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62화 (62/322)

§ 62화 - 엘란두르 후작가(2)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택 안 쪽으로 들어간 병사가 누군가와 함께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한 복장의 노인.

다름 아닌 엘란두르 가문의 총관, 레리트였다.

당연히 시안이 가문에 있을 적에도 안면이 있던 사람이었다.

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뭐, 보다시피요.”

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리고는 딱히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럴 이유를 못 느꼈으니까.

저래 보여도 레리트는 이사벨의 최측근이었다.

말 그대로 오랜만에 만났다 뿐이지.

굳이 살갑게 대할 사이가 아니었다.

그걸 레리트 또한 모르지 않았기에 별 다른 말을 해오지 않았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시안은 레리트를 따라 엘란두르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

저택 바깥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저택 안 쪽 또한 시안의 기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장식품들의 배치가 달라졌다 정도?

솔직히 이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솔직히 장식품들의 배치를 눈여겨 본단 말인가.

물론 저택을 관리하는 이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시안은 아니었다.

그렇게 기억과 다르지 않은 저택 안.

시안은 레리트를 따라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복도를 걸을 때마다 저택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대부분 레리트를 보고 고개를 숙여보였지만,

일부 시안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저분··· 시안 도련님 아니신가?”

뒤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치?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루벤으로 떠나시지 않으셨나···?”

저들 딴에는 안 들리게 끔 작게 중얼거렸지만.

본디 본인의 이름은 북적이는 소음 속에서도 천둥처럼 들려오는 법.

“어째서 다시 돌아오신거지?”

시안은 숙덕거리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뭐, 궁금할 법도 하니까.

애초에 시안 본인부터가 궁금했다.

대체 왜 듀라크가 불렀는지.

물론 저들은 듀라크가 불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시안이 그려러니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레리트는 아니었나보다.

“누가 저택에서 엘란두르의 이름을 언급하라고 했지?”

앞서 가던 레리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저희도 모르게 그만···!”

그러자 숙덕거리던 시녀들이 기겁을 하며 놀라보였다.

레리트는 성큼,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비록 시안이 사생아라고는 하나.

시안은 엘란두르의 이름 가진 자였다.

사용인들이 함부로 언급해서는 안되는 존재.

그렇기에 레리트가 한 마디 한 것이었는데···.

“저택에서는 눈을 감고 귀를 막으라 일렀거늘. 정녕 눈을 뽑고 귀를 잘라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저건 좀 너무 나간 듯 싶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시녀들이 바닥으로 넙죽 엎드렸다.

물론 정말로 눈을 뽑고, 귀를 자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건 과한 정도가 아니라 심했으니까.

하지만 강도 높은 벌을 받기는 할 것 같았다.

시안이 가문에서 있을 적에도 이러한 일들이 종종 있었다.

어쨌거나 이대로 가만두면 확실히 일을 치르긴 할 것 같았다.

“그러지 마시지요.”

시안은 한 발 나서며 레리트를 말렸다.

“저는 딱히 신경쓰고 있지 않습니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총관께서도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런데 솔직히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

시안은 굳이 저렇게 한 마디까지도 해야하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이 시안을 욕 했나 뭘 했나.

그냥 떠나갔던 시안이 갑자기 다시 돌아왔으니,

그게 궁금해서 ‘무슨 일인가···.’ 저들끼리 숙덕거린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걸로 눈을 뽑고, 귀를 자른다니.

물론 정말 그러지는 않을테지만 그래도 좀 심하지 않은가.

제국에서 귀족 모욕죄는 중한 죄였으나.

말했다시피 모욕한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시안이 정말 신경쓰고 있지 않은 것이.

루벤의 영지민들은 매번 시안을 두고 숙덕거렸다.

물론 나쁜 의미로 숙덕거리는 것은 아니다만.

그건 지금 이들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루벤의 영지민들이 숙덕거린다 뿐인가?

축제에선 영지의 병사, 두라스가 시안을 놀리듯 흉내를 내기도 했었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두라스는 사지를 절단해야했다.

“이들은 엘란두르의 이름을 함부로 올렸습니다. 마땅한 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레리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이놈의 엘란두르는 변한 게 없었다.

“괜찮으니 그냥 넘어가시지요.”

시안은 계속 괜찮다 말렸지만,

그럼에도 레리트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모습이 어딘가··· 시안을 무시하는 기색이 들어있었다.

그때서야 시안은 레리트의 숨은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쩐지 과하게 나선다 싶더라니.

시안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제가 괜찮다고 분명 말씀드렸습니다만. 총관께서는 지금 제 말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

돌변하는 시안의 모습에 레리트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안의 표정.

