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78화 (78/322)

§ 78화 - 서부의 영웅(2)

바라본 그곳.

그곳엔 시안이 인상을 찡그린 채 막사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우리 서부의 영웅이 아니신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언제 깨어난 건가.”

엘리츠 백작이 두 손을 펴보이며 말했다.

알렉스를 핍박하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맞은 얼굴이 시안을 향했다.

“누구시죠?”

“서부의 엘리츠 백작이라고 하네.”

엘리츠 백작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리고 살짝 놀라는 시안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었다.

백작은 귀족 중에서도 고위 귀족.

그것도 한 지역의 제후라 불리는 이였다.

물론 시안의 엘란두르라는 이름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엘리츠 백작은 결코 가벼이 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안은 아직 작위가 없는 엘란두르의 자제일 뿐.

“백작 각하셨군요. 제가 몰라뵈었습니다.”

시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괜찮네. 모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난 개의치 않으니 신경쓰지 말게나.”

엘리츠 백작은 선선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엘리츠 백작 각하께서 어쩐 일로···?”

“왜겠나. 우리 서부의 백성들을 구해준 영웅이 있다길래 그게 누구인가 궁금해 한달음에 달려왔지.”

엘리츠 백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와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말이네.”

그러면서 엘리츠 백작이 눈을 빛냈다.

그리고 시안과 할 이야기란 다름 아닌 이것.

현재 서부 어디를 가나 시안이라는 이름이 끊이질 않고 들려왔다.

그리고 엘리츠 백작을 비롯한 서부의 귀족들의 이름 또한 끊임없이 들려왔다.

시안과 정 반대의 의미로 말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죽어갈 때 엘리츠 백작과 귀족들은 문을 걸어잠그고 모른 척 했으니까.

그렇기에 대다수 서부의 귀족들은 시안을 안 좋게 보고 있었다.

일부 귀족들은 시안을 해코지 하려는 속셈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츠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거리였으니까.

대체 왜 그런 멍청한 짓거리를 한단 말인가.

현재 서부의 영웅이라 불리는 시안.

이는 충분히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간단한 예로 시안과의 친분.

그것만 얻어도 엘리츠 백작으로서는 상당한 이득이었다.

시안과 엘리츠 백작이 친하다는 소문이 나보자.

그럼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시안의 공적에 엘리츠 백작이 무언가를 도와줬구나.

엘리츠 백작이 마냥 제 살 길만 찾고자 한 것은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시안이 저렇게 친분을 보이지.

역시 우리들 모르게 귀족들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구나.

물론 이렇게 이상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엘리츠 백작에 대한 평가는 완전 달라질 것이었다.

한 마디로 엘리츠 백작은 시안의 명성에 숟가락만 얻으면 되었다.

그리고 뭐 보아하니···.

엘란두르치고 꽤나 어벙해보이는 것이 딱 이용해먹기 좋아보였다.

귀족들의 세계란 원래 이런 것이었다.

귀족의 의무?

귀족으로서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책임?

그런 건 아무것도 모르는 치들이나 지껄이는 소리였다.

물론 엘리츠 백작도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숟가락을 얹기 위해서는 밥값 정도는 지불해야했다.

그러니 시안에게 적당한 대가를 건네준다.

엘리츠 백작은 시안에게 살짝 눈짓을 해보였다.

알만한 사람들은 알만한 신호.

그런데 염병.

“뭡니까? 왜 갑자기 제게 눈을 찡긋거리는 겁니까?”

시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벌레 보듯이 엘리츠 백작을 바라봤다.

엘리츠 백작은 순간 울컥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역시 서부의 영웅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새파랗게 어린 귀족가의 도련님일 뿐.

귀족가의 생리를 잘 모르는 듯 싶었다.

마음 같아선 제후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엘란두르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쉬운 쪽은 이쪽이었다.

엘리츠 백작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내가 언제 눈을 찡긋 거렸다고 그러나. 눈에 잠시 먼지가 들어가서 그런 거라네.”

“아 어쩐지. 갑자기 눈을 찡긋거리실래, 설마 제게 이상한 마음이라도 품으신 건가 싶었습니다.”

