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48화.
향기를 SJ에 남겨 뒀던 건 천승언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다. 자신의 딸을 알아볼 기회. 향기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기를 바라서였다. 그래서 두 달 남짓 힘들어하는 향기를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천승언은 끝내 향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무현은 기타가 향기인 양 힘줘 잡았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예쁘게 웃어 봐, 응? 보고 싶다.”
그의 말에 따르듯 향기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자 무현은 안심이 됐다.
“우리 같이 하던 대로, 집에서 연습했던 것처럼 하면 돼.”
신뢰를 담은 무현의 눈빛이 따뜻했다.
무현의 계획을 몰랐던 향기는 집에서 작곡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무현은 그녀의 옆에서 흥얼거렸었고. 향기는 촬영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의식돼 고맙다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키스하고 싶다. 사랑해.”
향기는 나도요, 라고 속으로 속삭였다. 알게 모르게 항상 무현이 뒤에 있었다. 언제든 기대라고 등을 내줬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무현 때문에 가슴이 채워지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굴었다.
고마워요.
“향기 씨, 메이크업 수정 좀 할게요.”
수진은 의자를 끌어다 향기를 앉혔다. 두 사람 눈에서 꿀이 뚝뚝 흐른다며 정우가 어떻게 좀 해 보라고 해서 끼어든 그녀였다. 수진이 목소리를 죽였다.
“나 두 사람 소식 듣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어쩜 그렇게 깜쪽같이 속일 수 있어?”
수진이 눈을 흘기며 향기의 팬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광고는 물 흐르듯 편안하게 진행됐다. 빈티지풍의 창턱에 앉아 기타를 연주하는 향기에게 무현이 김이 오르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건네주는 모습이었다.
촬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우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예 대놓고 광고를 하네.”
광고가 나가면 스캔들이 나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에 입술이 삐딱해진다. 촬영을 돕는 스태프들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고 수군거렸다. 그게 무현의 시나리오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향기를 알리고 연인 관계를 알릴 계기를 만드는.
수진이 한숨을 쉬듯 말했다.
“무현 오빠가 저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향기를 바라보는 무현의 눈빛이 어떻게 해 주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오랫동안 무현의 일을 해 왔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카메라 감독은 콘티에 없는 행동을 하는 무현을 보고도 컷을 외치지 않았다.
무현을 올려다보는 향기의 이마에 가볍게 이마를 맞대고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어떤 진한 스킨십보다도 보는 이를 더 설레게 만든다. 그만 느낀 건 아니었는지 작은 웅성거림이 여기저기서 새어 나왔다.
* * *
도시를 녹일 것 같던 더위가 밤에는 수그러들고 바람도 간간이 분다. 낮과 다른 여유로움에 낮은 경사로를 오르는 걸음이 느긋해진다.
이런 곳도 있었네.
골목골목 높지 않은 건물과 예쁜 색을 입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열린 창으로는 사람들 웃는 소리도 새어 나오고.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녹지를 낀 한적한 산책로가 왠지 숨통을 틔워 주는 것 같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무현을 오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자 향기는 거리를 두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랐다.
광고 촬영이 끝나고 정우와 수진의 도움으로 무현과 따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데이트할까?」
다른 때 같으면 사람들 시선이 걱정돼 도리질을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드로메다쯤 가 버린 정신을 챙길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무슨 정신으로 카메라 앞에 섰는지 모른다. 무현은 이 일을 어떻게 매일 하는지 모르겠다. 낯선 사람들의 시선에 로봇처럼 굳은 제게 무현이 속삭였다.
「아무 생각 말고 나만 봐.」
무현과 눈을 마주하자 정말 신기하게 마음이 안정됐다. 목소리를 내는 내내 무현에게만 불러 주는 노래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지막에는 이마를 콩 부딪쳐 오는 바람에 NG를 낼 뻔했는데 무사히 넘어갔다.
생각에 잠긴 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데 무현이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잡을래?”
다른 때 같으면 그녀의 생각은 묻지 않던 무현이라 향기는 잠깐 눈을 깜빡였다.
무현은 피식 입술을 늘리고 내민 손을 거둬들였다. 향기는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어 입을 삐죽였다.
“화났어요?”
“아니.”
“그럼 왜 손을…….”
“잡지 않은 건 너잖아. 그래서 거둬들였는데 왜.”
잡을 새도 없이 가져가 놓고! 향기는 속으로 발끈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러면서도 조금 더 바짝 그에게 다가갔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무현이 여전히 앞서 걸으며 말했다.
“사람들 눈이 그렇게 무서워?”
“무섭다기보다 불편해요.”
“내가 괜찮다는데도?”
“사람들이 아저씨 알아보잖아요.”
“잘 생각해 봐. 뭐가 더 우선인지.”
