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51화.
천승언은 그런 향기와 소나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 죽었다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천승언의 가슴으로 가라앉았다. 향기를 보고 겹쳐지는 화영을 애써 떨쳐 냈었다. 그러면서도 절대 하지 않던 오디션에 참가하고 향기와 독대를 했다. 천승언의 입에서 넋을 빼앗긴 듯 색을 잃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 지운 줄 알았어.”
“저한테는 설명 안 하셔도 돼요. 듣고 싶지 않아요. 하실 이유도 없어요.”
향기의 목소리가 천승언의 것과 다르게 차분했다. 이래서 예방 주사가 중요한가 보다. 처음 SJ의 명함을 받고 아이처럼 길을 잃고 헤맸다. 정신을 잃고 호되게 앓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었다. 혹시라도 나를 알아보면 뭐라고 하지? 엄마에 대해 물어보면? 왜 진작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이라고 남자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가슴이 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승언과 첫 대면을 하고 일말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환상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정말 몰랐다……!”
절규하듯 말하는 천승언의 목소리에 향기의 미간이 좁혀졌다.
“엄마도 더는 찾아오길 바라지 않을 거예요. 저도 오늘만 허락해 주는 거예요. 여긴 제 사유지거든요.”
“잠깐 얘기라도…….”
“아니요. 어디서 보든 지금까지처럼 모르는 사람으로 살면 돼요.”
기타를 내려놓고 걷는 향기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웠다.
한참 산을 오르는데 강남이가 컹컹, 짖으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무현이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향기는 몸을 낮춰 얼른 강남이를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향기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무현은 어이없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나 지금 개한테 밀린 거야?”
서울에서 천승언과 향기가 같이 출발하고 무현의 차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향기의 어머니가 묻혀 있는 곳에는 두 사람만 가고 그는 성철이 있는 곳에 와 있었던 거다.
향기가 일어서기 무섭게 무현이 그녀를 안았다.
“다 끝난 거야?”
“네.”
“깨끗이?”
“후련해요.”
가자. 무현의 말에 향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 * *
성철이 화덕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오리를 접시에 담아 평상에 올려놓았다. 한여름인데 이곳은 더위를 잊은 듯했다.
“우리 향기는 구운 게 더 좋지?”
“네.”
“피자도 구울 수 있게 손봤다.”
“정말요?”
향기의 얼굴이 환해지자 성철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마당에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은 빵이나 피자를 굽는 용도가 아니었다. 그릴처럼 닭이나 오리를 굽게 만들어 놓았는데 새로이 손을 봤다. 집안에 오븐이 있지만, 화덕에 굽는 게 유행이라나, 뭐라나. 향기가 서울에 가고 만들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었다. 얼굴은 더 예뻐졌는데 몸은 더 마른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왜 그렇게 말랐어?”
“아닌데. 할아버지, 저 화덕에 피자 구워 줄까요?”
“언제? 서울 가야지.”
성철의 목소리에 서운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성철은 휴대용 가스레인지에서 끓고 있는 오리탕을 떠서 무현의 앞에 놓아 주었다. 부추가 듬뿍 올라가 있어 더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유기농으로 키운 거니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무현은 맛있는 오리탕을 먹으면서도 입안이 썼다. 향기도 그렇고 성철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참, 뭐 하러 사람들은 보냈어?”
“책만 보지 마시고 소일하시라고요.”
“허허, 이젠 눈도 시원찮아서 책 보는 게 힘들지. 자네하고 흠, 향기 얼굴 보니까 좋긴 해.”
처음엔 향기가 TV에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무현이 소식을 주긴 했지만 설마 했던 거다. 무현은 생각보다 자상했다. 수시로 사람을 보내고 안부를 묻고. 처음엔 한두 번 하다 말겠지 했는데 꾸준했다. 집 안 청소며 반찬은 기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말벗까지 이틀에 한 번 꼴로 보내 주고 있다.
식사가 끝날 즈음 무현이 말했다.
“마을 회관을 빌려서 잔치를 하고 싶습니다.”
“잔치?”
“어른들 모시고 먼저 식을 올리려고요.”
결혼식을 하지 않아서 동네 어르신들을 초대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무현의 말에 성철의 눈이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뿐인 손녀딸을 도둑 시집을 보냈냐고 잔소리를 듣고 있던 차였다.
“바쁘지 않아?”
“이번 드라마만 끝나면 괜찮습니다.”
“허, 나야 좋지.”
향기는 뜻밖의 제안을 해 준 무현이 고마웠다. 그뿐 아니라 집에 왔는데 TV가 설치되어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거, 이거 내가 바쁘게 생겼어. 허허.”
“할아버지 힘들면 안 해도 돼요. 그냥 음식 대접만 해요.”
“밥은 맨날 사 먹여. 그런 소리 마.”
향기가 하도 성화를 해서 마을에서 지내면서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인심을 쓰고 있다.
“좋은 소식은 아직 없어?”
“할아버지!”
“무현이가 4대독자잖아. 어른들이 기다리실 텐데.”
“아직 괜찮습니다.”
성철도 보는 눈이 있다. 상견례 때만 해도 덤덤한 눈빛이었는데 향기를 보는 무현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긴 우리 손녀가 좀 예뻐야지. 도둑놈.
