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55화 (55/322)

§ 55화 - 수라천살[修羅天殺]

“왜 저래?”

시안은 순간 당황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안했는데 갑자기 누르비아가 비명을 내질렀으니까.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보아하니 꽤나 고통스러워보였다.

“저거 레아가 한 겁니까?”

-아니.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레아 또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안은 다시 시선을 돌려 누르비아를 바라봤다.

여전히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누르비아.

시안은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누르비아를 떨리는 눈으로 지켜보는 세미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미르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표정 또한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헬렌···.”

그리고 들려오는 세미르의 중얼거림.

“이거 설마···.”

시안은 그때서야 대략적인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누르비아가 거친 숨소리 내뱉었다.

시안은 검을 움켜 쥐며 누르비아를 바라봤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누르비아의 광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그 때문일까

둘러본 주변으로 혼돈의 마물들 또한 그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 또한 전부 이쪽을 향해 있었다.

시안은 일단 상황을 지켜봤다.

【세, 세미르···.】

누르비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까지 들렸던 목소리와는 달랐다.

지금 보이는 여인의 모습.

그 여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청아한 목소리였다.

“헬렌··· 정말 헬렌이 맞는 거요?”

세미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00년이나 지났음에도··· 역시 저를 잊지 않으셨군요···.】

누르비아가··· 아니, 헬렌이 말했다.

그 모습에 세미르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찌··· 어찌 내가 당신을 잊겠소.”

【세미르라면··· 그럴 것 같았어요. 세미르는 제가 본 드워프 중에서도 가장 드워프 다운 드워프였으니까요.】

“대체··· 대체 어찌된 일이오. 그 모습은 대체···.”

이윽고 세미르가 헬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지 마세요!】

헬렌이 소리쳤다.

멈추는 세미르의 걸음.

헬렌이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세미르. 저는 이미 늦었어요. 악마의 그릇이 되어버렸거든요.】

-저 여인이 악마의 그릇이었다고?

레아가 놀라 소리쳤다.

악마의 그릇.

말 그대로 악마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그리고 악마의 그릇이 될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았다.

비단 인간 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을 통틀어서도 흔치 않았다.

심지어 그 악마가 7군주 중 한 명인 나태의 악마라면 더더욱.

천 년전.

악마들과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이곳, 어둠의 숲.

레아에 말에 따르면 당시 모든 악마들이 소멸되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어째서 지금, 나태의 악마가 살아있는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악마가 전부 소멸되지 않고 어둠의 숲에 남아있었던 거라면.

아마··· 100년 전.

헬렌은 다시 어둠의 숲으로 돌아오다가 누르비아의 눈에 띄어 그대로 먹혀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헬렌은 세미르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이고.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어.

레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악마의 그릇이 되어버린 헬렌.

이미 한 번 먹혀버린 그릇은 돌이킬 수 없었다.

심지어 그 기간 또한 너무도 오래되었다.

무려 100년.

헬렌은 이미 누르비아에게 삼켜질대로 삼켜진 상태였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악마의 그릇이라니. 그게 대체···.”

【길게 설명드릴 시간이 없어요.】

일순간 헬렌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렌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세미르, 부디 저를 잊어주세요. 그리고 세미르의 삶을 사세요. 그래야··· 제가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헬렌이 세미르를 바라봤다.

헬렌의 눈빛에는 슬픔이라는 표현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깃들어있었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지금까지 버텨왔어요.】

헬렌은 점점 흐려지는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묶어두었던 정신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완전히 사라져버릴 터.

그렇다면 헬렌이라는 인간은 없고 나태의 악마만이 남게될 터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 말을 전할 수 있어서.

그리고 다시 한 번 볼 수 있어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고.

평생을 전하지 못하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지난 100년.

악마의 유혹에 포기하고 싶은 때가 매순간이었다.

그러나 헬렌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그 끔찍한 고통을 악착같이 버텨왔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기다릴 세미르를 위해서.

다행히 그 고생이 헛되지 않아서···.

헬렌은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꺄아아아아악!】

헬렌이 끔찍한 비명을 터트렸다.

이윽고 헬렌의 주변으로 소름끼치는 광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하아···! 하아···! 이 망할 년이···!】

다시 들려오는 거친 목소리.

시안은 지금 여인이 헬렌이 아니라 누르비아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년이 갑자기 왜···!】

“헬렌을 대체 어찌한 것이냐!”

일순간 세미르가 노성을 터트리며 누르비아에게 달려들었다.

세미르의 손에 들린 범상치 않은 거대한 망치.

누르비아는 가볍게 손을 들어보였다.

쩌어어엉─!

터져나오는 굉음이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쩌저적, 광기의 보호막이 갈라졌다.

【이 힘은···?】

누르비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꽤나 강대하고 또 익숙한 힘이었으니까.

