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사령영지, 루벤(2)
멍한 시안의 정신.
시안은 스마트 폰 화면 위로 떠오른 알림창을 다시 확인했다.
[튼튼한 목책 Lv.1 (5,000G)]
자그마치 5,000G에 판매하고 있는 목책.
제국 물가 기준, 4인 가족 생활비가 30G임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싼 금액이었다.
영지 시설인 목책임을 감안해도 꽤나 비싼 금액이었다.
저 목책이 엘프목으로 만든 것이지 않은 이상 말이다.
하지만 보이는 이미지로는 평범한 나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기라 불러도 할 말이 없는 가격이었으나.
“음···.”
시안은 마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3,000G에 구매한 S등급의 장비.
그 성능이 어떤지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는가.
저 목책 또한 그에 버금가는 성능을 자랑할 것이 분명했다.
시안은 품 속을 뒤적여 돈 주머니를 확인했다.
그렇게 확인한 금액은··· 6,900G.
충분히 목책을 구입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시안은 돈 주머니를 품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일단.
화면 너머로 보이는 목책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튼튼해보였다.
게다가 설명처럼 단순히 방어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로 올라가 목책 너머의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은 물론이고.
앞을 뾰족하게 깍은 통나무들이 정면에 배치되어 적들이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솔직히 목책이 아니라 나무 성벽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혹시 이거라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수 백에 달하는 고블린 무리들을 퇴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마수들은 광폭화(OverDrive)로 인해 일반 몬스터들보다 더욱 흉포하다.
그러나 그만큼 이성의 영역이 도려내어진다.
방어만 충분하다면,
그로써 수성의 이점을 살릴 수만 있다면.
수 적인 차이가 있어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시안 혼자서는 안된다.
같이 싸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목책을 방비하고,
또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
시안은 고개를 돌렸다.
“한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말씀하시지요.”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서 영지민들을 좀 불러와줄 수 있을까?”
“영지민들을··· 말입니까?”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영지민들을 데리고 와줘. 대화를 하고 싶다고 말이야.”
“······”
단호한 시안의 부탁에 한스는 잠시 입을 닫았다.
영지민들을 데려와달라는 부탁.
그 부탁에서 어떤 시안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는 굳은 의지를.
“하지만···.”
그렇기에 한스는 쉽사리 답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무려 수 백의 고블린들이었다.
그것도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고블린들이 말이다.
막는 것은,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싸운다는 것은 죽겠다는 선택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작 영지민들의 전력이 더해진다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다.
불가능은 불가능.
안되는 건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기나긴 용병 생활 속에서 한스가 깨달은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거늘···.
“부탁할게 한스. 난 잠시 할 일이 있어서.”
바라본 시안의 두 눈빛은 무언가로 반짝이고 있었다.
언제나 눈치만 보며 주눅 든 눈빛이 아닌.
항상 두려워하며 겁에 질린 눈빛이 아닌.
당당히 맞서겠다는 투지(鬪志)의 눈빛.
“······ 알겠습니다.”
한스는 차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고마워 한스.”
시안은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한스가 떠나가고.
“그럼 시작해볼까.”
시안은 곧장 스마트 폰을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튼튼한 목책 Lv.1'의 구매 버튼을 눌렀다.
꾹.
《구매 완료!》
촤라라라락!
그러자 떠오르는 알림창과 함께 어김없이 돈 주머니에서 금화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날아가 사라지는 금화들.
시안은 혹시나 싶어 주머니의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어림도 없지!’ 라는 듯.
금화는 주머니 안에서 증발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든 가져가는구나.”
그렇게 5,000G가 사라지고.
화아아아악!
저번과 같이 환한 빛무리가 시안의 시야 앞으로 터져나왔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 빛무리가 사라질 때쯤.
동시에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될 때쯤.
“······ 와.”
시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보이는 광경.
통나무들은 잘 다듬어져 수북히 쌓여있었고,
한 쪽에서는 그 통나무들이 알아서 움직여 목책을 만들고 있었다.
자동으로 알아서 건설되는 목책.
“마법?”
아니, 이건 마법으로도 힘든 일이었다.
정확히는 이런 마법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시안은 시선을 내려 스마트 폰을 바라봤다.
상식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는 아티팩트.
정말로··· 아르나이즈가 남긴 아티팩트일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바로 그때.
띠링!
《튼튼한 목책 Lv.1을 건설 중입니다.》
《건설 완료까지 D - 3》
일순간 알림음과 함께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D-3? 건설까지 3일이 걸린다는 건가?”
아무래도 건설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는 듯 싶었다.
하기사, 구매하자마자 뿅! 하고 만들어지면 말이 안되지.
사실 지금 자동으로 건설되는 것도 말이 안되었다.
게다가 3일이면 상당히 빠른 축에 속했다.
하지만.
“3일이면 너무 늦는데···.”
문제는 지금 당장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블린들이 습격해오는 것은 당장 내일.
