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향기의 바람이 닿은 곳은-52화 (52/56)

# 52

52화.

“이제 가, 가라고!”

“어딜.”

“향기 씨한테 가라, 제발.”

정우는 참지 못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로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 그동안 대배우님께서 어찌나 히스테릭하신지 죽을 맛이었다. 무슨 입덧하는 놈처럼 끼니때마다 입맛이 없다고 하질 않나,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호흡을 맞추는 배우들, 작가와 스태프들까지 무현이 예민해졌다며 하소연을 할 정도일까. 그러니 정우 저와 수진은 녀석의 비위를 맞추느라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다.

“나도 그러고 싶지.”

“당장 짐 싸. 왜 이러고 있는 건데?”

“그러게.”

밤잠을 설치면서 향기에게 못 가는 심정을 네가 알아? 괘씸하고 서운했다. 큰 결심을 하고 시골에 두고 왔는데 며칠 지내다가 오겠지 했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그러더니…….

「어차피 잔치할 건데 그때까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결론은 향기와 한 달 가까이 떨어져 지내게 됐다. 통화를 할 때마다 향기는 제 세상을 만난 듯 목소리가 밝았다.

「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무현에겐 영혼이 없는 일상어처럼 들린다. 진심으로 보고 싶었다면 서울에 오겠다고 하는 게 정상일 테니까.

무현도 오기가 생겼다. 본가에서도 혼자 오는 그를 반기지 않는다. 자고 간다고 하면 대놓고 귀찮아한다. 거기다 CF가 나가자 향기를 찾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주인공은 없는데 팬 카페가 생겼고 수진이 혼자 열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안 가려고?”

“…….”

대답 없는 무현을 보고 정우가 혀를 찼다.

‘내가 너 한 시간 안에 가방 꾸린다는 데에 네 전 재산을 건다.’

* * *

향기는 얼음이 가득 담긴 오미자를 들고 그늘막이 쳐진 평상으로 다가갔다. 9월이라고 해도 낮에는 아직도 더웠다. 만세 자세로 누워 있던 은주가 벌떡 일어나더니 유리잔을 비우고 다시 눕는다.

“그렇게 힘들어?”

“나 늙었나 봐. 체력이 옛날 같지 않아.”

“웃을 가치도 없는 말인 거 알지?”

향기는 코웃음을 치고 은주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곧 잠이 솔솔 쏟아질 것 같았다. 은주가 팔을 괘고 향기를 바라본다.

“할아버지는 좀 어떠셔?”

“폐렴으로 번질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아지셨어.”

성철이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렸다. 열이 펄펄 끓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꼬박 일주일을 앓고 오늘에서야 병원에서 괜찮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병원 가셨어?”

“아니, 마을 회관. 재미 붙이셨나 봐.”

그녀가 온 후로 마을에서 지내던 성철이 다시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옛날 같으면 저를 놔두고 노인정에 갈 성철이 아닌데 많이 변했다.

향기는 슬쩍 고개를 틀었다.

“넌 서울 안 가?”

“네 결혼식이 코앞인데 어딜 가.”

취업 준비로 바쁜 은주였다. 말로는 왔다 갔다 하기 번거로워서 그런다는데 진로 문제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대학원 가려고?”

“생각 중. 석사 학위 받는다고 취업이 보장되는 건 아니니까. 나도 결혼이나 할까?”

“내가 뭐라고 말해 주면 돼?”

“미친년? 아, 개웃겨.”

향기는 혼자 키득대다 저를 꼭 끌어안는 은주의 머리를 쓱쓱 쓸어 주었다.

“향기야,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두 사람이 만난 건 드라마 같아. 나도 여기서 살면 차무현 같은 남자 만날 수 있을까?”

향기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제가 생각해도 신기하다. 오죽하면 엄마와 할머니가 보내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다 했을까.

돌연 은주가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나는 포기할래.”

“왜?”

“혹부리 영감의 교훈을 잊으면 안 되지. 생긴 대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은주는 제가 말하고도 기특한지 팔을 엇갈려 자신을 다독이다 물었다.

“너야말로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스타가 이래도 돼?”

“스타는 무슨.”

“요즘 너 대세잖아? 나도 네 음원, 다운받았어.”

은주는 향기의 유명세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향기는 은주의 입을 막고 말했다.

“잔치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그동안 할아버지랑 있으려고.”

“차무현은. 아, 미안. 습관이 돼서.”

“괜찮아. 무현 씨 앞에서만 안 그러면 되지, 뭐.”

연예인을 부를 때 친구 부르듯 하는 건 향기도 마찬가지다. 은주는 제 입을 톡톡 때리고 말했다.