무현이 고개를 틀어 향기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택하는 순간이 오면 향기는 작은 일에도 저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한다. 에고이즘 성향을 띠는 저와 다르게 그녀는 어린데도 불구하고 애타주의(愛他主義) 성향이 강했다.
그런 향기가 처음에는 의아했다. 그러다 신경이 쓰이고. 그래서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갔다.
무현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내 손은 언제든 네가 잡을 수 있어. 네가 잡고 싶을 때.”
“알아요.”
“지금처럼 항상 내밀고 있었는데. 못 본 거야, 아니면 못 본 척한 거야?”
내밀고 있지 않아도 언제나 너만 잡을 수 있는 손이라고 말하고 무현이 다시 등을 보인다.
향기는 걷는 것에 맞춰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무현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 간격이 벌어진 무현을 따라잡아 냉큼 그의 손을 잡았다. 멈칫하던 무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왜 잡았어?”
“사라질까 봐요.”
“절대 그럴 일은 없어. 잡으니까 어때?”
“좋아요.”
무현은 향기의 손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업어 줄까? 원하면 달려 줄 수도 있어. 어떻게 해 줄까?”
“미안해요.”
“뭐가.”
“감추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도움받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혼자 속 태우는 동안 내 속이 얼마나 새카맣게 탔는지 아느냐고 무현이 묻자 향기의 눈에 물기가 맺힌다. 얼굴은 맹랑하게 웃고 있고. 무현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널 이해는 하면서도 화가 났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 엄마가 사랑한 사람, 나에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나한테 중요한 건 네 마음이 다치지 않는 거야.”
무현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니까.”라고 말하곤 향기를 빤히 응시했다.
향기가 아무리 부정해도 핏줄이다. 천승언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틀렸다. SJ에 들어가고부터 한숨도 늘고 멍할 때가 많아진 향기였다.
“엄마가 사랑했어요. 많이 그리워했고 보고 싶어 했고요.”
“속상했겠네.”
“그렇게 그리워한 사람, 한 번은 만나게 해 주고 싶었어요.”
진실을 알게 되고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을 해 보지 않았기에 더더욱.
무현이 향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그러셨을까.”
“……?”
“너한테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으셨을 거야. 어머니 생각대로 넌 예쁘게 잘 커 줬고.”
잔뜩 힘이 들어간 작은 어깨가 축 늘어지자 무현이 가만히 포옹했다. 작은 어깨에 짊어진 짐을 빨리 내려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이렇게 나한테 와 줘서 고마워.”
“난 훨씬 더 고마운데.”
“하고 싶은 일 빨리 끝내자. 우리 결혼도 알리고. 자신이 가장 소중한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고개를 끄덕이는 향기를 보고 무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현은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으니까. 그런데 향기를 만나고 가치관이 흔들린다. 자신보다 향기가 중요해졌다.
“이젠 너만 생각해. 넌 그래도 돼.”
“내가 밉지 않아요?”
“왜?”
“아저씨한테만 이기적이잖아요.”
“왜 그러는 것 같아?”
“받아 주니까요.”
무현에겐 투정도 부려 보고 화도 내 봤다. 아마도 싫다는 말을 해 본 것도 무현이 처음이지 싶다.
“그게 끝?”
“사랑해요. 아저씨가 좋아요.”
이러니 예쁠 수밖에 없다. 한순간에 그를 무장 해제시키는 향기가 사랑스러워 몸이 뜨거워진다. 그런 무현의 사정은 모르는 채 향기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 남산 타워 보여요?”
우뚝 솟은 남산 타워가 보이고 서울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무현의 목소리에 허탈한 웃음기가 섞여 나왔다.
“그래. 보인다.”
“서울 야경이 너무 예뻐요!”
“그래. 예쁘겠지.”
무현은 향기를 뒤에서 안아 주며 그녀가 손짓하는 곳을 같이 바라봐 주었다.
과연 향기의 어머니는 천 대표를 사랑했을까. 고개가 저어진다. 이렇게 예쁜 딸에게 상처를 줄여 주려고 그랬던 건 아닌지. 무현은 그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종알거리는 향기를 오래도록 안아 주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가족이 모두 거실에 모였다. 과일을 깎아 내온 향기가 무현을 바라보았다. 무현은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저 드릴 말씀 있어요.”
“뭐?”
향기는 용기를 내어 그동안 그녀가 하고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무현의 말로는 조부는 알고 있지만 부모님과 조모는 향기가 가수 하는 걸 모르고 있다고 했다. 무현과 CF까지 찍었는데 TV를 통해 아시는 것보다는 먼저 말씀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수를 하겠다고?”
“네, 어머니.”
“무현아.”
“어머니, 향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에요.”
연선의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향기는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본인이 하겠다는데 말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아들이 연예인인데 며느리까지. 연선은 나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제사는 꼭 챙길게요.”
“네가 뭘 해. 그거 하면서 시간이 어디 있다고. 뻔히 바빠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