그러나 레리트는 시안에게서 어떤 위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눈치만 보던 사생아.

능력이라고는 하나 없는 천하의 둔재.

레리트의 기억 속 시안은 이렇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시안이 강경하게 나올 줄도 몰랐다.

과거 시안은 이런 일에 대해 그냥 우물쭈물하다가 기가 죽어버리곤 했었으니까.

그러니 지금도 그랬어야만 했다.

비록 달라졌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솔직히 그래봤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물론 시녀들의 잘못이 있었으나,

괜찮다는 시안의 말을 무시하며 억지를 부린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시안의 말을 무시했다 함은 곧 엘란두르를 거역한 일.

시녀들의 잘못보다 레리트의 잘못이 더 크다 할 수 있었다.

시안은 그 부분을 지적하듯 담담히 레리트를 바라봤다.

레리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시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시녀들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간다만 다음 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항상 주의하도록.”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안 도련님.”

시녀들을 행여 또 책이 잡힐 까.

후다닥,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가시죠.”

“······”

레리트는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르다.

예전의 시안과 너무도 다르다.

정녕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레리트는 저도 모르게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시안 엘란두르는 없다.

무능력하고 눈치만 보던 시안도 없다.

지금의 시안은···.

“뭐하십니까?”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

레리트는 떠오르는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

시안이 시녀들을 위해 나섰다.

이 해프닝과도 같은 일은 빠르게 저택 전체로 퍼져나갔다.

물론 사건 당사자였던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방금 전 입을 함부로 놀리다 일을 치를 뻔 했거늘.

얼마나 지났다고 또 입을 놀리겠는가.

그러나 엘란두르 저택에는 그 둘을 제외하고도 사용인들이 상당히 많았고.

돌아다니다 우연찮게 그 광경을 목도한 사용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소문은 그런 이들에 의해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시안 도련님이 총관님을 크게 혼내셨다는데?”

“정말? 왜?”

“사용인들을 너무 과하게 닥달하신다고.”

물론 소문이야 퍼지다보면 조금은 변형되기 마련.

그러나 전체적인 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 우연찮게 멀리서 그 장면을 봤거든? 정말 시안님이 총관님을 혼내시는데··· 나, 솔직히 좀 감동한 거 있지.”

“얘는. 네가 왜 감동해?”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시안 도련님쯤 되면 우리같은 사람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막말로 천한 것들인데. 그렇게까지 나서실 이유가 뭐가 있어.”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도 굳이 그렇게 나서시는데··· 그간 받은 설움이 막 북 받치면서 순간 시안 도련님 전속 시녀 하고 싶은 거 있지?”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며 지내온 나날들.

아무리 명망 높은 귀족가라 한들.

귀족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지 않은 사용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이 기집애가. 망나니라고 소문난 분인데, 그러다 무슨 일을 당하려고?”

“응? 아, 넌 시안 도련님이 떠난 뒤에 들어와서 모르겠구나. 시안 도련님은 사실 망나니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실은···.”

그렇게 시안에 대한 소문은 저택 전체로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문의 당사자.

“불러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야.”

시안은 저택에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따분하게 방 안에 앉아있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듀라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단다.

엘란두르의 가주, 듀라크.

워낙에 공사다망한 사람인 것이야 알고 있었다지만.

먼저 불러놓고 자리를 비우는 건 당최 무슨 경우란 말인가.

금방 돌아온다고는 한다지만···.

“에휴.”

뭐 어쩌랴.

그렇다고 이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듀라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물론.

“이렇게 된 거 둘러볼 곳 좀 둘러봐야겠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시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칵, 방 문을 열자.

문 앞에서 대기 중인 시녀 몇몇이 화들짝 놀라보였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그리고 물어오는 자세가 꽤나 적극적이었다.

과하게 초롱초롱한 눈빛이 무엇이든 말만 하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말 그대로 정말 말만 하면 뭐든 다 해줄 것 같았다.

‘왜 이래?’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잠시 저택을 좀 둘러보려고.”

“아···.”

시녀들이 아쉬운 듯 탄성을 내뱉으며 다시 물어왔다.

“혹시 안내가 필요하신가요?”

“아니. 괜찮아.”

시안은 고개를 저었다.

루벤보다 더 오랜 세월을 이곳 저택에서 살아왔는데 안내는 무슨.

그걸 시녀들이라고 모르지 않았기에.

딱히 더 물어오지는 않았다.

“어디 가신다고 알고 있으면 될까요.”

“하얀 늑대 기사단을 보러 간다고 해줘.”

시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하얀 늑대 기사단(White Wolf Orders).

엘란두르 후작가 소속의 기사단이자.