“어쨌든. 무현 씨가 서울 오라고 안 해?”

“아니.”

“이상하네.”

왜냐고 묻자 은주는 음흉한 미소를 짓고 향기를 바라보았다.

“신혼이잖아? 더구나 너희 부부는 급이 다른 신혼부부인데.”

“급?”

“너, 무현 씨가 처음이잖아? 키스도 처음이었지? 더구나 열 살이나 차이 나는 신부야.”

“요즘 그런 걸 누가 따진다고.”

얼굴이 빨개지는 향기를 보고 은주는 살살 고개를 저었다. 요즘 시대에 순결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향기는 맹할 정도로 순진하다. 그래서일까. 무현이 급 안쓰럽게 생각됐다. 함께 만날 때마다 향기에게 푹 빠져 있는 무현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은주였다.

“그런 네가 무현 씨 눈에는 얼마나 예쁘겠어? 그게 아니더라도 막 결혼 생활 시작했어. 한 달 가까이 혼자서 독수공방하는 게 쉬울 것 같아?”

“힘들까?”

“당연하지.”

보일러만 거꾸로는 타는 시대가 아니다. 연애도 선 스킨십 후 연애. 진도부터 빼는 시대다. 청정 향기가 무현의 애를 얼마나 태우고 있을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향기도 조금 의아하긴 하다. 무현은 전화 통화를 해도 올라오라는 재촉을 하지 않았다. 저를 두고 갈 때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얼굴을 하던 남자가. 향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보고 싶은데, 많이.

* * *

마당에 불을 켜고 향기는 거실 창으로 밖을 살폈다.

“꽤 늦으시네.”

날이 어두워졌는데 성철이 오지 않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 보고 싶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재미를 붙인 성철이었다. 성가시게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망설여진다.

요즘 들어 관광에 재미를 붙인 성철이었다. 어느 날은 온천 관광, 어느 날은 제주도 관광. 처음엔 저를 안심시켜 주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즐거워하는 성철의 목소리를 듣고 새삼 깨달은 게 있었다. 이곳에 묶여 있었던 건 향기 저만이 아니었다. 성철 또한 그녀를 보호하느라 똑같이 묶여 있었던 거다.

TV를 보며 아이처럼 웃는 성철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마을로 거처를 옮기자고 했을 때도, TV를 들이자고 했을 때도, 성철의 마음을 어림짐작해서 거절한 건 향기 저였다. 그게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현은 그의 뜻대로 사람을 보내 마을로 거처를 옮기게 했다. TV를 설치하고, 자주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도 제게는 말하지 않았다. 향기는 무현의 얼굴이 떠올라 입을 삐죽였다.

“보고 싶은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이런 감정인 줄 몰랐다. 이렇게 무서운 건 줄 알았더라면 결혼이 뭐가 대수냐고 말하지 않았을 텐데. 대체가 가능하지 않은 감정.

시도 때도 없이 무현만 떠오른다. 특히 잠들고 깨어날 때면 그가 더 그립다. 부드럽게 다독여 주던 그의 손길도 가만히 지켜봐 주던 따뜻한 눈빛도.

“정말 안 보고 싶은가…….”

은주의 말 때문인지 괜히 마음이 심란해진다.

「여자 연예인의 이상형이 차무현 씨야.」

향기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바쁜가.”

어제 오늘은 전화도 없다. 작품 들어가면 밤을 새워 촬영하는 날이 많아 이해를 하면서도 불안하다. 잡념을 없애려고 일거리를 찾는데 개들이 컹컹,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성철이라는 확신에 향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왜 이렇게 늦으셨…….”

현관문을 활짝 연 향기는 개들을 쓰다듬어 주는 무현을 발견하고 말을 맺지 못했다.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면 어떻게 해.”

“할아버진 줄 알고.”

향기는 목이 갑갑해지고 눈앞이 흐려져 웅얼거렸다. 향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는 걸 본 무현은 가슴이 덜컥했다.

“꽃향기?”

설마? 내 짐작이 맞는 건가. 서운한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고 할 때였다. 향기가 그의 품에 안기더니 허리를 꼭 끌어안는다.

“왜 전화 안 받았어요?”

“…….”

이곳으로 오는 중이라. 아니, 너한테 화가 나서. 무현은 대답 대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보고 싶었어요.”

향기의 말에 무현은 탈진한 것처럼 몸에 힘이 빠졌다. 촬영이 끝나고 여유를 부린 건 30분 남짓. 문득 드는 생각에 황급히 짐을 싸서 날 듯 달려왔다. 괘씸하니까 절대 먼저 안아 주지 않겠다고 생각을 하며 산을 올랐는데 그 결심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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