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17화 (117/322)

§ 117화 - 의문의 퀘스트(2)

압도적인 존재감이 짓눌러온다.

강력한 억제력이 시안의 전신을 얽매어왔다.

숨조차 쉬이 내뱉어지지 못하는 끔찍한 살의.

오로지 기세만으로 존재를 짓눌러 죽이는 살의가 시안의 전신을 옭죄어왔다.

듀라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신에서 터져나오는 기세는 시안을 억누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듀라크의 행동.

설마 듀라크가 눈치를 챈 것인가?

시안이 독립하려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그건 콘라드가 말하지 않는 이상.

혹은 루벤의 영지민이 배신을 하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보이는 듀라크의 반응.

듀라크의 기세는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거세졌다.

그것은 진심으로 시안을 짓눌러 죽이려 하고 있었다.

지난 번보다 확실한 살의가 느껴진다.

그러나.

사아아아─.

시안의 내부에서 근원의 마(魔)가 반응했다.

그것은 짓눌러오는 듀라크의 기운을 집어삼켜버렸다.

역병을 흡수하면서 대폭 상승된 마혼제법의 진행률.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가 폭사시킨 광기에도 굴하지 않았던 근원의 마였다.

게다가 시안은 켄드릭과의 대련을 해오고 있었다.

켄드릭의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대련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

시안은 듀라크의 기운을 받아내며 깨달을 수 있었다.

켄드릭은 확실히, 듀라크와 비견되는 실력자다.

듀라크의 기세가 계속해서 거세졌다.

하지만 이제는 듀라크라 할지라도.

기세만으로는 시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부르신 연유를 여쭙고 싶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 말투.

“······!”

듀라크의 얼굴로 뚜렷한 표정 변화가 일었다.

놀람.

지금 듀라크의 얼굴에는 놀람이라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느껴지던 듀라크의 기세가 일시에 흩어졌다.

다만, 시안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빛은 여전했다.

“그동안 무슨 일을 벌인 거냐.”

그리고 다시 들려온 물음.

그때서야 시안은 저 말의 의미를 눈치챌 수 있었다.

보자마자 알았던 것 같았다.

지난 번과는 확연한 성장을 한 시안의 수준을 말이다.

하지만 마혼제법이 갖는 그 깊이.

그리고 마(魔)라는 힘의 본질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듀라크라 할지라도 아르나이즈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심지어 카일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시안의 수준은 단번에 알아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시안은 솔직히 놀라웠다.

솔직히 몰라 볼 것이라 생각했었니까.

그렇기에 시안은 내심 켄드릭은 루벤에 두고 오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행여 듀라크가 그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켄드릭을 두고 왔다.

그리고 역시나.

데리고 왔으면 확실히 눈치챘을 것 같았다.

뭐, 아무튼.

듀라크는 그 짧은 시간 안에, 정확히는 두어달 만에 발전한 시안의 수준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후작가의 망나니이자.

천하의 둔재라 불리던 시안이 말이다.

“가문에 도움이 되고자, 밤낮으로 수련을 거듭했습니다.”

시안은 되는대로 말을 내뱉었고.

듀라크는 역시나 아무런 답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시안을 바라보는 듀라크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시종일관 무덤덤했던 듀라크의 눈빛이었으나.

지금은 명백한 ‘관심’ 이라는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이거··· 좋지 않은데.’

썩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듀라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황제 폐하께서 엘란두르와 로르실트를 부르셨다.”

응? 그런 일이 있었어?

시안은 살짝 놀란 눈을 떠 보였다.

엘란두르와 로르실트.

제국을 지탱하는 두 가문인 만큼, 서로가 라이벌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서로 내색하지는 않지만 다들 아는 사실.

그렇기에 황제는 따로 부르면 불렀지.

웬만하면 둘을 같은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안은 조금 놀랐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왜 꺼내냔 말이다.

그걸 듀라크도 모르지 않았는지 추가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애초에 듀라크가 말을 길게 할 성격도 아니었고.

해서 듀라크가 꺼낸 이야기의 골자는 이러했다.

북부에서 야만족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흑마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

‘다크 엘프구나.’

시안은 그 흑마법의 흔적이 다크 엘프임을 알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왜 퀘스트가 엘란두르의 편지에 반응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야만족이 활개치는 것은 조금 의외였는데···.

“이에 로르실트는 파나트와 아르카닉 마법병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어진 듀라크의 말에 시안은 크게 놀라보였다.

파나트와 아르카닉 마법 병단.

이 둘의 이름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엘란두르의 하얀 늑대 기사단.

로르실트의 아르카닉 마법 병단.

각각 검과 마법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단체였다.

