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96화 (96/322)

§ 96화 - 남부의 성자[聖子](2)

시안은 가만히 스마트 폰 화면 위로 떠오른 알림창.

그러니까 까무러치는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을 바라봤다.

전설 업적, 혼돈의 성자(聖子).

시안은 이게 뭔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뜬금없이 달성된 업적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성자(聖子)면 성자(聖子)였지.

혼돈의 성자(聖子)는 또 뭐란 말인가.

빛과 어둠의 영혼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뜻인가?

애초에 그런 존재는 있을 수가 없었다.

빛과 어둠은 그 성질이 완전히 상극이었으니까.

선(善)과 악(惡)의 잣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타고난 성질 자체가 서로 상극이었다.

아리아의 신성력에 구역질을 하는 시안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업적은 분명한 ‘혼돈의 성자(聖子)’라.

이에 모바일 영주도 상당히 어처구니가 없었던 걸까.

보통 전설 업적 달성에는 진지한 모습을 보였던 모바일 영주였다.

그런데 이번엔 뭔.

《혼돈의 성자?!?! 혼돈! 파괴! 망가아아악!!!!》

현질을 하지 않았음에도 오류가 나버린 모바일 영주였다.

시안은 정말 뭔가 싶었지만 금방 고개를 털어버렸다.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중요한 건 뜬금 없지만 ‘전설’ 업적을 달성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전설 업적의 보상을 생각하면···.

‘역시.’

시안은 새로운 아르나이즈 특전이 개방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르나이즈의 축복】

③【<뮤리엘의 기도>: 그대에게 무궁한 영광의 축복을.】

[효과 1] - 영지에 더 이상 ‘병(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효과 2] - 영지의 농작물 및 동물의 성장 속도가 +5,000% 상승합니다!

[효과 3] - 100시간에 한 번 ‘뮤리엘의 축복’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해금 조건: 성자(聖子) 혹은 성녀(聖女)와 관련된 전설 업적 달성.]

.

.

<샤를롯의 긍지>, <모르크루의 불꽃>.

그리고 이번에 개방된 <뮤리엘의 기도>.

효과 자체는 그럭저럭이라 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충분히 예상되는 효과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뮤리엘의 축복?’

[효과 3]인 뮤리엘의 축복.

이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의문을 알기라도 하듯.

곧 화면 위로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뮤리엘의 축복》

[효과 1] -  1분 간, 업적 보유자의 모든 신체 능력이 +1,000% 상승합니다!

[효과 2] -  반경 100미터 지정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신체 능력이 10분 간 +50% 상승합니다!

《[효과 1]과 [효과 2]는 중복해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

.

“와···!”

시안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효과가 미쳤으니까!

일단 업적 보유자의 신체 능력을 +1,000% 상승시키는 것.

즉, 시안의 신체 능력을 +1,000% 상승시킨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쉽게 말해 시안이 10배의 힘을 낼 수 있다는 뜻.

비단 힘뿐만이 아니었다.

순발력, 민첩성, 동체 시력, 오러 활용력 등등.

말 그대로 가진 바 신체 능력이 전부 10배 상승한다는 뜻이었다.

이게 미치지 않고서야 무엇이 미쳤단 말인가!

게다가 시안이 아닌 다른 아군의 신체 능력을 50% 상승시킬 수도 있으니.

실로 미쳤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효과 1]과 [효과 2] 중 하나를 택해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또한 100시간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도 있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해도 충분히 미친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과연 뮤리엘은 뮤리엘이라는 것일까.

기나긴 대륙의 역사상 단 6명만이 닿을 수 있었던 경지, 엑시드(Exceed).

아리아가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린다지만.

역시 뮤리엘을 따라가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그리고 전설 업적, ‘혼돈의 성자(聖子)’.

이렇게 되면 시안은 마기(魔氣)와 빛을 동시에 다루는 격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이들은 그렇게 볼 수 있었다.

‘이래서 혼돈의 성자인가?’

