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화.
급한 대로 정우가 향기의 관리까지 하고 있는데 지금도 드라마 OST 작업을 하자는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 세상에 내놓기 싫은 마음과 그녀의 꿈을 펼치는 걸 보고 싶다는 마음이 엇갈린다.
“내 마음에 우선순위는 무현 씨에요. 자기요.”
무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살을 찌푸렸다. 향기의 목소리로 ‘자기’라고 부르면 단전부터 열이 올라와 좀처럼 참기가 힘들다. 그리고 지금처럼 계산되지 않는 돌발 행동,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배시시 웃으면 말이다.
“사랑해.”
“나도요.”
재촉하지 않아도 향기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한다는 말에 무현의 마음이 풀어진다. 무현이 향기의 손을 꼭 잡자 그녀의 입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내 사랑이 느껴지나요, 나는 당신의 사랑이 보여요〉
〈내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지금 당장 말할 수 없어요〉
〈아직은 자라고 있거든요〉
〈당신의 마음에 매일 키를 재듯 새겨 줄게요〉
〈내 사랑이 얼만큼 자라고 있는지〉
* * *
바람이 적당히 불어 시원함을 더하는 날씨였다. 그늘막이 쳐진 마당에 매화가 붉게 그려진 병풍이 세워졌다. 옻칠한 자줏빛 교배상 위에는 촛대와 꽃병, 탑처럼 쌓인 쌀, 밤, 대추가 놓여졌다. 혼주석에 무현의 가족과 성철이 고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성철은 간소하게 흉내만 내겠다고 하더니 제대로 격식을 갖췄다. 사물놀이 패가 흥을 돋우고 얼굴을 가린 무현이 입장했다. 뒤이어 꽃가마를 탄 향기가 등장하고.
성철이 얼마나 향기를 사랑하는지 엿볼 수 있어서 사람들의 덕담이 끊이지 않았다.
무현은 대례상 아래로 보이는 향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족두리를 쓰고 연지 곤지를 찍은 향기는 마치 인형 같았다. 눈매를 사악 접고 사람들을 보고 생긋생긋 웃는데 절로 한숨이 나온다. 피부 관리에 조금 더 신경을 쓸 걸 그랬나. 몇몇 모인 친구 녀석들이 향기를 보고는 이구동성 무현에게 ‘도둑놈’이라고 눈을 부릅떴다.
류향기, 신랑만 봐야지!
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향기가 올곧게 무현은 쳐다보고 곱게 눈을 접는다.
혼례를 진행하는 어른이 목청을 돋우어 거례 선언을 하자 아주머니들의 도움을 받은 향기와 무현이 맞절을 했다.
합환주를 나눠 마시고 폐백을 받았다. 잠시 후 사람들이 배꼽 빠지게 웃는 통에 연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추를 입에 물고 쪼개 먹는 흉내만 내면 되는 것을 무현이 아예 향기의 입술을 안주로 생각하는지 쪽쪽대고 있었다.
“어머님, 쟤 무현이 맞아요?”
“우리 집 남자들 내력인 걸 어떻게 해. 내 아들도 네 아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그랬었나? 연선은 가물가물한 추억을 떠올리다 따뜻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남편에게 미소를 지었다.
식이 끝나자 사물놀이 패가 한껏 흥을 돋우고 사람들은 식사를 하며 향기와 무현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잔치에 참관하지 못한 취재진들은 먼발치서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린다.
차무현, 품절남 되다. 차무현의 여자, 신인 꽃향기! 발 빠른 기사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향기의 이름이 다시 검색어 1위에 올랐다.
한복 차림으로 가족과 성철을 배웅한 무현과 향기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무현은 신혼여행을 가는 대신 마을 어른들과 성철을 제주도에 여행을 보내 드리자고 했다. 향기도 흔쾌히 동의했다. 덕분에 닷새 동안 고향집이 그들의 신혼 여행지가 됐다.
“신혼여행 못 가서 서운해?”
“아뇨.”
“서울 가서 바로 여행 가자.”
무현은 새삼스럽게 향기를 바라보며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길을 처음 오를 때, 여자인지 애들인지 분간 안 되던 향기가 제 여자가 될 줄이야. 산 끝에 붉은 석양이 내려앉는 걸 가리키며 향기가 그를 재촉한다.
“내일은 날씨가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우리 소풍 갈래요?”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까?”
무현의 말에 한참 생각하던 향기가 저녁노을보다 더 붉게 얼굴을 붉혔다.
<완결>
외전 1.
ON-AIR.
빨간불이 들어오고 베이스 음악과 함께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야외 스튜디오 내부가 비쳐진다.
크고 작은 기타, 카세트테이프와 LP판이 꽂힌 선반 책장. 갓을 씌우지 않은 물방울 모양의 전구 불빛. 누런 코르크판에 꽂힌 폴라로이드 사진들과 포근해 보이는 목도리와 벙어리장갑. 그 가운데 탤런트이자 영화배우인 하동우와 향기의 모습이 보인다.
동굴 목소리 소유자인 하동우의 오프닝 인사로 문을 연다.
“퇴근들 하셨나요. 보이는 라디오의 하동우입니다. 오늘의 게스트는 미리 스포일러해 드렸는데 눈치채셨죠? 이미 보시고 깜짝 놀라셨을 텐데요.”
잠시 멘트를 끊은 하동우가 향기와 눈을 맞추고 노트북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수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그녀가 그를 따라 손을 흔든다.
