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136화 (136/322)

§ 136화 - 황녀, 엘레나(1)

목소리가 들려온 시안의 맞은 편.

시선을 돌리자 그곳엔 다소곳이 앉아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태양빛을 닮은 금발.

그 사이로 느껴지는 품격과 품위.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님.”

제국의 황녀, 엘레나.

시안의 인사에 엘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엘레나가 탁자 위의 찻잔을 손에 들었다.

차분히 내려앉는 짙은 속눈썹과 함께 은은히 피어나는 차향.

“영지에서 쫓겨난 이후로 처음 뵈니··· 거진 3개월 만인가요?”

엘레나가 시안을 향해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화사한 미소와 달리 차가운 인상 때문일까.

그 대비되는 분위기가 꽤나 고혹적이면서도 또 매력적이었다.

뭇 사내라면 한 번쯤 가슴이 두근거릴만한 모습.

“······”

그러나 시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시안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모르는 이가 듣는다면 제가 정말 황녀님을 쫓아낸 줄 알겠습니다.”

“어머. 아니었나요?”

그러자 엘레나가 살짝 놀라며 반문해왔다.

그리고 정말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떠보이며 시안을 바라봤다.

“······”

그런 엘레나의 반응에 시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지난 날, 루벤에 방문했던 엘레나.

그러나 레아와 엘레나의 트러블은 물론이고.

정확히는 레아의 일방적인 갈굼이었지만··· 뭐, 아무튼.

로열 나이츠와 루벤의 병사들까지 트러블이 생겼고.

하루 종일 사고만 치는 엘레나에게 루벤을 떠나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물론 엘레나가 직접 사고를 친 것은 아니었다만.

결과적으로 시안은 엘레나를, 황족을 쫓아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해이십니다. 제가 어찌 황녀님을 쫓아내겠습니까.”

엄밀히 말하면 시안이 쫓아낸 것은 아니었다.

엘레나가 제 발로 나간 것이지.

시안의 변명 아닌 변명에 엘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딱히 반문이나 반박같은 것을 해오지 않았다.

그저 들고 있던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홀짝이더니.

“그렇군요.”

그러고 끝이었다.

‘······ 젠장.’

그런 엘레나의 모습에 시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으신데··· 혹시 자리가 불편하신가요?”

저걸 말이라고 하는 걸까.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가시 방석이라는 말이 딱 이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면박을 준 사람과의 재회가 편할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면박을 준 대상이 황족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엘로디의 탐구> 특전 개방에, 다크 엘프들이 살 터전을 마련하려면···.’

다크 엘프들을 영지민으로 받아들인 지금.

영지를 확장해야되고, 집도 지어줘야되고.

먹을 거, 입을 거, 마실 거 등등.

대충 계산을 때려도 수 백만 골드는 가볍게 찜쪄먹는다.

그런데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은···.

[현재 보유 중인 금화] - 82.000G

8만 2천 골드.

시안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녀님과의 자리가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터라···.”

“아···.”

그러자 엘레나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엘레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가볍게 내려놓았다.

“이번에 큰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제국의 북부 전역을 뒤집어 놓은 사건.

물론 아직 황궁 내부에서도 쉬쉬하는 터라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황궁의 고위 귀족들 정도나 알고 있는 정도.

그러나 황녀는 그런 고위 귀족에 속하고도 남았다.

그렇기에 엘레나는 알고 있었다.

북부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일이 제국에 어떤 파급력을 가져왔으며.

시안이 없었다면 제국이 어떻게 되었을지까지.

새로운 제국의 별.

현재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폐하께서도 공자님께 큰 관심을 보이시더군요.”

엘레나는 가만히 시안을 바라봤다.

어딘가 어벙한 듯한 분위기.

북부의 사건을 해결한 사람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작가의 망나니.

무능력한 놈팽이.

이것이 시안을 둘러싸고 있는 소문들이었다.

하지만 그 실태를 까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황태자, 콘라드의 총애는 물론이요.

이제는 황제, 발루아가의 관심까지 받고 있는 존재.

그 동안 이런 귀족이 있었던가?

엘레나는 단번에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황태자의 총애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황제의 관심은 결을 달리했다.

황제는 누군가에게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적어도 엘레나가 지켜본 황제는 그러했다.

물론 제국의 대소사에 관한 일.

수많은 귀족 가(家)들의 사정.

이런 것들에 대해서 황제는 관심을 두고,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황제로서의 업무일 뿐이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관심을 갖는 존재는 거의 없었다.

어쩌면··· 처음일 수도 있었다.

제국의 별이라 불리던 카이 엘란두르와 파나트 로르실트.

그 두 명조차도 황제는 ‘개인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으니까.

황제를 알현했던 시안.

황제는 시안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엘레나는 시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다크 엘프의 숲지기를 위해 공자님께서 형벌을 자처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렇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그 이유를 어쭈어봐도 될까요?”