성철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먼 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성철의 잠자리를 봐주고 나온 향기가 무현에게 매실차가 담긴 머그잔을 건네주었다.
“마셔요. 소화 잘될 거예요.”
“나 속 안 좋은 거 어떻게 알았어?”
“오리가 입에 안 맞았어요?”
“오리는 맛있었지.”
과식할 정도로 오리는 맛이 있었다. 문제는 향기를 어떻게 두고 가느냐는 거다. 눈 딱 감고 그냥 데려가자니 성철에게 밉보일 것 같고, 두고 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무현은 낮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기타는 안 보이던데?”
“엄마한테 돌려줬어요.”
“네 기타는 내가 선물해도 되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향기는 작게 “네.”라고 대답한다.
막바지 더위가 코앞인데 밤이 되자 바람이 선선했다. 무현은 향기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별 사냥을 나서야 할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덮칠 것 같은 별무리가 너무 아름다웠다.
“별 좋아해요?”
“음.”
“다행이다. 겨울보단 못하지만 지금이 제일 예쁘게 빛날 때예요.”
무현은 네가 더 빛난다고 말하려다 피식 입술을 늘리고 말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향기의 눈빛이 아련했기 때문이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산속. 시야가 탁 트였는데 보이는 것은 없다. 열대야가 끝난 후라 검다 못해 푸릇한 하늘을 배경으로 무리 진 별들만 가슴에도 눈에도 가득 찬다.
“매년 유성우 봤는데 올해는 놓쳤어요. 내년엔 꼭 보러 와요.”
“그러자.”
비처럼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며 자랐다고 말하며 향기가 무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무현은 고개를 틀어 끌리듯 향기의 입술을 머금었다. 이젠 키스를 하면 제법 그에게 호응하는 향기였다. 새콤달콤한 매실 향이 맞물린 입안에서 퍼지자 동그랗게 떠졌던 눈이 사륵 감긴다. 무현은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떼 냈다.
“눈 감으면 나더러 어쩌라고?”
“그럼 떠요?”
자동차에 가서라도 쏟아 내고 싶을 만큼 흥분이 몰린다.
“들어가자.”
“조금 더 있고 싶어요.”
남의 속도 모르고 폭 안기는 향기를 안은 채 무현은 평상에 벌러덩 누워 팔베개했다. 서운하지만 이곳에서의 향기는 제 옷을 입은 듯 편해 보였다. 그녀에게 휴식을 주고 싶었다. 다 털어 낼 시간을. 네가 없는 시간을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아저씨.”
“왜.”
“저기…… 아니에요.”
“……서울 가기 싫어?”
벌써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머물다 오라는 말이 무현의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 * *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서는 무현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천 대표와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키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천 대표가 먼저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테이블로 다가간 무현은 불편한 내색을 숨기고 그와 마주 앉았다. 초조한 낯을 하던 천승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향기는 잘 있습니까.”
“잘 있습니다.”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뭐냐고 묻자 천 대표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내용물을 꺼내 확인하는 무현의 눈빛이 무감했다. 처음 향기와 했던 계약서와 CF 계약에 관한 서류였다.
천승언이 목을 축이고 말했다.
“향기가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만약 SJ에 남길 원한다면…….”
무현이 “잠깐만.”이라고 천 대표의 말을 막았다.
“위약금을 원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난 다만 그 아이가 잘될 수 있게 돕고 싶어서…….”
“천 대표님 만났을 때 향기를 잠깐만 맡기겠다고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천승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여잡니다. 누구에게도 맡길 생각 없고요.”
“그래도…….”
“저 능력 됩니다. 향기 또한 마찬가지고요. 누구 도움 필요 없습니다. 천 대표님의 도움이라면 더더욱.”
향기가 원하는 대로, 여태 남남으로 지냈던 것처럼 해 주면 된다고 말하는 무현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향기를 고향 집에 남겨 두고 오면서 그녀의 마음을 수십 번은 확인했다. 야무지게 제 뜻을 밝히는 향기가 애틋했고 대견했다.
무현의 말에 천승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향기, 잘 부탁합니다.”
“부탁하지 마세요. 천 대표님은 그럴 자격 없습니다.”
그래도 제 핏줄이라는 건가. 무현의 입매가 삐딱해졌다. 알아볼 기회는 충분히 줬다. 향기가 아파하는 것을 외면하면서까지.
“그렇죠.”
천승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영이 묻힌 곳에 다녀온 후 현실감이 사라진 것 같았다.
향기를 보고 뭔가 모르게 끌렸었다. 이상하게 화영과 겹쳐지는데 외면했다. 왜 그랬을까……. 죄책감. 아니 처음 마음이라는 걸 준 여자였다. 순진하면서도 단호한 여자였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여자였다.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면서 자존심을 지키던 여자였다. 하지만 성공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심장을 팔아먹은 대가가 컸지만 이제 와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인생.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기엔 너무 긴 시간이 흘러 버렸다.
“향기, 한 번만 보면 안 되겠습니까.”
“여기서 더하면 추하지 않겠습니까, 천 대표님.”
무현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마지막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