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레이첼 추기경
“후우···! 여기도 끝났네.”
아리아는 긴 한숨과 함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시안과 함께 남부 전역을 쏘다니며 환자들을 치료한 아리아.
아리아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왁자지껄 뛰노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조심하라 소리치는 아낙네들과.
부서지고 망가진 마을을 보수하는 사내들.
마을에 드리웠던 죽음의 그림자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하하호호, 떠드는 생명의 소리가 마을 곳곳에서 들려올 뿐이었다.
그 모습에 아리아는 가슴 한 켠에서 진한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리아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어딘가에 쥐어짜낸 것처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부 전역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을 치료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휴식이라고는 마을과 마을 간의 이동.
그 짧은 시간에 잠깐 선잠을 자는 것이 전부였다.
그 이후에 신성력을 계속해서 써야만 했다.
그나마 시안이 역병의 씨앗을 제거해준 덕분에 환자들을 단순히 치료하는 것에 그쳤다.
치유의 힘은 쉽게 펼칠 수 없는 힘이나.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아리아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반복되고 반복되니 어찌 힘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본인이 고되고 힘들수록 아픈 사람들이 편안해지니.
그저 꾹, 눌러 참아 삭힌 것일 뿐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성력을 보유한 성녀, 아리아.
그러나 결국 한 명의 인간이고 여인이었다.
정신적인 체력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었으니.
솔직한 말로 당장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시안 공자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리아는 그저 시안이 대단하다 여겨질 뿐이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로라의 말에 아리아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보였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응? 아, 아니 그냥···.”
아리아는 괜시리 말을 얼버무릴 뿐이었다.
그러자 로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와 동시에 묘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왜 시안 공자님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 성녀님이 이렇게 요조숙녀가 되실까요?”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지금도 봐요. 평소 같았으면 ‘무슨 개같은 소리야?’ 라며 입에 걸레를 무셨을 텐데. 지금은 참한 새색시마냥 부끄러워하시잖아요.”
“뭐? 새색시? 그게 무슨 개같은 소리야?”
소리치는 아리아의 답에 로라는 풉, 하고 웃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아리아에게 말했다.
“저는 찬성.”
“······?”
아리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이상한 표정이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라고 묻는 것만 같았다.
로라가 작은 미소와 함께 곧장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저는 좀 그랬거든요? 외모는 제법 남자답게 생겼지만··· 맹한 분위기도 그렇고. 너무 돈을 밝히는 성정도 그렇고요. 하지만 이번에 생각이 완전 바뀌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남부에서 보인 시안의 모습.
아리아 마저 힘들어하던 역병을 단숨에 치료하는 능력하며.
사람들을 위해 거리낌 없이 나서는 성품하며.
그 어디 하나 꿀리는 것이 없었다.
괜히 남부의 성자(聖子)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정말 운명 같지 않은가.
성자(聖子)와 성녀(聖女)라.
이 어찌 신이 점지한 짝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러니 무조건 찬성. 시안 공자님 정도면 우리 성녀님을 보내도 전혀 아깝지 않아요.”
아리아를 보내기에 전혀 아깝지 않은 인물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무슨 엿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아리아의 저 성격이 조금 문제긴 했다.
그래도 뭐.
아리아의 미모라면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지 않겠는가.
“성녀님은 그 미모가 대륙 최강의 무기니까. 그걸로 쭈욱, 밀고 가시면 돼요. 음··· 어떻게 화장법이라도 좀 가르쳐드릴까요?”
“그러니까 나는 그런 생각이···. 에휴, 아니다.”
아리아는 그저 한숨을 내뱉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로라의 눈빛.
말을 해도 들어쳐먹질 않을 것이 분명해보였다.
아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뭐···.
아리아도 이번에 시안을 달리 보긴 했다.
그간 아리아가 봐온 귀족들이라 함은 다 고만고만했다.
고귀한 척, 존귀한 척. 척이란 척은 죄다 떨어대었고.
제 주위의 백성들은 모두 천한 것이라 떽떽, 거리는 놈들이었다.