다름 아닌 천 년전.

자신들을 곤란에 빠뜨렸던 6명의 존재들.

그 6명 중 한 명과 상당히 비슷한 힘이 느껴졌다.

누르비아가 가만히 세미르를 바라봤다.

깃드는 어둠.

【넌 그 망할 드워프의 후손이구나.】

누르비아가 세미르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소름끼치는 힘으로 악마들을 도륙냈던 드워프.

그러나.

후손은 후손일 뿐.

【그 드워프에 비하면 한없이 나약해.】

“끄아아아아악!”

검붉은 광기가 터져나오며 세미르를 옭아맸다.

바로 그때.

누르비아의 시야 한 켠으로 한줄기 검날이 스쳐보였다.

찰나 간의 틈을 노린 일격.

꽈아아아앙!

끔찍한 폭음과 함께 공간이 크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보인 금발의 인간.

시안이었다.

【네 놈···!】

누르비아가 이를 까득, 깨물며 소리쳤다.

역시나 이번에도.

광기가 일순간 흩어졌다.

누르비아가 광기를 휘감은 손을 들어보였다.

공간을 진동시키는 끔찍한 광기.

“레아!”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안의 외침과 함께 끔찍한 귀곡성이 터져나왔다.

이윽고 주변으로 피어난 어둠이 누르비아를 향해 쇄도해갔다.

【이것들이!】

누르비아는 쇄도하는 레아의 어둠을 향해 광기를 쏘아보냈다.

잠시 보이는 틈.

시안은 쓰러진 세미르를 데리고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와 동시에 시안이 뒤쪽으로 소리쳤다.

“지금이야!!!”

시안의 외침에 저 멀리서 신기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영지민들을 대피시키고자 자리를 떠난 한스.

한스와 그레이슨이 영지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신기전을 끌고 온 것.

키이이이이잉···!

도합 6대의 신기전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동이 터져나왔다.

푸슈슈슈슈슉!!

이윽고 신기전에서 불꽃이 터져나오며 장전된 화살을 모조리 하늘로 쏘아보냈다.

루벤의 하늘을 뒤덮는 새까맣게 화살의 소나기.

그것은 레아의 어둠을 막고 있던 누르비아를 향해 정확히 쏟아져내렸다.

콰콰콰콰콰쾅!!!!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땅이 크게 떨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진한 먼지 구름.

신기전 6대의 화력은 누르비아가 있던 일대를 초토화시켜버렸다.

저 화력을 버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건만.

【크학···!】

먼지 안개 속으로 누르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르비아는 지금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낱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일 뿐이었다.

한없이 나약하고 나약한 인간.

그런데 자신에게 대적하는 저 군단장급의 원귀는 무엇이며.

이 끔찍한 화살 소나기는 또 무엇인가.

무엇보다 자꾸만 광기를 흩어버리는 저 인간.

저 인간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크하학···!】

누르비아의 입가로 끈적한 피가 쏟아져내렸다.

본연의 힘이었다면 이깟 놈들 아무것도 아니었건만.

그릇의 방해도 방해였거니와 현신 또한 완전하지 않았다.

완전한 현신을 위해서는 그것을 찾아야 하건만.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감히!】

화아아아아악!!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터져나온다.

다시 한 번 대지가 검게 물들며, 검은 꽃이 만개하듯 대지가 심연에 삼켜진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엑───!!

다시금 튀어나오는 혼돈의 마물들.

【모두 죽여주마!】

누르비아의 광기가 공간 가득히 터져나갔다.

하지만 루벤의 병사들은 되려 투기를 끌어올렸다.

“놈들이 영주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해라!”

“충!”

콰직!

퍼서석!

병사들은 마물들을 상대로 다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여기서 몸을 추스리고 계세요. 한스! 세미르 족장님을 부탁해!”

시안은 만신창이가 된 세미르를 안전한 곳에 눕혔다.

그리고는 곧장 검을 치켜들며 누르비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터져나오는 마기의 힘.

그것은 소름끼치는 힘을 담고 있었으나.

“크학!”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에 닿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이 년이!

끼야아아아아아아악!!

아마 레아가 없었다면 진즉에 상황은 끝났을 터.

시안은 레아와 함께 누르비아와 대적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드워프들.

마물들과 싸우던 드워프들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물러서지 마라!”

“우리가 물러서면 루벤이 위험하다! 끝까지 싸워라!”

병사들은 쏟아지는 마물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실로 경이롭기까지한 병사들의 전투.

그러나 몰려오는 혼돈의 마물들은 끝이 없었다.

죽여도 심연의 대지에서 또 다시 기어올라왔다.

반면에 병사들은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다.

언제고 그 한계를 맞이할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머지 않았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저 여인이 족장, 세미르가 기다리던 그때의 여인인 것은 놀라웠다.

