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서부의 영웅(3)
시안은 콘라드와 함께 막사로 향했다.
다름 아닌 시안이 방금 전에 깨어났던 막사였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서부의 위기가 해결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그 피해가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곳 게른 영지는 가장 먼저 몬스터들에게 휩쓸린 지역.
예전 발전하기 전의 루벤··· 보다는 덜했지만.
그래도 폐허나 다름 없었다.
그나마 깔끔한 곳이 이곳밖에 없었다.
해서 시안은 콘라드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영주님.”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안이 아멜리아에게 사정을 듣고 바로 나간 터라.
아무래도 걱정되어 자리를 떠나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나 아멜리아가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안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신 거예요? 밖이 굉장히 소란스럽···?”
그리고 말을 하던 아멜리아의 고개가 순간 옆으로 기울어졌다.
시안의 뒤를 따라 들어온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멜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안의 뒤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주한 얼굴.
“화, 화, 황태자 전하?!?”
아멜리아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떠졌다.
표정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태자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시안이랑 단 둘이 이곳에 들어오냔 말이다!
제국의 2인자가 대체 어째서?
아멜리아는 이게 당최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끝내.
“아? 아아···?”
아멜리아가 또 고장이 나버렸다.
시안은 그런 아멜리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뭐, 반응을 보아하니.
아멜리아도 콘라드가 오는 줄 몰랐던 모양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서부행은 콘라드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던 모양.
“음? 이 여인은 누군가?”
아멜리아를 발견한 콘라드가 시안에게 물어왔다.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영지민인 아멜리아입니다. 지금은 루벤 브라헤 상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루벤 브라헤? 잠깐, 브라헤라면 혹시···?”
브라헤라는 이름에 콘라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아멜리아의 가문인 브라헤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사 브라헤는 과거 서부의 1인자라는 꿈에 잠깐이나마 다가섰던 대상단.
시안도 가문에 있을 적 브라헤의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물며 황태자인 콘라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멜리아는 브라헤 가문의 영애였습니다.”
“허어··· 몇 년전에 안 좋은 일이 있음은 알고 있었다만. 그 여식이 자네의 영지민으로 있었나?”
이윽고 콘라드의 시선이 아멜리아에게 향했다.
그런데 웬걸.
“아? 아아아??”
아멜리아는 여전히 고장나 있는 상태였다.
시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콘라드에게 말했다.
“아멜리아가 고장··· 아니, 많이 당황한 것 같습니다.”
시안은 슬쩍 아멜리아에게 다가가 그 옆구리를 콕, 찔렀다.
“핫!”
그러자 아멜리아가 번쩍, 고쳐졌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라며 예를 갖추었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뵈, 뵙습니다.”
그 모습이 꽤나 재밌었던 것일까.
“하하하하! 자네를 닮아서 그런가. 영지민들도 상당히 특이하군. 하하하하!”
콘라드가 크나큰 웃음을 터트렸다.
“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되었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니 그리 겁먹지 않아도 되네. 하하하.”
아멜리아의 말에 콘라드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추태를 보인 것이었지만.
콘라드는 그저 이 상황이 유쾌한 것인지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아멜리아.”
“네? 아, 네네!”
시안의 눈치에 아멜리아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막사 밖으로 후다닥, 나갔다.
그런 아멜리아의 모습에 콘라드가 시안에게 물어왔다.
“내가 그리 어려운가?”
“황태자 전하시지 않습니까. 아멜리아가 아니더라도 전하 앞에선 누구나 저럴 것입니다.”
“음···.”
콘라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여보였다.
본인의 위치에 대한 자각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자네는 나를 전혀 어려워하지 않지 않은가. 생각해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던 것 같은데.”
“착각이십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렵습니다만.”
“하하하하!”
콘라드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래서 자네가 마음에 들어.”
콘라드는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 자리하며 시안에게 말했다.
“앉게. 아, 이런. 내가 손님이었지. 여기 앉아도 되나?”
시안은 뭔가 싶었고.
콘라드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시안은 콘라드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자리했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할지 모르겠군.”
콘라드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까 전부터 느낀 것이었지만.
콘라드는 서부의 사정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부가 정확히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왜 자신이 서부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는지.
또한 시안이 서부에서 어떤 일을 해주었고.
만일 시안이 없었더라면 서부가 어떻게 되었을지까지.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 콘라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정말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정말 고맙네. 자네가 아니었으면··· 서부는 끝장이 났겠지. 황가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고맙네.”