저 새끼가 진짜···.

엘리츠 백작은 속으로 이를 까득, 깨물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속으로만 삭힐 뿐.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하하하. 역시 영웅답게 농담도 호쾌하군. 아무튼, 괜찮다면 자네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은데··· 혹시 뭐 필요한 거라도 있나? 우리 서부의 영웅께서 필요한 거라면 얼마든지 줄 의향이 있네만.”

“오?”

엘리츠 백작이 조금 대놓고 말을 꺼내자 그때서야 시안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엘리츠 백작의 의도를 눈치챈 듯 싶었다.

진짜 이렇게까지 했는데 모른다면 그건 머리에 문제가 있는 거였다.

“그럼 제가 돈이 좀 부족한데··· 혹시 얼마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안이 슬쩍, 말을 꺼냈다.

역시.

엘리츠 백작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시안도 똑같은 귀족이었고.

똑같은 부류였다.

물론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놓고 요구해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아닌 돈을 요구할 줄도 몰랐다.

그래도 뭐. 상관 없었다.

이러면 말이 쉬워지니까.

솔직히 귀족의 의무니 뭐니.

청렴이라는 꼴깞을 떠는 가식적인 놈들보다는 훨씬 나았다.

“얼마든지 말만 하게. 알다시피 서부는 상업으로 발달한 지역이라 돈이 꽤 있거든.”

“오.”

시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엘리츠 백작은 씨익, 웃음을 지어보였다.

시안이 얼마를 부르든 그 이상을 챙겨줄 수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많이 불러봤자 100만 골드 정도─.

“그럼··· 3천만 골드 어떠십니까.”

“······?”

엘리츠 백작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방금 뭐라고 한 거지??

3천만? 300만이 아니라?

“그 무슨 말도 안되는···.”

“어라? 안 되십니까?”

“당연하지 않나!”

“에이, 방금은 다 줄 것처럼 말씀하시고는. 그럼 저도 할 말 없습니다.”

시안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엘리츠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든지 주겠다고 한 건 사실이나 그래도 어느 정도가 있었다.

상식 수준에서 가능한 선이.

3백만 골드라면 또 모를까.

3천만 골드는 아무리 엘리츠 백작이라도 불가능했다.

여기 모인 서부 제후들을 물론.

서부 귀족들의 기둥을 전부 뽑아야 가능하려나.

아무리 시안이 멋도 모르는 새파랗게 어린 귀족이라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엘리츠 백작의 말에 시안이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일까.

방금 전까지 어리숙한 놈팽이는 온데간데 없었다.

바라보는 시선.

지금 시안에게서 좌중을 휘어잡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부의 제후라 불리는 엘리츠 백작이었건만.

엘리츠 백작은 저도 모르게 시안이라는 사람에게 압도되었다.

“설마요. 얼마든지 말하라는 건 백작 각하셨습니다만?”

시안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 말에 엘리츠 백작은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시안은 알고 있었다.

어리숙한 놈팽이?

새파랗게 어린 귀족가 도련님?

천만에.

시안은 처음부터 엘리츠 백작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런 말을 지껄이는 이유는 하나.

저 말은 즉.

너와는 애초에 할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책임질 수 있겠나?”

엘리츠 백작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역시나.

“물론이죠.”

엘리츠 백작의 짐작대로 시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시안은 가만히 엘리츠 백작을 바라봤다.

서부를 휘어잡은 제후들.

그리고 그들의 수장인 엘리츠 백작.

비록 서부에 드리운 위기에 안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이들은 여전히 서부를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로열 나이츠의 단장인 알렉스조차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고.

시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엘란두르의 힘을 빌린다면 모를까.

고작 루벤이라는 영지 따위로는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현재 시안은 엘란두르의 힘을 빌릴 수가 없었다.

애초에 빌릴 생각도 없었고.

그렇기에 적당히 타협을 보아 엘리츠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자 처세였다.

그리고 아마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터.

그럼에도 시안은 엘리츠 백작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저도 묻겠습니다. 백작 각하께서는 지금 이 행동을 책임질 수 있으시겠습니까?”

