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습관대로 이른 시각에 눈을 뜬 향기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악, 옷을 입고 잤어야지.’
오늘은 기필코. 향기는 무현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관계를 맺고부터 터득한 일은 무현보다 먼저 잠이 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향기를 벗은 채 재우고는 꼭 새벽에 관계를 원하는 버릇이 있다. 어제도 그 난리를 쳤는데. 몇 번이나 그의 품에서 숨죽여 흐느껴야 했다.
머릿속으로 고개가 붕붕 저어져 향기는 살금살금 기었다. 무현의 품을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오기 전까지는.
“더 자.”
“깨, 깼어요?”
“오늘은 일찍 내려가면 혼날지도 몰라.”
느른하게 뜨였던 그의 눈꺼풀이 저를 안고는 다시 감긴다. 향기는 웬일인가 싶어 조였던 가슴을 살짝 풀었다. 사람이면 이래야 정상이다. 어제 엄청난 힘자랑을 했으니 피곤할 만하다. 잠에 취해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향기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나저나 자고 일어나도 똑같은 얼굴인 게 신기하다. 인간미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굴. 침 자국도 나고 하다못해 눈곱이라도 껴야 정상 아닌가.
향기는 꼼지락꼼지락 제 눈곱을 정리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너른 어깨를 노출하고 시트로 중요 부위를 덮은 모습이 마치 침대 광고를 찍는 사람 같다.
‘나 모르게 이 방 어딘가에 카메라라도 있는 거 아니야?’
향기는 간질간질한 가슴이 주체 안 돼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침대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무현에게 점점 물이 들고 있다. 어제는 뭐라고 했더라?
「조금만 더요.」
얼핏 화난 얼굴을 하던 무현이 거친 말을 입에 담더니 짐승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닐까, 생각될 즈음 무현이 저를 놓아주었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아래가 뜨거워진다.
‘나 잠 안 오거든요. 놔줘요, 아저씨.’
무현은 눈앞에서 그림자가 어른거려 눈을 뜨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얼굴을 간질이는 귀여운 숨소리에 녀석은 기상을 한 지 오랜데 향기의 감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잡아먹을까.
무현은 잠결인 듯 팔베개를 해 준 팔을 접어 향기를 품에 안았다.
“읏.”
놀란 숨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그의 가슴에 눌리고 그의 허벅지 사이로 쏙 들어온다.
폭신한 입술이 그의 뺨에 닿자 무현은 슬쩍 고개를 틀어 입술을 맞댔다. 숨을 참는지 보드라운 입술이 단단히 굳었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얼핏 보여 참기 힘들었다.
“깼죠!”
“아니.”
“깼으면서, 읍!”
콩깍지가 씐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새벽 키스가 이렇게 상큼하게 느껴질 리가 없다.
무현이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향기를 바라보았다.
“급한 불부터 끄자.”
“새벽마다 왜 이래요?”
“남잔 원래 그래.”
무현은 대답을 해 주면서도 집요하게 향기에게 입 맞췄다. 향기가 수락하듯 눈을 감을 때까지.
천천히 그녀의 몸을 안았다. 새벽이면 도망치기 바쁜 향기였다. 고통스러웠던 그의 새벽이 저릿한 흥분으로 문을 연다.
애무 없이 저를 안는 무현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급한가 보다. 어제보다도 더 그가 버겁게 느껴진다.
“읏.”
이렇게 무현과 몸을 겹치는 게 어느새 좋아져 버렸다. 무현은 발그레해진 향기의 뺨을 쓸고 입을 맞추었다. 향기의 몸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가두었다.
향기는 가빠진 무현의 숨결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무현이 버거우면서도 더 깊어지길 원했다.
“흣.”
“하아.”
어느새 이불이 침대 아래로 흘러내리고 유려한 무현의 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엉덩이 근육이 돌처럼 단단해졌다.
“윽.”
안전기구 없이 이성을 놓치고 말았다. 꽤 오래도록 사랑을 쏟아 내며 무현이 눈을 감았다. 암전이 된 듯 눈앞이 캄캄하고 뜨거운 열기가 터지는데 감당이 되지 않았다.
하, 어떻게 하지, 향기야?