어둠과 빛의 속성을 가진 기사.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이것도 강화할 수 있나?’

다름 아닌 명성 포인트로 인한 특전의 강화.

이 또한 아르나이즈 특전이었으니 똑같이 강화할 수 있을 터였다.

시안은 곧장 명성 포인트 상점에 들어갔다.

그리고.

‘없어?’

강화 항목 중 <뮤리엘의 기도>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샤를롯의 긍지>와 <모르크루의 불꽃>만 보일 뿐이었다.

‘설마 안 되는 건가?’

싶은 것도 잠시.

‘아 맞다.’

시안은 그 이유를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뮤리엘의 기도>를 적용시키지 않았으니까.

전설 업적 달성으로 특전을 개방시켰을 뿐.

개방된 특전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시안은 다시 <뮤리엘의 기도>를 확인했다.

그리고 역시나.

《<뮤리엘의 기도> 개방 비용 - 500,000 G》

그 값은 다른 특전들과 같이 50만 골드였다.

그래도 업적 달성이 까다롭기 때문일까.

다행히 특전의 개방 비용은 50만 골드로 달라지지 않고 있었다.

물론 50만 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었으나.

‘양심은 있네.’

시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슬쩍, 인벤토리의 금화를 확인했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69,950 G

“젠장.”

6만 9천 골드.

대략 7만 골드 가량.

아리아에게 선입금으로 10만 골드를 땡겼으나.

S등급 방어구를 SS등급으로 강화한다고 5만 골드를 써버렸다.

해서 기존에 가진 바 2만 골드에 남은 5만 골드를 더한 금액.

어쨌거나 50만 골드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른 금액이었다.

‘아리아한테 50만 골드만 더 땡겨 달라고 할까?’

“오오오오 성자님이시여···!”

“신의 축복이로다! 이는 신의 축복이야!”

슬쩍, 말이나 꺼내봐야겠다.

#

주렌 마을에 강림한 성자(?), 시안.

시안은 성자라는 칭호에 걸맞게 주렌 마을에 퍼져있는 역병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걸린 시간 또한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병에 걸린 사람은 많았다.

주렌 마을 사람 모두가 역병에 걸리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허나, 시안의 치료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사실 치료라기보다는 굴복이라 표현함이 정확했으나.

어쨌거나 그건 시안만이 아는 사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치료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치료를 하면 할수록 시안의 힘이 증폭되어가니.

지치기는 커녕 되려 속도만 더 붙을 뿐이었다.

그렇게 주렌 마을 사람들을 모두 치료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말 그리 많지 않았다.

“오오오오···!”

“과연 성자님이시로다!”

이에 시안을 향한 칭송은 더욱 증폭될 뿐이었다.

그렇게 주렌 마을에 퍼진 역병을 모두 처리한 시안.

시안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내가 어떻게···?”

“살았다고···? 정말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의식을 되찾고 있었다.

아직 모든 마을 사람들이 의식을 찾은 것은 아니나.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이들은 금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

그리고 지금 상황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태가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함은.

가장 늦게 역병이 걸렸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자신들의 가족, 친구, 연인.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를.

그리고 어떠한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렇기에 역병에 걸렸음을 알았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생각했던 이들이었다.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딜 자신도 없었거니와.

다른 이들에게 역병을 퍼트릴 바에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까.

사람들은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갈았다.

정확히는 하루하루.

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라.

“도렌! 도렌!! 저, 정신이 드니?”

“어, 엄마···?”

“아아아···!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하나 둘씩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던 마을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여보! 여보!! 정신이 들어요?”

“어, 어떻게 내가···?”

“아아···! 당신이 죽었으면 난 정말···!!”

주렌 마을은 그야말로 눈물 바다가 되어버렸다.

각자의 소중한 이들을 부여잡고 세상 떠나가라 울고 있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역병으로 죽어버린 이를 슬퍼하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는 슬픔이 아닌 희망의 징표라.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성자님···.”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성자님···.”

