하는 게 힘들어서가 아니라 천승언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게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그런데 알은체도 안 하던 그가 부모님께 인사를 가 주겠다고 말한 것도 실장이 갑자기 친절하게 군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톱스타 차무현과의 광고.

“일단 광고 찍읍시다.”

“전 광고 같은 거 찍을 생각 없어요.”

“무현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어요?”

“도와주려는 건 알지만 이건 정말 아니에요.”

고집이 묻어나는 향기의 목소리에 정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현이 왜 미리 향기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두 사람 부부잖아요. 어떤 남자가 자기 여자 고생하는 거 좋아하겠어요? 무현이 향기 씨 마음고생 할까 봐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요?”

향기는 마음고생이라는 말에 정우를 빤히 응시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이 광고 성사시키는 거 무현이도 힘들었어요.”

당대 최고 톱스타만이 기용되는 커피 광고. 무현이 5년째 전속 모델을 하고 있었다. 재계약 기간이 다가왔고 무현은 승부수를 던졌다.

「열애설 흘려.」

답답하리만큼 잠잠하기만 하던 무현이 독촉했다. 정우는 별수 없이 전속 모델의 동향을 꿰고 있는 광고주를 만났고 아니나 다를까 광고주는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찌라시 돌던데 혹시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당연한 우려였다. 정우는 시나리오대로 이야기를 풀었다.

「나이도 있는데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게 아니겠습니까.」

열애설을 인정하자 광고주는 놀라는 눈치였다.

「분위기를 바꿔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준비해 간 콘티를 내밀었다. 무현과 향기가 연인으로 등장하고, 그녀가 자작곡을 한 CM송을 직접 부르는 콘티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면 광고 효과가 클 거라고 언질을 주자 광고주는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 향기의 목소리도 역시 크게 작용했다.

정우의 말을 듣던 향기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제가 부탁한 거 아니잖아요.”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줄 알아요? 향기 씨 동영상 반응 좋았지만 당장 달라지는 거 없잖아요.”

정우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면서 각자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였다. 향기를 보호하려는 무현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떳떳하고 싶은 향기도. 그리고 변수, 미련한 천승언까지.

향기의 눈동자가 안타깝게 흔들렸다.

“전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니에요.”

“다 알면서 마음 졸이는 무현이 생각은 해 봤어요?”

“무슨 소리에요?”

정우는 진도를 너무 나갔다는 생각에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솔직히 말할게요. 무현이 알고 있어요. 향기 씨 어머님 가수했었다는 거.”

“어, 언제부터요?”

“오래됐어요.”

향기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없는 이만 못한 생물학적 아버지. 어차피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기에 무현에게 숨기고 싶었다.

“천 대표 소문 안 좋은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향기 씨가 회복하지 못할 마음에 상처 입을까 봐 힘들어했어요.”

향기는 멍한 채 정우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 * *

촬영 준비를 끝내고 나온 향기는 감독과 인사를 나누고 콘티 설명을 들었다. 미리 보내 준 음원이 마음에 들었다는 감독의 칭찬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태프들의 시선만으로도 버거운 그녀였다.

“차 배우와는 안면이 있나?”

“네. 그래도 둘이 한번 맞춰 보겠습니다.”

어느새 무현이 다가와 이야기를 하자 감독이 잠깐의 휴식을 외쳤다. 무현은 말없이 향기를 창가로 이끌었다.

“괜찮아?”

자존감 강한 향기의 마음이 상처받았을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향기는 언더에서 노래 부르던 때가 더 좋았대요.」

은주는 향기가 안타깝다며 그에게 털어놓았다. 엄마가 두 번 버림받는 건 죽어도 못 보겠다고 사서 고생하는 향기가 안쓰럽다고. 은주의 걱정도 한몫했지만 힘들어하는 것을 더는 방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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