거기에 제국의 별이라 불리는 천재, 파나트까지.

사실상 로르실트의 가주, 에그리트.

그를 제외하면 로르실트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었다.

“해서 엘란두르도 하얀 늑대 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어진 듀라크의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수준이 맞았으니까.

그리고 저쪽에서 파나트가 나왔으니.

엘란두르에서는 당연히 카이가─.

“거기에 시안. 너를 파견하기로 했다.”

“······ 예?”

시안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를 파견해?

어디를? 저기 북부에?

카이가 아니라 나를?

‘대체 왜?’

시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여정이 될 것이다. 그러니 준비하거라.”

이어진 듀라크의 말에 시안은 듀라크의 의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시간 끌기.

4개월이 채 남지 않은 시간이나, 그 마저도 기다리기 아깝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허나 직접 내뱉은 말이 있으니, 철회하자니 명분이 없고.

그러니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 시안을 이용해먹으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황제의 명령과도 같은 부탁이니.

듀라크는 손 안대고 코 푼 격이기도 하고.

북부에서 활개치는 야만족들.

그리고 흑마법이 사용된 흔적.

모르긴 몰라도 사건을 조사하고, 해결하고.

또 뒤처리하는 데만 최소한 한 두달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남은 4개월이란 시간 모두를 북부에 틀어박혀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쁘지 않은데?’

듀라크가 간과한 사실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시안은 저 사건이 다크 엘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시안은 지금 명분을 쌓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이름을 버리고.

루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북부에서 활개치는 야만족들.

보아하니 북부의 병력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야만족들은 제국의 영토를 침범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황제가 직접 언급을 한 것 같았다.

황제가, 관심을 보이는 사건.

역시나 예상대로 듀라크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시안이 4개월 뒤.

가문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독립을 할 것이라는 것을.

지금 루벤에서 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겠지.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이라고는.

그리하여 엘란두르를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는.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아마 생각은 커녕 상상도 못할 터였다.

그건 정말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으니까.

어찌보면 듀라크의 자신감이었고,

제국에서 엘란두르가 갖는 위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거절합니다.”

듀라크에게 말했다.

#

듀라크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졌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표정 따위는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비쳐보이는 감정은 명백한 분노.

콰아아아─!

듀라크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터져나왔다.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끔찍함이 터져나왔다.

‘끄윽···!”

이번엔 시안도 견디기 힘든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진정으로 죽여야만 하는 ‘적’.

듀라크는 지금 시안을 그렇게 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안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듀라크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시안은 곧장 말을 이었다.

“하얀 늑대 기사단을··· 물려주십시오···. 대신 루벤의 병사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정확히는 육성되고 있을 루벤의 기사단이었지만 아무튼.

“불가하다.”

듀라크는 단호하게 시안의 말을 일축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답이었고.

그렇기에 시안도 충분히 예상한 답이었다.

시안은 곧장 말을 이었다.

“만일 가주께서 만족하실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할 시, 4개월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가문에 복귀하겠습니다.”

듀라크의 기세가 일시에 끊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 시안을 향한다.

시안은 그런 듀라크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냈다.

그리고 시안이 내건 조건.

황제가 관심을 갖는 사건임은 좋다.

그러나 루벤의 이름을 알리려면, 하얀 늑대 기사단이어서는 안된다.

오로지 시안과 루벤.

이 둘만이 움직여야한다.

그렇다고 시안은 성과를 낼 확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크 엘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지만.

시안이 예지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 일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성과를 못낼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러다 진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못내면 어쩌냐고?

뭐, 어쩌랴.

그대로 들고 일어나야지.

레아도 있겠다. 켄드릭도 있겠다.

거기에 지금쯤이면 S등급의 장비가 양산되고 있을테고.

켄드릭을 필두로 루벤의 기사단 또한 착실히 육성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아직 엘란두르에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쉬이 당할 정도 또한 아니다.

루벤을 없앨려면 엘란두르도 상당한 출혈을 각오해야할 터였다.

듀라크는 말이 없었다.

아마 머릿속으로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황제에게 지울 수 있는 빚이냐.

아니면 시안을 곧장 데려올 수 있는 명분이냐.

하지만 시안은 듀라크가 내릴 답을 알고 있었다.

시안이 성과를 내든, 내지 못하든.

듀라크에겐 손해볼 것이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카이가 아닌 시안을 선택했다는 것부터.

듀라크는 이 일의 초점을 이쪽에 맞추었다.

“······ 좋다.”

끝내 듀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듀라크의 시선이 다시 시안에게 향했다.

시안이 말한 두 가지 조건.

나머지 하나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듯한 물음이었다.