* * *
날이 흐렸다. 덕분에 산을 오르는 게 그리 힘들지 않았다. 간간이 새소리가 들리고 맑은 바람이 땀을 식힌다. 천승언은 기타를 멘 향기의 뒤를 따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CF가 방송을 타고 겨우 보름이 지났는데 향기의 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는 꽃향기, 기타 치는 소녀, 향기의 사투리 등등. 그녀와 관련된 검색어가 연일 메인을 차지하고 CF에서 불렀던 노래는 음원 차트를 휩쓸었다. 솔직히 무현과의 CF가 아니더라도 향기는 뜰 재목이었다. 노래뿐 아니라 작곡에도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약점을 쥐고 있는 무현 때문에 향기를 지켜보는 내내 속이 쓰렸을 정도니까. 향기와 곡 작업을 하고 싶다는 가수들이 줄을 서고 있다. 캐주얼 화장품, 음료 등. 향기의 청순한 이미지에 맞는 광고가 물밀듯 들어오고 있다. 정작 향기 본인은 무심한 얼굴이지만. 어쨌든 완벽하게 떴다. 그리고 약속대로 향기의 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등골이 서늘한지 모르겠다.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가. 말 한마디 없이 산을 오르는 향기의 뒤를 따르는 천승언의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남향으로 난 산기슭. 굵은 소나무 앞에 향기가 멈춰 섰다. 앙증맞은 명패 수십 개가 감겨 있었다. 명패를 눈에 담던 승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읽고도 믿기지 않아 승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누구……지?”
“우리 엄마예요. 류화영.”
승언의 무릎이 맥없이 풀렸다. 가까스로 나무를 짚고 엉거주춤 선 그가 향기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엄마라고?”
“네.”
“아 아버지는…….”
“없었어요.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저는 류화영 씨 딸, 류향기거든요.”
수도 없이 연습했던 말을 뱉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눈으로 천승언을 확인하기 전까지 생각했었다. 그에게도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엄마가 그렇게까지 그리워하고 근사한 분이라고 말해 줬었던 사람인데. 엄마에 대한 애정이 컸기에 천승언이라는 남자도 용서하고 싶었다.
하지만.
망연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천승언에게서 시선을 돌린 향기가 소나무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의 산. 이곳을 자주 찾았던 엄마와 향기였다. 가장 오래된 소나무 밑에 엄마의 유골을 묻고 매일 찾아와 제가 새긴 명패를 감았다.
보고 싶어, 엄마.
슬퍼하지 않을게.
그리고 엄마가 제게 불러 줬던 노래를 향기는 그녀에게 들려줬었다.
“엄마 나 왔어. 나 없어서 외로웠지? 좀 바빴어.”
향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동안 달아 주지 못했던 나무 명패를 나무에 돌돌 감았다. CF 속 예쁘게 나온 제 사진을 빳빳하게 코팅한 것도 함께.
‘나 안 잡아 먹혔어. 엘프가 내 옆에 있었거든.’
여름 동안 물을 흠뻑 먹은 소나무는 윤기가 흘렀다. 성철이 벌써 가을맞이 전지를 했는지 모양도 예뻤다. 살아생전 예뻤던 엄마의 모습처럼.
「엄마에겐 향기가 제일 소중해. 내 딸이 세상에서 최고로 예뻐.」
하루에도 몇 번씩 소곤소곤 들려주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무를 쓰다듬던 향기는 등에 멘 기타를 소나무 옆에 세웠다.
“그동안 심심했지? 이젠 돌려줄게.”
그때야 기타 바디에 하트와 함께 새겨 넣은 두 사람의 이니셜이 천승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때였다. 천승언을 향한 향기의 목소리에 처음 감정이 실렸다.
“만지지 마요. 절대. 우리, 엄마와 내 것이니까.”
미웠다. 자신이 준 기타도 못 알아보는 남자가. 몇 번이나 천승언의 앞에다 이 기타를 내동댕이치고 싶었었다. 하지만 엄마에게 곱게 가져다주는 쪽을 선택한 향기였다. 이 기타에는 엄마와 저의 소중한 시간이 담겨 있었으니까. 향기는 기타를 나무에 묶어 주며 속으로 말했다.
‘보고 싶어 했던 사람도 데려왔어. 나 잘한 거 맞아?’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와 엄마가 자매처럼 닮았다고 말했었다. 향기는 그들이 거짓말을 한 거라 믿고 싶었다. 아니면 저 남자가 엄마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말이 될 테니까.
그런데도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그리워하던 엄마의 남자니까. 향기는 땅에 주저앉아 있는 천승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는 먼저 내려갈게요. 곧장 내려가면 주차해 둔 곳 나올 거예요.”
“자, 잠깐만.”
향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