황가의 로열 나이츠와 쌍벽을 이루는 제국 제일의 기사단이었다.

그리고 시안이 그곳으로 향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루벤도 슬슬 기사단을 만들어야 하니까.’

현재 시안의 숱한 현질로 인해 몇몇 이들이 기사 수준에 닿은 상황이었다.

기사 사관 학교 Lv.1도 만들었겠다.

업적 달성으로 A등급 오러 연공법도 현질할 수 있겠다.

루벤도 이제 번듯한 기사단을 만들 때.

하여 대륙 제 1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

이 하얀 늑대 기사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이왕 엘란두르에 온 것.

참고할 건 죄다 참고하면 나중에 현질할 때 충분한 가이드가 되어줄 터.

시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 질렀다.

그렇게 도착한 하얀 늑대 기사단의 연무장.

캉! 카캉!

“검 끝이 흔들리지 않는가! 다시!”

챙!

그곳엔 많은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혼자 수련하는 이들은 물론.

서로 간의 대련을 하는 이들까지.

그리고 보아하니···.

수련하는 이들 대부분이 견습 기사들인 것 같았다.

하지만 견습 기사라 하더라도 유저(User) 중급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엘란두르가 아니면 실력 있는 기사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엑스퍼트(Expert) 이상의 실력자들만이 입단할 수 있는 하얀 늑대 기사단.

이곳에서는 견습 기사 수준이었다.

하여 말만 견습 기사이지 사실상 기사나 다름 없는 이들이었다.

“살벌하네.”

그래서인지 저게 수련인가 싶을 정도의 기운들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모습을 발견한 기사들.

일순간 기사들의 시선이 시안에게로 집중되었다.

“시안··· 도련님?”

“어째서 여기에?”

기사들은 저마다 의문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의 의문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아니, 이게 누구신가.”

시안의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시안은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내쉬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으니까.

천천히 등을 돌려 바라본 그곳.

아니나 다를까.

“우리 동생님 아니신가.”

엘란두르 가문의 셋째이자 차남.

그리고 시안의 형인 네이슨 엘란두르가 시안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흥건히 젖은 머리가 네이슨도 마침 수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수련을 하고 있던 건지.

아니면 견습 기사들을 가르치고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네이슨은 시안 앞에 서보였다.

시안은 골치 아픈 감정을 감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시 뵙습니다.”

“그래, 다시 보는 구나.”

네이슨은 곧 시안의 앞에 서보였다.

어느덧 기사들은 휘두르던 검을 멈춘 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시안과 네이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택으로 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일이 있어서 잠시 저택에 들렀습니다. 그러다 잠시 시간이 남아 기사단 구경이나 할까 하여 왔습니다.”

“구경? 하얀 늑대 기사단을 말이냐?”

그리고는 피식, 웃는 네이슨이었다.

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련에 방해되지 않게 알아서 구경할테니. 저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이만.”

시안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나.

네이슨이 그런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님을 만났는데 그리 급하게 가면 쓰나.”

“수련 중이신 것 아니었습니까?”

“수련은 무슨. 견습 기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고 있었다.”

네이슨은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

견습 기사들을 충분히 가르칠만한 이였다.

이윽고 네이슨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떠냐. 기사단을 구경 온 김에 이 형님과 간단하게 몸을 풀어보는 것이. 내 친히 너에게 한 수 지도해주마.”

딱 봐도 아니, 누가 봐도.

건국일 행사에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모습이었다.

솔직히 네이슨은 마주칠 때부터 저럴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앵겨붙을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떤 핑계를 대며 앵길지가 의문이었는데.

핑계는 개뿔.

저건 그냥 대놓고 복수하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싫습니다.”

그렇기에 시안은 고민할 것도 없이 단번에 거절했다.

당연히 시안은 저 놀음에 응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시안이 단호하게 거절할 줄은 몰랐던 걸까.

“그때 카이 형님이 개입해서 결판을 내지 못했기도 했거니와··· 뭐?”

되려 네이슨이 크게 당황해보였다.

아마 네이슨도 시안이 핑계를 댈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핑계댈 게 뭐가 있겠는가.

하기 싫으면 안하면 그만이지.

“안합니다. 제가 뭐하러 형님과 대련을 합니까. 저 지금 할 거 있어서 바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듀라크가 돌아오기 전까지 하얀 늑대 기사단을 둘러봐야만 했다.

연무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들.

그 모든 것들을 둘러보려면 대련 같은 걸 할 시간이 없었다.

괜히 시간 낭비였다. 시간 낭비.

“······”

네이슨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설마 지금 꽁무니를 빼는 것이냐?”

“네.”

“무릇 기사라면 가리지 못한 승부를··· 뭐라고?”