3일이면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시간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시점에서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혹시 다른 방법이 없나?
시안은 스마트 폰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건설되는 시간을 줄여주는 것 따위가 있을리가 없─.
바로 그때였다.
띠링!
일순간 알림음이 들려왔다.
마치 시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하나의 창이 화면 위로 새로이 떠올랐다.
[즉시 완료권 - 1,500G]
“즉시··· 완료권?”
말 그대로 즉시 건설을 완료해주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띠링!
《진행을 하다 막혔을 땐, 현질을 해보세요!》
“······”
시안의 사고가 순간 정지했다.
#
“대화를 하자고?”
그레이슨은 눈앞의 노인을 바라봤다.
루벤의 영지민들을 이끌고 있는 그레이슨.
그레이슨은 실력이 굉장히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애초에 어둠의 숲에서 살아가는 사냥꾼.
이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실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레이슨은 어둠의 숲에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마수들을 사냥하며,
그 부산물로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슨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버림받은 루벤의 사람들.
그리고 지켜야만 하는 딸.
그레이슨은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 막 소녀 티를 벗어난 딸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레이슨은 루벤에서 삶을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렇다. 도련님께서 너와 대화를 하고자 하신다.”
그레이슨은 가만히 노인을 바라봤다.
날카로운 인상의 노인.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다름 아닌 아까 전.
영주랍시고 거들먹 거리던 놈팽이 옆에서 봤었으니까.
한스라고 했던가?
그레이슨은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을 흘려보내며 입을 열었다.
“일없다.”
이윽고 그레이슨은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바로 그때.
“언제부터 영지민이 영주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있었지?”
등 너머로 싸늘한 한스의 말이 들려왔다.
그레이슨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바라본 한스의 모습에서는 날카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제국법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나?”
“······ 지금 협박하는 건가?”
그레이슨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잠시 내려앉는 침묵.
이윽고 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화만 하자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대화가 아니라 강요겠지. 결국 그 녀석도 똑같은 엘란두르니까.”
그레이슨은 비아냥 거리듯 조소를 흘렸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귀족이라는 족속들은.
지들 뜻대로 안되면 신분을 들먹거린다.
비단 시안이라는 놈팽이뿐만이 아니었다.
루벤에 영주로 오는 모든 놈들이 그러했다.
처음에는 영지민을 위한다느니.
영지를 부흥시키겠다느니 등등.
온갖 감언이설을 내뱉다가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나몰라라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어둠의 숲에 잡아먹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데 시안이라는 놈팽이라고 뭐가 다를까.
시안도 결국은 똑같은 귀족이었다.
아니, 루벤의 사람들을 외면하고 버린 엘란두르였다.
그레이슨은 시안과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제국법을 들먹일거라면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약속하지. 대화에 있어서 그 어떠한 강요도 있지 않을 거라고.”
“하, 그딴 말뿐인 약속 따위─.”
“내 목을 걸고 약속한다.”
“······”
그레이슨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이윽고 바라본 한스의 모습.
주름기 가득한 얼굴은 세월의 깊이가 묻어나왔다.
동시에 눈빛에 깃든 진중함은 그 진정성을 알 수 있었다.
그레이슨은 목을 걸겠다는 한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놈팽이를 믿는다는 건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레이슨은 고개를 살며시 저어보였다.
그래봤자 엘란두르의 핏줄이다.
쓸모가 있으면 이용하지만 결국은 버리는.
아마 저 한스라는 노인은 아직 쓸모가 있어 데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스는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한 듯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일 터였다.
그렇기에 엘란두르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 대화만이다.”
그레이슨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레이슨은 한스를 따라 발걸음을 옳겼다.
그렇게 시안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
솔직히 그레이슨은 딱히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레이슨이 본 시안은 정말이지 놈팽이에 불과했으니까.
후작가의 망나니
마냥 소문뿐만이 아니라 그레이슨이 본 시안은 정말 볼품 없었다.
귀족가에서 곱게 자란 온실 속의 화초 정도.
아니, 화초도 되지 못한 깜냥이었다.
그런 무능력자가 대체 무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레이슨은 대충 대화하는 시늉만 하다가 돌아올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
영지를 둘러싼 거대한 목책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이, 이게 무슨···!”
그레이슨의 두 눈이 찢어져라 떠졌다.
그와 동시에 표정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까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것도 없지 않았나···?
정확히는 폐허나 다름 없는 루벤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루벤은···.
“어, 어떻게 이런···.”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풍경.
그리고 그건 비단 그레이슨만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그레이슨의 옆으로 경악에 들어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시야.
“이게 대체 어찌된···!”
그곳엔 한스가 입을 쩌억, 벌린 채 경악하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대체 왜 놀라는 건데?
그레이슨은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보아하니 어째, 한스도 모르던 일인 것 같은데···.
그렇게 그레이슨과 한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박혀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왔어?”
목책 안 쪽으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