시안은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듀라크는 알지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으나.

이 일은 결과적으로 시안에게 더없이 좋은 일이다.

바라마지 않던 일.

그런데 그건 그거고.

“가문에서 자금을 지원해주십시오.”

받을 건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

달칵.

집무실을 나온 시안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집무실에서 상당히 멀어졌다 싶을 때쯤.

품 속에서 한 장의 전표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써져있는 금액, 300만 골드.

“짜네.”

시안은 툭, 말을 내뱉었다.

나름 마음 단단히 먹고 내지른 조건이건만.

“돈도 많으면서 300만 골드가 뭐야, 300만 골드가.”

물론 300만 골드가 적은 돈은 아니었다.

북부의 사건을 잘 해결했다 치더라도 많은 돈이었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적은 돈이었다.

무엇보다 엘란두르이지 않은가.

물론 시안도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엘란두르가 가진 자금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못해도 수 억 골드.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엇다.

제국의 동부 지역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엘란두르.

그런 동부 전역에 흘러가는 자금만 더해도 수 억은 가뿐히 넘었다.

그런데 전표에 찍힌 금액은 300만 골드.

“그래도 준 게 어디냐.”

시안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전표를 다시 집어넣었다.

그렇게 저택을 벗어나려던 그때.

복도 저 멀리.

꽤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점점 가까워진 시야로 보인 얼굴은 다름 아닌 엘란두르 가문의 셋째.

네이슨 엘란두르였다.

시안은 걸음을 멈춰 네이슨을 바라봤다.

네이슨 또한 시안을 발견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형님.”

“······”

네이슨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들어본 시야로 보인 네이슨의 얼굴.

네이슨은 못 마땅한 얼굴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좋으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다.

“네가 여긴 또 어쩐 일이냐.”

“가주께서 부르셔서 잠시 들른 참입니다.”

“뭐, 뭐라고?”

네이슨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듀라크가 불렀다는 말.

카이 말고는 다른 이에게 일체 관심을 보이지 않던 듀라크였으니.

네이슨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터였다.

게다가 듀라크가 시안을 따로 부른 것이 이번이 두 번째.

그 충격이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께서 대체 너를 왜?”

“가주께서 당부하신 사항이라, 형님이라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

네이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시안이 듀라크를 독대한 것도 꼴사나워 죽겠거늘.

듀라크가 당부했다니 뭐라 할 수 없었으니까.

물론 듀라크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만.

뭐, 알게 뭐란 말인가.

그렇게 네이슨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시안은 문득.

‘대련이나 하자고 해서 골드나 좀 더 뜯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듀라크에게 300만 골드를 받긴 했다만.

이왕 저택에 온 거 더 뜯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은가.

게다가 마혼제법의 진행률도 대폭 올렸겠다.

마혼수라검의 중급 과정도 배우고 있겠다.

무엇보다 SSS등급의 검도 있겠다.

‘패널티 없이도 붙어 볼만 하려나?’

네이슨은 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

그리고 지금보니··· 상급에 살짝 걸쳐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하고 있어도 천재는 천재였다.

그러나 지금의 시안이라면 혹시···? 싶기도 했다.

시안은 곧장 입을 열었다.

“형님. 간만에 대련 한 번 해보심은··· 어떠십니까?”

“뭐라고? 대련?”

“네. 이번엔 아무런 핸디캡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네이슨의 표정이 아주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대련을 먼저 제안한 것도 그렇거니와.

핸디캡도 필요 없다고 말하니 말이다.

그 말은 즉.

시안이 자신과 동급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천하의 둔재라 불리던 시안 따위가?

과거 발 아래를 빌빌 기던 시안 따위가?

네이슨의 얼굴은 대규모 마법이 시전된 것처럼 격동적으로 들썩거렸다.

“제가 이기면 300만 골드. 제가 지면··· 어떻게 할까요.”

추가로 들려온 시안의 말.

곧 죽어도 돈을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질 수도 있었으니까.

네이슨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시안을 노려봤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까드드득!

“안······ 한다.”

네이슨이 입에서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말했다.

“볼 일 다 봤으면 꺼져라.”

그리고는 성큼, 시안을 지나쳐 걸어갔다.

조금 의외의 반응.

“아.”

그러고보니 저번이 이사벨이 더 이상 돈 걸고 대련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했었지.

네이슨은 벌써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네이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린 찰나.

“그럼 나랑 해.”

시안의 눈앞으로 한 여성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금발의 포니테일을 한 여인, 로즈웰 엘란두르.

시안의 누나되는 이였다.

어쩐지 익숙한 기척이 다가온다더니.

“안 합니다.”