콘라드가 진심으로 시안에게 감사를 전했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콘라드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여타부타한 설명을 떠나서.
시안도 압도적인 명분을 쌓기 위해 자원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나서준다는 것.
콘라드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와 더불어.
진심으로 백성들을 위하는 콘라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시다시피 제게도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이 예상보다 잘 풀려 저도 좋은 상황이니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안이 겸양을 내보이며 콘라드에게 말했다.
하지만 콘라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자네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지. 하지만 자네는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았어. 내 듣자하니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무료로 물품을 나눠주었다던데.”
“어···.”
시안은 잠깐 말을 흐렸다.
그리고 이어진 콘라드의 말.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백성들을 위하다니···.”
아무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그래도 서부의 귀족들에게 뜯어낼 생각이었다.
“이 어찌 의무에서만 비롯될 수 있는 행동이란 말인가.”
그런데 콘라드는 정말로 시안이 손해를 감수한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이건···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되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말할 건 말해야했다.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그에 대한 건 내가 충분히 값을 치르겠네. 다시 한 번 고맙네.”
그리고 이어진 콘라드의 말에 시안은 그대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건 제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입을 싹, 닦았다!
시안은 그 어떠한 표정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자네는 정말···.”
그런 시안의 모습에 콘라드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마치 시안 같은 사람이 어딨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
시안은 그런 콘라드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아무리 시안이라도 이건 좀···부담스러웠으니까!
아니, 양심에 찔렸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뭐···.
좋은 게 좋은 것이니까.
그리고 진짜로. 농담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물품을 풀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누군가 뜯어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공짜로 풀었을까 라고 묻는다면···.
음.
시안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편이었다.
뭐, 아무튼.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추진하지. 혹시 장부를 기록해놓은 것이 있는가?”
“재고를 파악하기 위해 적은 것이 있습니다만···.”
재고는 염병.
하나하나 낱낱히 뜯어먹으려고 아멜리아를 닥달하며 기록한 장부였다.
시안은 품 속에서 몇 장의 양피지를 꺼내보였다.
다름 아닌 아까 일이 있기 전.
아멜리아에게서 사정 설명을 들으며 받은 양피지였다.
콘라드는 시안에게서 양피지를 건네 받았다.
“꽤나 정확하게 기록해놓았군.”
그리고 생각보다 품목이 많았다.
이게 한 영지에서 산출할 수 있는 양과 종류인가 싶었다.
거의 웬만한 백작령 전체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과 맞먹을 정도.
심지어 처음 보는 물건도 있었다.
비누.
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아예 재고 자체가 남아있질 않았다.
해서 장부에 적힌 품목들을 얼추 다 합하면···.
“700만 골드··· 이게 뭔.”
콘라드는 저도 모르게 소리쳐버렸다.
700만 골드라니!
이게 무슨 오우거 방귀 뀌는 소리란 말인가!!
콘라드가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아 맞다!’
그리고 시안은 아차 싶었다.
아무리 물품의 양과 품목이 많았다고 한들.
700만 골드라는 값은 절대 나올 수가 없었다.
그 정도면 상행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700만 골드가 나온 것은 단순했다.
‘후려친 가격을 안 고쳤지 참.’
시안이 물품 가격을 몇 배나 후려쳤으니까!
어차피 서부 귀족들에게 뜯어낼 생각이었던 터라 그냥 적어넣었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콘라드가 다시 양피지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여기 장부에 적힌 물품의 가격들이 조금 이상한데···. 특히 곡물 가격이 말이 안되지 않나.”
콘라드는 의심쩍은 눈빛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황태자라고 한들 그래도 기본적인 시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콘라드의 모습에 시안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제 와.
말을 고칠 수는 없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700만 골드!’
이미 700만 골드에 시안의 눈이 돌아갔으니까!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루벤 특산품이라 그렇습니다.”
“특산품?”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둠의 숲에서는 작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마기(魔氣)로 들끓기 때문이죠. 저희 루벤 브라헤 상단이 판매하는 작물은 그런 어둠의 숲에서 수확한 작물입니다.”
“그래서 가격 프리미엄이 붙었다?”
“그런 셈이죠.”
시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는 그런 시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안은 살짝 시선을 내려 그런 콘라드의 시선을 받았다.
기묘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콘라드라고 이 가격이 말이 안됨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콘라드가 결국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는 정말···.”