그러나 이제 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여인은 이제 헬렌이 아니라 누르비아였으며 ‘끔찍하다’ 라는 말로도 부족한 악마였다.

여기에 있는 모든 이가 한데모여 대적한다해도 이길 수 있을까.

글쎄.

드워프들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아니, 이미 고개를 젓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

드워프들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헬렌은 악마에게 삼켜졌다.

자신들의 부족들은 지금 악마에게 삼켜지기 직전이었다.

끝이다.

드워프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지금 이 광경은 이 어둠의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맞이해야만 하는 최후.

살고자 발악을 해왔지만 결국 발악이었던 것뿐이었다.

이러한 파멸은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포기하지 마라! 끝까지 싸워라!”

저 병사들은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

드워프들은 인간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아직 싸울 수 있으십니까.”

옆에서 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카스라고 했던가.

지난 날 드워프 마을에서 치료를 해주었던 인간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루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싸우실 수 있으시면 뒤 쪽의 저희 영지민들을 부탁드립니다.”

루카스는 어느새 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기에 드워프들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의미가 없네···.”

바라본 시선.

그곳엔 크마루가 시선을 떨구고 있었다.

“이길 수 없네. 설령 마물들을 막아낸다 하더라도 저 악마는···.”

“압니다.”

그 순간 루카스가 크마루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그럼 대체 왜···.”

루카스가 세미르를 한 번 바라봤다.

어떤 의지가 느껴지는 표정.

“싸우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라고?”

“지금 영주님께서 싸우고 계시지 않습니까.”

루카스가 시선을 들어보였다.

그렇게 따라간 시선으로 시안이 누르비아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싸우고 있다 뿐.

시안은 누르비아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저 싸움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영주님께서 쓰러지지 않는 한. 루벤 또한 무너지지 않습니다.”

루카스의 두 눈에는 어떤 확고한 믿음이 깃들어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루카스 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싸우고 있는 루벤의 병사들.

“물러서지 마라! 단 한 놈도 영주님께 내보내서는 안된다!!!”

“으아아아아아!!”

그들 또한 루카스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

크마루를 비롯한 드워프들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일말의 희망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그런데 대체···.

대체 저 시안이라는 자가 무엇이길래.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러한 믿음을 보낸단 말인가.

크마루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와 함께 모든 드워프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이 다시금 누르비아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악의가 피어오른다.

꽈꽝!

누르비아의 가벼운 손짓과 함께 주변이 박살난다.

검격이 소멸되었다.

흐드러진 어둠이 공간을 잠식해가며 시안을 덮쳐왔다.

“크하학···!”

온몸이 박살날 것만 같은 충격.

시안은 끝내 저 멀리, 허공을 날아갔다.

-시안!!

레아가 고함을 지르며 누르비아에게 달려들었다.

소름끼치는 사념이 누르비아를 덮쳐간다.

쩌엉─!

그러나 누르비아는 가볍게 레아의 사념을 흩어버렸다.

레아는 계속해서 사념을 쏘아보냈지만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함을 시안을 알 수 있었다.

시야가 흐릿해진다.

이길 수 없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악마 7군주 중 하나인 존재.

비록 지금은 제 본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만일 그러했다면 저항할 틈도 없이 끝장났을 터.

그러나 그 마저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현재 시안의 수준으로는, 이길 수가 없다.

끝이다.

여기서 루벤은 무너진다.

그렇게 발악을 해왔건만··· 발악은 결국 발악일 뿐이었나보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혹시 카일이라면 가능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시안은 카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카일처럼 할 수 없었다.

카일의 뒤를 쫓아가고 있으나 그 까마득한 경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현재의 시안이 최대한으로 닿을 수 있는 수준은 0.08%.

심지어 초급 진행률에서의 0.08%였다.

그 이후의 경지와 비교한다면 아마 비교조차 불가능하리라.

까마득해도 너무도 까마득했다.

시안과 카일의 격차는.

시안은 카일의 검을 본 적이 있었다.

궁극의 무(武).

그것은 가히 그렇게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시안은 궁극의 무(武)를 두 눈으로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렇기에 닿을 수가 없다.

사아아아···.

일순간 풍경이 바뀌며 눈앞으로 카일의 모습이 보였다.

환각일까, 당연했다.

카일은 천 년전의 인물.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리가 없었다.

그러나 시안은 분명한 카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카일은 긴 은발을 휘날리며 서있었다.

붉게 물들인 전장.

카일의 주변으로 셀 수 없는 악마들이 널브러져있었다.

카일은 그런 악마들의 위에 고고히 서있었다.

세상 전체를 오시하듯, 카일은 그렇게 서있었다.

이윽고 카일의 검이 움직인다.