시안은 단호하게 일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즈웰이 따라붙으며 말했다.

“왜! 방금 네이슨이랑은 하자고 했잖아!”

“골드 걸어서 하자고 했었죠. 누님도 골드 거실 겁니까?”

“골드? 신성한 기사의 대련에 골드를 왜 걸어? 그리고 어머니께서 더 이상 대련에 골드 걸지 말라고 했어.”

역시나.

네이슨이 부들부들 거리며 떠난 이유가 있었다.

“그럼 안 합니다.”

시안은 로즈웰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즈웰이 시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랑 하기 전까진 못 지나가.”

시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또 시작이다.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저 지금 가주님의 명을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만.”

움찔.

듀라크의 이름이 나오자 로즈웰이 몸을 떨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짓말 하지마.”

“정말입니다. 못 믿으시겠으면 가주님께 직접 확인해보세요. 저 시간 없습니다. 비키세요.”

시안은 로즈웰을 지나쳐 걸어갔다.

하지만 로즈웰이 다시 그런 시안을 막아섰다.

“시간 없기는 무슨. 그럼 방금 네이슨이랑 대련을 왜 하자고 한 건데?”

“그건···.”

시안은 잠시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로즈웰이 말했다.

“이것 봐, 거짓말이잖아.”

“가주님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건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대련할 시간은 있다는 거잖아?”

하아.

시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 말도 안되는 억지는 왜 변하질 않는지.

시안은 가만히 로즈웰을 바라봤다.

눈빛을 보아하니··· 이번엔 단단히 대비를 하고 있었다.

지난 번에 기습을 당한 것이 있으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대련을 하기 전까지는 길을 비켜주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시안은 로즈웰과 대련할 생각이 없었다.

굳이 해야할 필요도 못 느꼈고.

솔직히 말할까?

수준 낮아서 못 놀아 주겠다.

로즈웰이 안다면 눈을 까뒤집을 소리였지만.

솔직히 수준이 낮아서 못 놀아 주겠다.

물론 로즈웰이 수준 자체가 낮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즈웰은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

아니, 지금 보니 최상급의 경지에 발을 딛은 것 같았다.

로즈웰의 수준이 낮은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수준이 낮았다.

시안이 얼마 전 대적한 존재만 해도 그러했다.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

천 년전, 대륙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던 악마 7군주였다.

게다가 루벤에 가면 마스터 상급인 켄드릭이 있었다.

가서 원하기만 하면 수없이 대련할 수 있었다.

로즈웰이랑 대련해서 얻는 깨달음?

웃기는 소리 말라지.

돈이 안 걸리면 수준 낮아서 못 놀아 주겠다.

말 그대로 시간 낭비다.

그런데 저렇게 억지를 부리니.

“가주님을 뵙습니다.”

시안이 로즈웰의 뒤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뭐?”

로즈웰은 살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연히.

속아주는 척,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설마하니 로즈웰이 듀라크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까.

듀라크가 작정하고 숨긴다면 모를까.

저택에서 듀라크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지난 번 처럼 기습하려는 시안의 얕은 수작이리라.

로즈웰은 곧 이어질 시안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기다려도 공격이 이어지질 않았다.

천천히 돌아본 시야.

“······ 없어?”

그곳엔 시안의 모습이 없었다.

왜인지 짙은 어둠의 잔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게 무슨···!”

로즈웰의 두 눈이 충격으로 부릅, 떠졌다.

흐릿해지는 어둠의 잔상을 멍하니 바라봤다.

“도망치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로즈웰은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

엘란두르 저택 밖.

한줄기 어둠이 뭉쳐지며 시안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저택에 올 때마다 저러는지 원.”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곤해도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

시안은 방금의 일을 잠깐 되짚어봤다.

다름 아닌 마혼무영보(魔魂無影步).

“로즈웰이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던 거 같았는데.”

과연 카일의 유산은 카일의 유산인 것일까.

엑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오른 로즈웰.

그런 로즈웰이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도망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듯 보였고.

또 특급 암살자 커너의 비기를 사용한 것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시안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확실히···.

시안이 그간 대적한 존재들이 정상이 아닌 것이었다.

뭐, 어쨌든.

시안은 재빠르게 엘란두르 저택 밖으로 나갔다.

황제가 관심을 갖는 북부의 사건.

그리고 엘로디의 후손, 다크 엘프.

시안은 이번 일을 신설된 루벤의 기사단과 함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로르실트에서 파견 나올 파나트와 아르카닉 마법 병단.

“켄드릭이 기사단을 잘 육성시켜놨을라나.”

시안은 기대를 한가득 아름 안고 루벤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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