다시 한 번 벙찌는 네이슨의 표정.

그런데 아까부터 승부를 가리지 못하긴 뭘 못해?

오러를 사용한 순간 네이슨의 패배였지.

하지만 굳이 따져봤자 입만 아플 뿐이었다.

“꽁무니 빼는 거 맞습니다.”

“그게 무슨···.”

“그때 승부를 가리지 못한 것 때문이라면 제가 졌습니다. 형님의 승리라 동네방네 소문 내셔도 됩니다.”

시안은 그렇게 거침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네이슨은 그런 시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을 이겼다고 소문내기는 뭘 소문 낸단 말인가!

시안은 비기너의 경지도 에도 들지 못한 천하의 둔재.

반면에 자신은 엑스퍼트 중급의 경지였다.

애초에 수준을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그런 시안에게 패배했음에 얼마나 분을 참지 못했었는가.

그렇기에 이건 일종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안이 저런 식으로 나오면···.

시안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대련 같은 걸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네가 그러고도 엘란두르더냐?”

그러자 다시 들려오는 네이슨의 말.

아니, 얘는 왜 이렇게 질척거려?

“꽁무니 빼면 엘란두르가 아니게 되는 겁니까? 좋네요. 그럼 오늘부터 엘란두르 안 하겠습니다. 그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언제부터 엘란두르 취급을 해주었다고?

시안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이, 이이···!”

그러자 뒤에서 네이슨이 부들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날 이기면 10만 골드를 주도록 하지.”

우뚝.

걸음을 내딛던 시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바라본 시선.

그곳엔 씨익, 미소를 짓고 있는 네이슨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걸렸다!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연회장에서의 도박을 떠올린 듯 싶었는데···.

“허나 이번에는 오러를 사용하겠다. 대신 한 손은 여전히 쓰지 않도록 하지.”

네이슨은 어찌할 것이냐는 듯 시안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시안을 바라보기도 전에.

“50만.”

흥정 따위는 없다는 듯한 단호한 시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아니면 안 합니다.”

#

지난 연회장에서처럼 대련은 금방 이루어졌다.

장소만 다르다 뿐.

거의 모든 것이 똑같은 상황.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두 가지였다.

견습 기사들의 판돈이 없다는 것.

그리고 네이슨이 오러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네이슨은 지난 연회장에서 시안의 검이 갖는 위력을 겪었다.

오러의 힘을 발휘하는 신묘한 검.

그걸 알고 있는 이상 지난 번과 같은 꼼수는 통하지 않았다.

“선수를··· 아니, 오러를 사용하니 두 수를 양보하마. 마음 껏 해봐라.”

“뭐,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시안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네이슨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것 같았다.

뭐, 그럴 만도 했다.

연회장에서의 시안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숱한 현질로 인해 루벤은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시안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첫째는 시안이 마혼수라검의 입문을 넘어 초급 과정을 배우고 있다는 것.

둘째는 마혼제법의 마기를 다루며 시안이 이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시안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검은 기운을 풍기는 날카로운 검신.

시안은 곧장 마기를 끌어올렸다.

스파아아아아앗!!

그러자 시안의 검에 어둠과도 같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모두 눈을 부릅, 떠보였다.

“오, 오, 오러?!”

“시안 도련님이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그럼 비기너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야?”

저건 분명한 오러였으니까.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르르르르···!!

검에 담긴 오러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나의 검신을 형상화했다.

“오러 소드!!!”

한 기사가 경악스러운 어투로 소리쳤다.

“말도 안돼! 대체 어떻게!!”

“이, 이, 이럴수가!!!”

그와 동시에 연무장 전체가 발칵, 뒤집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러 소드는 오러 블레이드 바로 밑의 경지.

즉, 엑스퍼트 경지에 달한 존재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비기너에 들지도 못했다 알려진 시안이 사용하고 있다?

“네, 네, 네가 어떻게···!!”

네이슨이 거진 놀라 까무러치고 있었다.

물론 시안이 오러 소드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안은 경지로만 따지면 아직 비기너(Begineer)에 불과했다.

이건 다름 아닌 강화를 통한 SS등급의 검이 갖는 힘.

그리고 신장(神匠) 모르크루의 후손, 세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SS등급의 검은 세미르의 역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검.

그야말로 ‘미친 검’이었다.

형상화된 마기의 오러가 일렁인다.

오러 소드보다 조금 더 짙은.

그리고 더 폭발적인.

“자, 잠깐···!”

당황한 네이슨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보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버린 후였다.

쌔액!

어느덧 눈앞까지 다가온 시안의 검.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끔찍한 폭발이 연무장 전체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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