주렌 마을의 사람들이 울먹거리며 시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시안은 괜시리 멋쩍은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시안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리아와 로라.

그리고 여러 사제들이 같이 도와줬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저기 당황하는 라히르 대주교는 아니었지만.

여러 사제들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모두 시안의 공적으로 돌리니.

시안은 괜히 멋쩍어 슬쩍,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시안.

시안은 스마트 폰을 꺼내 마혼제법의 진행률을 확인했다.

[마혼제법(魔魂制法) 진행률 26.78% (+11.73%)]

무려 26.78%를 달성한 진행률.

처음 14%에 불과했던 진행률이었으니.

한 사람 당 0.1%라 치면 1,000명이 넘는 환자들을 치료한 셈이었다.

“진짜 개꿀인데?”

사람들도 치료하고.

막혀있던 진행률도 쑥쑥 올리고.

그야말로 개꿀 중에서도 상개꿀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끝내기엔 아쉬운데?”

그렇기에 이대로 끝내기엔 아쉬운 생각도 들었고.

“여기에 있었어?”

한쪽에서 시안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아리아가 시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잘 왔다.”

시안은 스마트 폰을 품 속에 집어넣고는 아리아에게 말했다.

“혹시 50만 골드만 더 땡겨줄 수 있어?”

“뭐라고?”

아리아는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갑자기 50만 골드만 땡겨달라니?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쓸 일이 있어서.”

그런데 시안은 저 말만 할 뿐이었다.

하여간 저 놈의 돈, 돈.

아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 없는데.”

남부로 지원올 때 챙겨온 여비는 있었다.

그런데 그게 50만 골드는 아니었다.

세상 누가 여비로 4인 가족이 1,388년을 놀고 먹을 돈을 챙긴단 말인가.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걸 시안이라고 모르지 않았기에.

딱히 닥달을 하지 않았다.

뭐, <뮤리엘의 기도>를 지금 당장 적용할 수 없겠지만.

급한 건 아니었으니까.

시안은 어깨를 으쓱여보이고는 말했다.

“그보다 레이첼 추기경이라는 사람. 언제 온대?”

“그게··· 나도 방금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고 하네. 애초에 어딜 갔는지, 또 무엇 때문에 갔는지 말도 안 했다고 하니까.”

아리아는 괜시리 미안한 표정으로 답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는 시안이 남부로 온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레이첼이 악마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뮤리엘의 유적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레이첼은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애먹은데 발이 묶여 힘들게 역병 환자들만 치료하고 있으니.

아리아 입장에서는 미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 말해주는 시안이 아리아는 무척이나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 아리아의 심정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잘 되었네.’

시안은 되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안은 곧장 아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바로 가자.”

“······ 응?”

뜬금없는 시안의 말에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 어딜 가?”

“어디긴 다른 마을이지.”

“다른 마을?”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병이 남부 전체에 퍼져있다며. 그럼 여기 주렌 마을 사람들만 역병에 걸린 건 아닐 거 아니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올 때까지 기다리느니. 다른 마을 사람들도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어?”

시안이 곧장 걸음을 옮겼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아리아가 황급히 시안의 뒤에 따라붙었다.

“지금 바로 간다고? 너 사람들을 치료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잖아. 조금 쉬었다가···.”

“괜찮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텐데. 빨리 빨리 움직여야지.”

그러면서 걷는 속도를 높이는 시안이었다.

‘뭐, 레이첼이 언제 올지는 모르겠다만.’

레이첼이 언제 올 줄 알고 가만히 기다린단 말인가.

그럴 바엔 남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그러다 레이첼이 돌아오면?

그럼 기다리라고 하지 뭐.

이쪽도 기다렸는데 저쪽이라고 기다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뮤리엘의 유적을 먼저 찾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안은 사람들을 치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지금 저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아아··· 이,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할지···!”

세상 떠나가라 울고 있는 주렌 마을의 사람들.

남부 전역에는 저런 이들이 많을 것이다.