또 그 뿐이랴.
욕망은 추악하기 그지 없어서 아리아의 얼굴과 몸을 끈적한 눈으로 훑어보다 침이나 꿀꺽, 삼키는 족속들이었다.
그런데 시안은 달랐다.
아리아의 얼굴을 보고 침을 꿀꺽, 삼키기는 커녕.
구토나 하고 나자빠져있으니.
이는 새롭다 못해 충격적인 유형이었다.
또한 이번에 남부 지역에서 보인 시안의 행동.
사람들을 구함에 있어 그 어떠한 거리낌이 없었다.
이 대륙에 시안과 같은 귀족을 아리아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귀족이 아니라 시안만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리아도 시안을 조금 달리 보고 있었으나.
‘묘하게 얄미워.’
뭔가··· 뭔가 얄미웠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보고 있으면 묘하게 얄미웠다.
하는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하는 행동 또한 상당히 얄미웠다.
마주치기만 하면 돈, 돈.
뭐만 하면 돈, 돈.
얄밉다 못해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뭔가 사람 자체가 그냥 얄미웠다.
아리아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으나.
다름 아닌 시안의 깊숙이 내재된 마기(魔氣)이 영향이었다.
최강의 아르나이즈, 카일이 다루던 근원적인 마(魔).
비록 마(魔)가 부정스러운 악(惡)은 아니라 할지라도.
빛과는 상반된 속성임은 변함 없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이.
아리아의 신성력이 시안의 마(魔)를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경고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아리아라 한들.
감히 카일의 마(魔)을 가늠할 수가 없었으니.
그냥 사람 자체가 얄밉다고밖에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웅성웅성.
한 쪽 어귀에서 이상한 소란이 일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닌 사제들이 한데 모여있었다.
또한 꽤나 당황스러운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역병이 사라진 마을이었기에 모두 가면을 벗고 있어 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제가 가서 알아보고 올게요.”
로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 사제에게 물어 뭐라뭐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가 진행될 때마다 로라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이윽고 로라가 헐레벌떡, 아리아에게로 뛰어왔다.
“지, 지금 시안 공자님과 레이첼 추기경이─.”
아리아는 로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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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은 가만히 눈앞의 여인을 바라봤다.
백합의 색을 닮은 백발의 머리.
그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 대.
이사벨과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그런 느낌의 여인이었다.
일단.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차림새를 보아하니 교단의 사람 같았다.
그것도 꽤나 고위직의 성직자.
“누구십니까?”
시안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이 실수를 깨달았다는 듯 조금 놀라며 말했다.
“아,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저는 레이첼이라고 해요. 부족하지만 교단의 추기경 자리에 있답니다.”
레이첼의 소개에 시안은 눈을 치켜떠보였다.
레이첼 그리고 추기경.
아리아가 악마로 확신했던 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안은 황급히 표정을 바로했다.
내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며 레이첼을 살폈다.
내재된 마기가 시안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운다.
전보다 더욱 짙어진 마기에 기감이 확장된다.
시안은 모든 정신을 레이첼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
‘악마가 아니다.’
악마가 아니었다.
아리아의 확신과는 달리 레이첼은 악마가 아니었다.
시안은 지금까지 두 악마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악마 7군주, 나태의 누르비아.
부정의 악마, 리치.
시안은 그 둘에게서 명백한 악의를 느낄 수 있었다.
리치는 가진 바 악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는 그 악의를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그런 악의를 루벤의 사람들은 물론 레아마저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시안은 아니었다.
시안은 누르비아가 숨긴 악의를 분명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레이첼은 악마가 아니다.
내재된 악의는 커녕, 안에 가득 들어찬 신성만이 느껴졌다.
비록 성녀인 아리아보다야 못 한다지만.
과연 추기경이라 할 법한 강대한 신성이었다.
심지어 지난 교황청에서 봤던 사제들.
그 사제들과 같은 기묘한 마(魔)의 기운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이상할 것 없는 성직자였다.
그런데··· 묘하다.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분명 신성이다.