“아쉬우시겠지만 잠깐 기다려 주세요. 첫 곡 듣고 오겠습니다.”
노래가 나가는 사이 하동우와 향기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웃고 있었다. 앞머리를 일자로 자르고 긴 단발머리를 반 묶음 한 향기의 얼굴이 영락없는 대학 새내기 모습이다.
“노래 나가는 사이 저 돌 맞는 줄.”
하동우가 크게 웃고 말을 이었다.
“보고도 안 믿기시지요? 삼촌들뿐만 아니라 이모들까지 홀릭시킨 꽃향기 씨, 오늘의 게스트입니다.”
“안녕하세요. 꽃향기입니다.”
“실시간 댓글 업로드 폭주! 이거 실홥니까?”
제작진을 향한 동우의 질문에 그들이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그도 그럴 게 향기는 공중파에 일체 얼굴을 비치치 않고 있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디아와 언더에서만 활동 중이었다. 언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라 제작진들도 향기를 섭외하며 그녀의 출연을 반신반의 할 정도로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 했다.
하동우가 길게 인사를 남겨 달라고 하자 향기가 입을 열었다.
“편한 시간대에 하는 방송이라 즐겨 듣던 청취자예요. 그래서 찾아뵐 용기를 냈고요. 여러분들 고민에 공감돼 폭풍 댓글도 매번 달았었는데.”
곤란해하는 순수한 얼굴이 그대로 비쳐지고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라고 인사를 마무리한다.
“어떻게 하죠. 노래 한 곡 듣고 가겠습니다.”
선곡된 음악이 다시 흐르자 향기는 청취자들과의 소통 공간인 실시간 채팅창에 성실히 댓글을 달아 준다. 게임에 빠진 고등학생처럼 가느다란 하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신나게 날아다닌다. 하동우는 청취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라는 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질하며 미소를 짓고.
“아, 향기 씨의 귀여운 모습에 지금쯤 삼촌들 이불킥 장난 아닐 텐데. 저는 책임 못 집니다.”
동우의 익살스러운 멘트에 슬그머니 고개를 떨어트리던 향기가 목을 곧게 세운다.
“아, 보이는 라디오죠. 자꾸 잊어요.”
그녀가 인사를 남기듯 다시 손을 흔들었다. 재미있게 봤던 예능 프로그램을 얘기하고, 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말하는 대목에서 하동우가 빵 터졌다.
“히어로물에 그렇게 깊은 감명을? 반전인데요.”
“제가 정신 연령이 미취학 아동이거든요. 권선징악이 분명한 걸 좋아해요. 이해가 쉽잖아요.”
“이쯤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질문. 남편인 차무현 씨 첫인상은?”
“음, 엘프?”
웃음이 와르르 터졌다.
“철벽남 차무현 배우가 애처가로 소문이 자자하던데 사실일까요. 청취자분들도 궁금하시죠?”
무현과 함께 작업을 해 봤던 동우였다. 무현이 얼마나 여자들에게 냉랭하게 구는지 눈으로 확인한 그였다. 과연?
눈을 맞춰 오는 동우를 보며 향기는 잠시 망설였다. 무현이 예상한 질문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돼. 밤낮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이미지가 있는데 어느 정도까지 말해야 할지……. 지금도 밖에서 무현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 향기가 입술을 꼭 깨무는 모습이 보이자 실시간 댓글 창이 마비될 정도였다. ‘귀여워!’라는 댓글로.
“성실해요. 무척이요.”
“아, 성실하다. 예를 들면요?”
“식사도 꼭 챙겨 주고 애정 표현을 많이 해 줘요. 뽀뽀 같은 거?”
“신혼이니까 밤낮으로?”
동우의 짓궂은 묘한 뉘앙스의 질문에 향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 편한 대화가 이어졌다.
“자, 벌써 헤어질 시간이네요. 꽃향기 씨의 자작곡 ‘그녀의 바람이 닿은 곳은’, 라이브로 들려 드리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좋은 꿈 꾸세요.”
잔잔한 기타 반주와 함께 향기의 노래가 시작됐다. 촉촉한 그녀의 감성에 밤이 더 깊어지고 마성의 꿀 보이스라는 댓글이 읽을 새도 없이 업로드되고 있었다.
한편 무현은…….
휴대폰으로 향기의 모습을 보던 무현은 얼굴이 더욱 굳어져만 간다.
“내보내는 게 아닌데.”
유명한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보이는 라디오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노래를 따라 가볍게 몸을 흔드는 모습, 꾸밈없이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결혼 사실이 밝혀지고 무현은 대놓고 도둑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동반 CF도 물밀듯이 들어오고. 향기와 의논을 해서 세 편만 찍었고 그 수익을 전액 기부했다. 그 후론 TV에 얼굴을 비치지 않고 언더에서 가끔 활동하는 향기였다. 무현으로서는 천만다행이었다.
무현은 스튜디오를 나오는 향기를 발견하고 차에서 내렸다.
“아저씨!”
무현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고 향기가 차에 오르자 문을 닫아 주었다.
차에 오른 그가 자연스럽게 향기와 포옹했다.
“봤어요? 저 이상하지 않았어요?”
너무 예쁘게 나와서 열이 받았다는 말은 아꼈다. 어느새 겹쳐진 입술 사이로 겨울밤을 녹이는 후끈한 열기가 새어 나와 자동차 창에 뿌연 커튼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