그것은 지난 날, 시안이 상급 패키지의 현질을 통해 보았던 것과 같았다.

닿는 모든 것들을 찢어발기는 괴악한 위력.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기나긴 대륙 역사상 유일무이한 존재.

최강의 아르나이즈.

닿을 수 없다.

지금의 시안으로서는 저 너머에 있는 카일에 닿을 수가 없었다.

닿으려고 하는 그 시도조차.

오만하고도 또 오만한 생각이었다.

시안은 그런 카일에 닿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카일이 보인 검술 또한 제대로 시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만.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만.

자신을 따르는 영지민들.

저기 저 목숨을 걸고 싸우는 병사들.

악착같이 자신을 지키려는 레아.

걱정되어 차마 도망치지 못하고 있는 아멜리아와 엘리.

자신을 믿고 있는 루벤의 사람들.

그들을 위해서라도 딱 한 번만.

온전히 펼칠 수는 없다고 해도.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다고 해도.

두 번 다시는 할 수 없다고 해도···.

그 순간.

카일의 검이 멈추었다.

이윽고 카일이 돌아본다.

환각에 불과한 카일이었건만.

카일의 두 눈빛이, 시선이.

시안을 바라본다.

그리고.

해봐라.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의 목소리였을까.

모르겠다. 알 수도 없다.

다만 바라본 카일은, 환각 속의 카일은.

무덤덤히 시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사아아아···.

환각이 흩어진다.

그리고.

콰콰콰콰콰콰콰콰···!!

시안의 검 끝에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흠칫!

누르비아는 일순간 느껴지는 기운에 몸을 크게 떨어보였다.

그리고 그 기운의 존재를 마주 바라봤을 때.

【너···! 너···!! 너···!!!】

누르비아의 표정에 ‘경악’이라는 감정이 뚜렷하게 새겨졌다.

말도 안된다. 말도 안된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위압감.

착각이 아니다.

이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르비아가 광기의 마력을 쏘아보냈다.

-어딜···!

【꺼져라 사령!!】

터져나오는 광기에 레아가 저 멀리, 날아간다.

레아조차 감당할 수 없는 흉측한 광기.

콰가가가가가각!

광기의 마력이 시안을 덮쳐갔다.

시안은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안은 카일이 아니다.

재능도 처참하기 그지 없어서 기사가 될 수도 없었다.

만일 카이와 듀라크가 마혼수라검을 배웠다면 지금의 시안보다 더 앞서 나갔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시안은 카이와 듀라크 또한 아니었다.

시안은 분명 카일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상상이 되질 않았다.

최강의 아르나이즈.

엑시드(Exceed), 그 너머의 경지.

그 까마득한 경지에 다가서는 그 날이, 그런 자신의 모습이.

솔직히 시안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닿았다.

너무도 미약하지만.

아니, 미약이라는 말도 민망할 만큼의 초라한 무엇이지만.

분명.

번쩍!

무언가에 닿았다.

시안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두 눈빛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일렁였다.

강력한 억제력이 시안의 몸을 붙들었다.

닿을 수 없는 경지에 닿고자 한 대가.

그러나 시안은 전신을 억누르는 힘을 끊어내며 억지로 검을 휘둘렀다.

꽈드드드득.

부하가 걸린 관절이 끊어졌다.

전신의 근육이 찢어진다.

그러나 무시했다.

대신 더없는 마기를 끌어모았다.

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시안은 고개를 털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꽈드득, 시안은 검을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불가능한 일이야.’

머릿속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것은 역병처럼 급속도로 확산된다.

그러니 생각을 지운다.

‘감당할 수 없어.’

가슴 한 켠에서 해낼 수 없다는 불안감이 떠오른다.

그것은 시안의 정신을 붙잡고 늘어진다.

시안의 전신으로 흉측한 어둠이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악(惡)과는 달랐다.

광기와도 달랐다.

마(魔).

그 본연의 힘.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피어나는 모든 어둠과 광기가 굴복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세상 만물로 하여금 복종을 강요한다.

“제 1식(第 一式).”

내딛는 발걸음.

누르비아가 뒷걸음질 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누르비아가 손을 들어 닥치는 대로 광기를 터트린다.

그러나 사라진다.

피어난 광기도.

드리우는 악(惡)도.

끝내 태어난 본질, 마(魔)로 돌아가 환원된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어떻게 네가···! 어떻게 네가···!!!!!】

누르비아의 얼굴에 끝내 공포라는 감정이 피어오른다.

천 년전.

그 어떤 악마조차 범접할 수 없었던 악마들의 악몽.

누르비아가 다시 뒷걸음질 친다.

그 사이로.

파삭─!

단조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한 문단을 마무리하는 지휘자의 손짓처럼.

너무도

“수라천살(修羅天殺).”

단조로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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