콘라드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이 일을 맡길 당시, 자네에게 서부의 귀족들에게 뜯어서라도 보상을 해주겠다고 했지. 무엇보다 방금 또 충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도 했고···.”
바라보는 콘라스의 시선.
“하여간, 자네 앞에서는 정말 입방정을 조심해야겠어.”
이윽고 콘라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700만 골드를 보상해주도록 하지.”
“아···!”
시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누군가 감전 마법이라도 시전한 것 마냥.
시안의 전신이 부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시안은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 앞에서 접신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700만 골드였다.
무려 700만 골드였다!
단 한 번의 상행으로 벌어들인 돈이 무려 700만 골드였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멜리아가 서부를 들쑤시며 벌어들인 돈.
얼마인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아멜리아가 자신하던 표정을 보면 적은 금액은 아닐 터였다.
그 돈과 현재 시안의 수중에 있는 돈을 합하면···!
어쩌면··· 진짜 어쩌면···.
1,000만 골드가 넘을 수도 있었다!
‘처, 천만 골드!!!’
“아아···!”
시안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어버렸다.
끝내 접신을 끝낸 전신이 주체를 하지 못하고 파르르, 떨려왔다!
1,000만 골드.
실로 말이 안되다 못해 미쳐버린 금액!
시안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품 속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들고 싶었다.
지난 임시 점검으로 강해진 모바일 영주.
허나, 과연 1,000만 골드 앞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아···!!’
지금 시안, 본인부터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는데!!
시안은 한동안 부르르,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시안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
벙쪄있는 콘라드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자네··· 괜찮나?”
콘라드는 뭔가 싶었다.
진짜 뭔가 싶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나를 어려워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 뭔···.
시안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 악마와의 결전에서 입은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터라···.”
“아.”
콘라드는 그때서야 시안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네. 자네 깨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괜찮습니다.”
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다행히.
잘 넘어간 것 같았다.
시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콘라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시안의 말.
천 년전에 사라졌던 악마가 부활했다.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말이 나와서 묻는 거네만··· 정말로 악마였나?”
“분명한 악마였습니다.”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시안의 말에도 콘라드는 쉽사리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들은 증언이 있으니 부정할 수도 없었다.
다름 아닌 알렉스의 보고.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서부의 상황도 상황이었거니와.
악마의 부활과 더불어 시안이 악마를 소멸시켰다는 것.
물론 콘라드는 악마의 강함을 알지 못했다.
비단 콘라드 뿐만아니라 대륙의 모든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악마는 천 년전에 아르나이즈들에 의해 소멸했다 알려졌으니까.
그러나 그 악마가 얼마나 끔찍한지는 간접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신화 속 이야기와 더불어.
악마의 잔재라 불리는 마족(魔族)을 마주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것만 봐도 악마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악마를 시안이 소멸시켰다?
알렉스와 로열 나이츠도 감당하지 못한 그 일을?
솔직히 콘라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하니 로열 나이츠의 단장인 알렉스가 거짓 보고를 했냐만은.
그럼에도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고자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것.
“전하. 사실 제가 한 가지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에게 한 가지 또 다른 이야기를 말해주었다.
다름 아닌 지난 날.
루벤에서 있었던 누르비아와의 결전.
콘라드는 차분히 시안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이후.
“어찌 그런 일이···!”
콘라드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이윽고 콘라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이 꽤나 있는 듯해보였다.
시안은 그런 콘라드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아마···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자네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네. 아니,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는군.”
충분히 이해했다.
그만큼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
“그래서 성녀도 그런 말을 했던 건가···.”
“네? 아리아가 전하께 무슨 말을 했었습니까?”
“별 건 아니네. 악마를 찾기 위해 샤를롯 대제의 유산을 찾는다고 했었지.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건만···.”
아리아가 악마를 찾고 있었다고?
“아무래도 이 일은 여기서 당장 어찌할 일이 아닌 것 같네. 황궁으로 돌아가 폐하와 한 번 상의해봐야할 것 같네.”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의 말마따나 여기서 당장 어찌할 문제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 또한 더더욱 아니었다.
문제는 황제가 이 일을 믿어주냐의 문제.
물론 콘라드의 말이라면 믿어주기는 하겠다만.
그러나 직접 마주한 것과는 다를 터였다.
지금 당장 콘라드도 100% 믿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
그건 어디까지나 콘라드의 영역.
시안이 관여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로써 할 이야기는 대충 끝난 셈.