악의는 보이지 않는다.
레이첼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성직자다.
그러나 마혼제법의 상승된 진행률과 더불어.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이, 기감이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제가 너무 갑작스레 찾아오긴 한 것 같네요. 많이 당황하시는 것을 보니.”
레이첼이 시안에게 말했다.
시안은 마기를 잠재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당황스럽기는 합니다만.”
“죄송해요. 한시라도 빨리 만나뵙고 싶어 저도 모르게 그만.”
레이첼이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를 만나보고 싶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거룩하신 성자께서 남부에 강림하셨는데, 추기경 된 자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요.”
레이첼이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런 성자께서 남부에 창궐한 역병까지 몰아내셨다니. 어떤 분일까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심히 감사를 표하고 싶어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어요.”
이어 레이첼이 시안을 바라봤다.
백합을 닮은 색의 머리가 살짝 흔들린다.
“교단을 대표해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정말 감사해요.”
그러면서 레이첼이 시안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런 레이첼의 모습에 시안은 다시 한 번 눈을 치켜떠보였다.
시안이 알기로 교단의 성직자들은 다른 이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교황을 비롯한 샤를롯 제국의 황제라할지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신 앞에 모든 만물이 평등하니.
평등한 이들끼리 고개를 숙이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이니 말이다.
그들이 고개를 숙이는 존재는 오직 하나.
거룩한 신뿐이었다.
그런데 추기경이라는 자가 시안에게 고개를 숙인다라?
그런 시안의 의문을 눈치채기라도 하듯.
레이첼이 곧장 말을 이어왔다.
“저희 교파에서는 그렇게까지 의미를 두고 있지 않아요.”
“교파라 하심은···?”
“황혼의 교파를 의미해요. 그리고 부족하지만 제가 황혼의 사제들을 이끌고 있답니다.”
지난 날 아리아의 3줄 요약에 따르면 신성 제국의 교단은 여명과 황혼.
이 두 가지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레이첼은 황혼의 교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
시안은 교단의 사정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보아하니 단순히 정치적인 파벌이 아니라.
교파마다 교리도 조금씩 다른 모양이었다.
“제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겸손하기까지. 과연 성자라 불리는 이유가 있었네요.”
레이첼이 작게 미소지어 보였다.
차가웠던 분위기가 미소에 지워졌고.
그 미소는 다시 백합을 닮은 머리색과 어우러져 한층 화사한 분위기를 뽐냈다.
누가 보더라도 선(善)한 성직자라.
시안은 가만히 레이첼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그것이 전부입니까? 제게 감사 인사를 전해주시기 위해서?”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겠죠.”
레이첼이 다시 한 번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실··· 부탁도 하나 드리고자 찾아왔어요.”
시안은 말없이 레이첼을 바라봤다.
레이첼은 그것을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것일까.
“저는 그동안 남부에 창궐한 역병의 역학조사를 하고 있었어요.”
레이첼이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최초 감염자를 찾고 있었죠. 갑자기 창궐한 역병이었으나 분명 최초로 시작된 지점이 있을테니 말이에요. 꽤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조사 끝에 찾을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자리를 비웠던 것이 저 이유 때문이었던 듯 싶었다.
“남부에 창궐한 역병은 어느 한 지점에서 발생한 것이었어요. 정확히는 역병의 근원에서 역병의 씨앗이 퍼져나가고 있었죠. 해서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레이첼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고요?”
“제 수준으로는 역병의 근원을 어찌할 수가 없었어요. 쉽사리 다가갈 수조차 없었죠. 정말··· 끔찍한 곳이었거든요.”
레이첼이 꽤나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서 이를 어찌해야하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귀인께서 남부의 역병을 치료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이죠.”
그러면서 레이첼이 가만히 시안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별 다른 말이 없었다.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 역병의 근원을 없애달라는 부탁이신겁니까?”
“정확해요.”
레이첼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역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근원 또한 치료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남부 중심부에 위치한 게스탁 마을이에요. 정확히는 그 마을 인근의 이름 모를 숲 속이죠.”