뮤리엘의 유적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의 목숨은 그보다 더 중요하다.

마땅한 방법이 없다면 또 모를까.

방법이 있는 지금,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마혼제법의 진행률도 올릴 겸.’

여러모로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않은가.

그동안 고작 14%를 올렸던 진행률이었거늘.

주렌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니 26%가 넘어버렸다.

이런 진행률을 대체 어디서 올릴 수 있단 말인가!!

레이첼이든, 쁘띠첼이든.

이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안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왜인지 아리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니.

아리아가 자리에 굳어버린 채 시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뭐해? 안 가?”

가만히 서있는 아리아의 모습에 시안이 물었다.

그런데 아리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초점을 잃은듯 표정은 멍해져있었고.

시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러가지 감정이 엿보였다.

마치 아멜리아와 같이 고장이 나버린 듯한 모습.

성녀도 고장이 날 수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빨리 가자.”

시안은 망가진 아리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

신성 제국의 남부.

그리고 그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이름 모를 숲 속.

터벅.

그곳에 한 여성이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신성 제국에서도 추기경의 지위에 있는 고위 성직자였다.

교황, 추기경, 대주교로 내려오는 계열 중 교황 다음의 지위, 추기경.

그러나 추기경이라 한들 모두 같은 추기경이 아니었다.

‘추기경 단’이라 하여 추기경 내에서도 그 계열이 존재했으니.

주교급, 사제급, 부제급이 그것으로서 레이첼은 이 중에서도 주교급 추기경.

최고위 위계이자 지위로는 오직 8명밖에 없는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한 마디로 신성 제국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레이첼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뒤로 아름답게 땋은 백발의 머리가 흔들렸다.

백발의 머리라고는 하나,

노화로 인한 백발의 색이 아니었다.

새하얀 백합을 닮은 색.

그 화사한 분위기는 그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화사한 분위기와는 대비되는 또 하나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차가울 정도로 차분한 분위기.

그것은 화사함과 대비되어 젊음과 중년.

그 애매한 경계에 있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케 해주었다.

문득 레이첼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레이첼의 시선이 어느 한쪽을 향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개럿 경.”

그런 레이첼의 말과 함께 한 사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노련한 용병과도 같은 인상.

새하얀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

추기경 단 소속, 신성 기사단의 단장, 개럿이었다.

개럿이 천천히 레이첼에게 다가왔다.

“현재 남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어 말씀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이상한 소문이요?”

개럿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남부에 성자가 강림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성자?”

레이첼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성자라니.

그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문이란 말인가.

성자 혹은 성녀.

이 칭호는 함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태어날 적부터 정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신성력부터가 선천적인 결과물이니 말이다.

신의 선택을 받아야만 얻을 수 있는 신성력.

그리고 성자와 성녀는 그런 이들 중에서도 또 선택받은 이들이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기적이요.

그야말로 신이 내린 존재라.

그렇기에 성자와 성녀는 한낱 인간 따위가 점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성자와 성녀는 태어날 적부터 신이 정해준다.

그렇기에 성자의 탄생이라 표현하지.

성자의 강림이라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나.

주교급 추기경 정도 되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헛소문이군요.”

그렇기에 레이첼은 단번에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현재 남부에 창궐하고 있는 역병.

그로 인해 남부의 신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사제의 신성력도 소용이 없어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니.

성자라는 기적이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헛된 희망이 변질되어 소문으로 번진 것이라.

소문이란 본디 한 번 퍼지고 나면 생명을 얻어 겉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레이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실제로 성자가 역병을 치료하고 있다 합니다.”

들려오는 개럿의 말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역병이 치료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럴 리가···?”

“저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으나 확인한 바, 사실이었습니다.”

레이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떻게 할까요.”

개럿의 말에 레이첼은 답이 없었다.

차분한 레이첼의 분위기가 일시에 얼어붙는다.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성자라는 자를 직접 만나봐야겠습니다.”

레이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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