엘리츠 백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명백한 도발.

그런 시안의 말에 서부의 귀족들은 물론.

알렉스까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건방진.”

엘리츠 백작이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사람 좋았던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은 싸늘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서부의 영웅이라 칭송해주니,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제가 서부의 영웅이라 불리고 있었습니까? 제가 기절했다가 방금 깨어나서 잘 몰랐습니다.”

엘리츠 백작이 시안을 노려봤다.

시안은 그런 엘리츠 백작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천하의 망나니라 하더니.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군.”

시안은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여보였다.

“오늘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지.”

엘리츠 백작이 등을 돌렸다.

비록 그 위세가 잠시 꺾였다고는 하나.

엘리츠 백작은 서부를 휘어잡는 제후들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시안이 서부의 영웅이라 불린들.

서부에서는 엘리츠 백작의 권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들어올 터.

시안으로서도 꽤나 출혈을 감수해야만 했다.

해서 이걸 어찌해야하나···.

싶은 바로 그때였다.

“되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군.”

갑자기 한 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기사다아안 도열!!”

주변으로 크나큰 외침이 터져나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일련의 기사들이 도열하며 하나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 갑옷에 새겨진 휘황찬란한 황가의 문양.

“······!!!”

엘리츠 백작의 두 눈이 찢어질듯 떠졌다.

저 문양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단은 단 한 곳밖에 없었으니까.

로열 나이츠(Royal Knights).

물론 이곳 게른 영지의 막사에도 로열 나이츠가 있었다.

알렉스가 이끄는 제 7기사단.

그러나 지금 도열하는 로열 나이츠들은 제 7기사단이 아니었다.

로열 나이츠 제 2기사단.

수많은 로열 나이츠들이 주변을 장악했다.

그 광경에 비단 엘리츠 백작 뿐만 아니라.

서부 제후의 귀족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눈을 부릅, 떠보였다.

그리고 그런 충격 사이로.

터벅. 터벅.

한 사내가 가로질러 걸어왔다.

“충!!”

“충!!”

“충!!”

그럴 때마다 도열한 로열 나이츠의 군례 소리가 울려퍼져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존재.

그는 멋드러진 금발과 존재만으로도 위엄이 흘러나오는 한 사내였다.

또한 여기 있는 이들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존재.

콘라드 폰 샤를롯.

샤를롯 제국의 황태자이자.

제국의 2인자.

‘응? 전하께서 갑자기 여길 왜?’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듣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방금 기절했다가 깨어났는데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슬쩍, 고개를 돌리자 알렉스도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알렉스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눈앞에 보이는 존재는 분명한 황태자 콘라드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시안이 가장 먼저 콘라드에게 예를 표했다.

그 뒤를 이어 알렉스가 차렷 자세로 꼿꼿히 서보였고.

뒤늦게 엘리츠 백작을 비롯한 서부의 귀족들이 예를 표했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콘라드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서부에 오면서 참으로 재미난 이야기 듣고 왔는데···.”

그리고 들려오는 콘라드의 중얼거림.

이윽고 콘라드가 무릎을 꿇고 있는 엘리츠 백작 앞에 서보였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엘리츠 백작?”

엘리츠 백작은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엘리츠 백작의 볼 위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엘리츠 백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엘리츠 백작이 서부를 쥐락펴락하는 제후라고는 하나.

콘라드는 무려 황태자.

제국의 2인자였다.

감히 어찌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

머리 위로 콘라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

콘라드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이윽고 콘라드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예일 경.”

“하명하십시오 전하.”

콘라드의 부름에 강직한 인상의 기사가 다가왔다.

로열 나이츠 제 2기사단의 단장, 예일.

콘라드의 직속 기사단이자 무려 마스터(Master) 중급에 이르는 실력자였다.

제국 제 1의 검이라 함은 명실상부 듀라크 엘란두르였다.

그러나 제국 제 2의 검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분분했다.

여러 쟁쟁한 실력자가 많기 때문.

그리고 예일은 그 분분한 의견 속에 항상 포함되는 최상위 실력자였다.