바로 그때.
“그래서 말인데. 자네 정말 생각이 없나?”
갑자기 콘라드가 뜬금없이 물어왔다.
“뭘··· 말씀이십니까?”
시안이 묻자 콘라드가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내 누이 말이네.”
콘라드가 누이라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한 명.
엘레나 폰 샤를롯.
다름 아닌 황녀였다.
“자네가 원한다면 이번 일을 폐하와 상의를 하면서 넌지시 제안을 해볼 생각인데··· 어떤가. 정말 생각이 없나?”
“제안을 하신다니. 그러니까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
“혼사 말이네.”
콘라드가 미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지난 황궁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꺼낸 콘라드 였건만.
지금은 어째 그때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때는 흥미와 관심이 주를 이루었다면.
지금은 가히 ‘욕망’이라 부름직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 번에는 농담이 섞여 있었네. 그러나 이제는 아니야. 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네. 그러고 보니 자네와 누이의 나이도 비슷하지 않은가.”
콘라드는 시안이 말만하면 바로 추진할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시안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뭔···.’
갑자기 무슨 혼사란 말인가.
무엇보다 황녀라면 혼사 대상이 까다로워도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타국의 왕자라던가.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파나트나 카이라면 또 모를까.
시안은 전혀 황녀와 혼사가 오고갈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데 대체 시안의 무슨 모습을 보고 콘라드가 저러는 건지.
시안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시안은 지금 이 상황에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다름 아닌 무려 천 년전.
아르나이즈 샤를롯과 그의 여동생이었던 레아.
그리고 카일.
시안은 가만히 콘라드를 바라봤다.
콘라드는 그런 샤를롯의 후손이었다.
엘레나는 콘라드의 여동생.
그리고 시안은 카일의 후계자.
······ 생각해보니 상황이 꽤나 비슷하지 않은가.
‘설마 처음엔 레아가 아니라, 샤를롯이 먼저 말을 꺼낸 거 아니야?’
물론 천 년전의 사정을 시안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레아가 말하길.
카일은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하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샤를롯이 그런 카일을 잡기 위해 먼저 말을 꺼냈을 수도 있었다.
물론 카일은 레아와 약혼이라도 했으니.
아주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닐 터.
비록 모종의 진실로 인해 홀연히 떠나야만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없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시안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제안은 감사드리나. 저는 아직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전하.”
“음··· 내 누이가 어디가서 꿀리는 외모는 아니네만.”
뭐, 그렇겠지.
물론 시안은 엘레나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 콘라드만 봐도 엘레나가 어떨지는 충분히 예상되었다.
하지만 외모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시안은 정말 혼인에 대한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 시안의 생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설마 자네. 아까 전, 브라헤의 여식에게 마음이 있는 겐가? 음··· 아무리 그래도 우리 누이가 첩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렇네만···”
콘라드는 이상한 망상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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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의 귀족들이 모조리 잡혀들어갔다!
콘라드가 행한 일은 서부 전역을 강타했다.
황태자가 직접 나서서 사건을 조사했으며.
이윽고 관련 사실들이 낱낱히 파헤쳐졌다.
서부의 제후들은 자신들의 추태가 들어날까 서부의 상황을 숨겼다.
서부의 상황을 축소시켜 황궁에 보고했고.
심지어 황가로 통하는 전령들을 붙잡아 입막음까지 했다.
이에 콘라드는 상당히 분노했다.
하여 엘리츠 백작을 비롯한 제후들에게 반역에 준하는 죄를 물어 참형을 선고했다.
또한 콘라드는 의무를 저버린 각 귀족들에게 어마어마한 추징금을 물었다.
그 빚을 갚고자 가진 바 모든 것을 빼앗겨야만 했다.
해서 서부의 제후들은 순식간에 몰락했으며.
여타 귀족들은 사실상 몰락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게 서부의 패자가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떠오르는 새로운 이름.
서부의 영웅, 시안.
그리고 그의 영지 루벤.
그렇게 시안과 루벤의 이름이 서부 전역을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아아아···!!!”
시안은 주체할 수 없는 희열에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손에 들린 전표.
무려 700만 골드짜리 전표가 손에 들려있었으니까!
황가의 인장이 떡하니 찍힌 700만 골드의 전표가 있었으니까!
“아아아아···!!!”
시안은 한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른 직후.
“이번엔 기필코 점검 보상을 받아낸다!”
시안은 희번뜩한 두 눈으로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