처음 듣는 곳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시안은 신성 제국의 지리를 몰랐으니까.
‘음···.’
시안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레이첼이 말하는 역병의 근원.
말 그대로 남부에 창궐한 역병이 저기서 발원한 것 같았다.
그리고 저 근원이 남아있다면 역병은 언제고 또다시 발병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근원을 없애야 함은 맞았다.
레이첼조차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이 지독한 곳인 것 같았지만···.
사실 시안에게는 큰 문제 없을 터였다.
시안이 다루는 마(魔)는 카일이 다루던 근원의 마(魔).
아무리 지독하다한들.
시안을 넘볼 수는 없을 터였다.
아마··· 마혼제법의 진행률도 대폭 오르지 않을까?
싶은 일말의 기대감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레이첼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아니, 되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시안은 쉽사리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레이첼 때문이었다.
아리아가 악마라 확신하던 존재이나.
막상 느껴지는 기운은 명백한 성직자.
그러나 상승된 마혼제법의 진행률과 더불어.
한층 더 날카로워진 기감이 지금도 말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헌데 느껴지는 것은 악(惡)이 아니니.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잠시··· 생각을 하고 답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서 시안은 결정을 잠시 뒤로 미루었다.
“물론이죠. 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네요. 고통받는 남부의 사람들을 위해서요.”
그러면서 레이첼이 다시 고개를 숙여보였다.
“당분간 저도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결정되면 언제든 저를 찾아와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레이첼이 자리를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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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이 떠나가고 난 이후.
시안도 곧장 걸음을 옮겨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안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야!”
어디선가 시안을 부르는 외침.
물론 시안이라는 이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안은 저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고.
여기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저 멀리, 아리아가 시안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안은 가만히 아리아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리아는 백금발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금새 시안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떻게헤··· 하악···! 어떻게헤 됐허?”
꽤 멀리서부터 뛰어온 것일까.
숨이 찬 듯 헐떡이는 아리아의 목소리였다.
“뭐가 어떻게 돼?”
“레이첼 추기경 말이야!”
아리아가 달뜬 숨을 삼키며 소리쳤다.
그새 소문이 퍼졌어?
시안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아리아가 묻는 것이야 뻔한 일.
시안은 살며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악마가 아니야.”
“뭐··· 라고?”
그러자 아리아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런 아리아의 모습에 시안이 다시 말했다.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악마의 힘을 사용했단 말이야.”
이번엔 아리아가 시안에게 물어왔다.
“오히려 네가 착각한 거 아니야?”
“아니. 몇 번이나 확인했어. 그런데 아니야.”
시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레이첼에게서는 그 어떠한 악의(惡意)도 느껴지지 않았다.
악의뿐만 아니라 그 어떤 마(魔)의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안의 감각이 위험하다 경고를 보내왔으나.
그 이유가 적어도 레이첼이 악마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그럴 리가···.”
아리아가 충격에 멍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에게 말했다.
“보이는 모습만 보면 꽤나 신실한 성직자던데. 심지어 이번에 자리를 비운 것도 역병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였나봐.”
“역병의 근원?”
시안은 레이첼과 했던 대화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그, 그런···.”
당황하는 아리아.
그러다 문득.
“잠깐.”
아리아가 퍼뜩, 소리쳤다.
“역병의 근원이 남부 중심부의 게스탁 마을, 그 인근 숲 속에 있다고?”
“그렇다는데. 아는 지역이야?”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가 거기야.”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거기가 거기라니.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 먹는단 말인가.
“거기가 뭔데.”
“거기! 네가 가고 싶다고 했던 곳!”
내가 가고 싶다고 했던 곳?
아, 설마.
“뮤리엘의 유적?”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어진 한 마디.
“뮤리엘의 유적이 바로 거기에 있어.”
그리고 대체 어째서일까.
그런 아리아의 말과 동시에.
띠링!
『[스토리 돌발 퀘스트] - ‘진실 속에 감춰진 진실’』
스토리 돌발 퀘스트라는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