콘라드는 그런 예일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엘리츠 백작을 비롯한 여기 모인 서부의 귀족들을 모두 포박하라.”

“저, 전하!!”

청천벽력같은 콘라드의 말에 엘리츠 백작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바라본 시선.

그곳엔 냉기보다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콘라드가 서 있었다.

이윽고 예일 경이 고개를 숙이며 한 쪽으로 눈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로열 나이츠 기사들이 서부의 귀족들을 향해 움직였다.

“어, 어찌 이런···!”

“이럴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억울합니다 전하!”

서부의 귀족들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했다.

애초에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로열 나이츠의 무력도 무력이었거니와.

당최 누구의 명이라고 저항을 한단 말인가.

엘리츠 백작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저, 전하! 무언가 오해가 있으십니다! 부디 소신의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엘리츠 백작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서부 제후의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었고.

방금 전까지 시안을 향한 위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디 한 번만··· 한 번만 소신의 말을 들어주시옵소서!”

그저 살기 위해 발악을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가 본다면 꽤나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건만.

“오해? 지금 오해라고 했나 엘리츠 백작.”

콘라드의 말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콘라드가 입을 열었다.

“제 추태가 드러날까 내 눈을 가리고 귀를 막은 것이 오해라는 건가?”

“그, 그건···.”

“서부의 백성들이 죽어나갈 때, 의무를 저버리고 문을 걸어 잠근 것이 오해라는 건가.”

엘리츠 백작은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콘라드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로써 제 이득을 위해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이 오해라는 건가.”

“아니면 반성의 기미는 커녕, 다시 한 번 내 눈을 가리기 위해 수작질을 부리려던 것이 오해라는 건가.”

콘라드가 엘리츠 백작을 바라봤다.

그 여느 때보다 싸늘한 눈빛이 엘리츠 백작을 향했다.

“말해보게 엘리츠 백작. 대체 무엇이 오해라는 건가.”

엘리츠 백작은 정말 아무런,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콘라드가 다시 말한다.

“내 눈과 귀를 가린 것은 용서할 수 있다. 반성의 기미를 갖지 않는 것 또한 용서할 수 있다. 심지어 다시 한 번 내 눈과 귀를 막으려는 것 또한 용서할 수 있다. 허나!”

터져나오는 제왕의 위엄.

“백성들의 죽음을 외면한 죄! 백성들이 살라달라 울부짖을 때 그것을 방관한 죄! 그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콘라드가 다시 소리쳤다.

“예일 경! 지금 당장 엘리츠 백작을 포박하라!”

콘라드의 명에 예일이 곧장 움직였다.

“전하!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하!!!”

엘리츠 백작이 발버둥 쳤지만 소용 없었다.

마스터 중급의 예일 경을 어찌할 수 있을까.

“저, 전하!! 전하!!!!”

엘리츠 백작은 끝내 포박되어 끌려갔다.

그렇게 엘리츠 백작을 비롯한 서부의 귀족들이 전부 끌려갔다.

마치 한 차례 폭풍이 지난 것만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정적 사이로 콘라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시안이 있는 곳.

콘라드가 시안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게. 아무리 나라도 서부의 영웅을 이리 홀대해서는 안되지. 하하하.”

다른 사람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하던 콘라드는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은 마치 둘도 없는 절친한 친우를 대하듯.

표정 또한 한없이 선해보였다.

콘라드가 손수 시안의 몸을 일으켜주었다.

바라보는 시선.

콘라드의 눈빛엔 뭐라 설명하기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고마움, 대견함, 놀람, 심지어 일말의 당황까지.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감정은 역시 고마움이었다.

“자네와는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콘라드는 그러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엘리츠 백작과 마찬가지로 콘라드는 시안과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물론 그 의미는 천지차이로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말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어버렸다.

“얼···!”

하지만 정말 가까스로 목구멍 근처에서 틀어막을 수 있었다.

“음? 방금 뭐라고 했나?”

의아해하는 콘라드.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시죠."

시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말할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순간 ‘얼마?’ 라고 외칠 뻔했다는 사실을.

진짜 때려죽여도.

말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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