이어진 엘레나의 물음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레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 시안의 심정을 아는 것일까.

엘레나가 곧장 입을 열었다.

“다크 엘프의 숲지기는 많은 이들에게, 특히 제국의 북부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요.”

“아스란디즈님이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만.”

“그의 아들이 저지른 일이죠. 그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뿐, 만일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숲지기는 아마···.”

엘레나는 말을 완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은 그 완성되지 않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북부인들이 다크 엘프를 증오하는 건 변함없죠.”

그리고 일이야 어찌 되었든.

북부인들 입장에서 다크 엘프는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철천지 원수나 다름 없었다.

북부인들은 다크 엘프라면 치를 떤다.

그리고 그런 북부인들을 대변하는 제국.

제국의 입장에서 다크 엘프는 죄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다크 엘프들을 위해 나서신 이유가 무엇이죠?”

시안은 잠시 엘레나를 바라봤다.

차분히 가라앉은 엘레나의 속눈썹.

그 사이로 비치는 맑은 눈동자는 오롯이 시안을 향하고 있었다.

“제가 다크 엘프의 죄를 굳이 끌어안고 갈 필요가 있었냐. 그리 물으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요.”

시안을 바라보던 엘레나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별 다른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로 보이는 엘레나의 감정.

그곳엔 분명한 질책과 의아함이 깃들어 있었다.

왜 그들을 감싸주었냐는 일말의 질책.

왜 굳이 그들을 감싸안아 제국민들의 반감을 사는지에 대한 의문.

뭐, 엘레나가 보기엔 그럴 수 있었다.

그리고 엘레나의 생각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콘라드 마저 상당히 놀라며 우려를 표했을까.

그럼에도 다크 엘프를 받아들인 이유는···.

글쎄.

잘 모르겠다.

“저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이 정도로 해두고 싶었다.

엘레나가 가만히 시선을 들어보였다.

그런 엘레나의 맑은 눈동자에는 분명한 의문이 깃들어있었다.

“공자님과 비슷하다는 건···?”

역시나 엘레나가 의뭉스럽게 물어왔다.

시안은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한 번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인벤토리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이게 무엇처럼 보이십니까.”

엘레나는 시안이 내미는 무언가를 바라봤다.

동그란 모양의 금빛을 발하는 동전.

“금화··· 아닌가요?”

시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럼 이 금화 하나가 얼마의 가치를 지니는지도 알고 계십니까.”

엘레나의 유려한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설마하니 그 정도도 모를까.

아무리 돈 걱정 없이 사는 황녀라고는 하나 그 정도도 모르지 않았다.

“1골드의 가치를 지니죠. 정확히는 평범한 4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 가치를 지닌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그런 엘레나의 답에 되려 시안이 살짝 놀라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엘레나가 이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금화의 가치를 잘 모른다.

정확히는 이렇게 일반 백성들에게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이 딱히 서민들에게 신경쓸 이유가 없으니까.

10명의 귀족들에게 물으면 8명은 그러하다.

그런데 하물며 황녀라면야···.

황녀로서의 의무감으로 똘똘 뭉친 엘레나.

솔직히 조금은 어리숙하고 허울뿐인 생각이라 여겼건만.

되려 시안이 엘레나를 가벼이 여겼던 모양이었다.

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뭐하는 건가 싶은 것도 잠시.

시안은 탁자 위에 놓인 케잌에 금화를 꽂았다가 빼보였다.

진한 생크림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금화.

“그럼 이건 얼마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똑같이 1골드죠.”

엘레나는 무슨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곧장 답을 했다.

“금화가 생크림으로 더럽혀졌습니다만.”

“그거야 닦아내면 그만이잖아요.”

“그렇군요.”

시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엔 콰직!

금화를 반으로 접어버렸다.

엘레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고.

시안은 태연하게 물음을 다시 이어왔다.

“그럼 이건 얼마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십니까.”

엘레나는 말없이 시안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시안이 접어버린 금화를 바라봤다.

종잇장처럼 접혀버린 금화.

엘레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답했다.

“······ 여전히 1골드죠.”

“반으로 접혀져 더 이상 금화라 부를 수 없습니다만.”

“다시 피면 되니까요. 맨손으로 접으셨으니 다시 피는 것도 하실 수 있지 않으신가요?”

“하하···.”

시안은 멋쩍은 웃음과 함께 접었던 금화를 펴보였다.

그러자 다시 온전한 형태를 찾은 금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츠츠츠···.

곧 금화에서 시꺼먼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파사삭!

금화가 형태를 잃어버리며 순식간에 금가루로 화해버렸다.

“······!”

엘레나의 두 눈이 방금 전보다 더욱 크게 떠졌다.

엘레나는 오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시안이 행한 일.

이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저기 테라스 밖, 순찰 도는 로열 나이츠.

그들에게 해보라 하면 10에 4은 못 하리라.

로열 나이츠보다 뛰어난 오러 운용력.

“그럼 이건 얼마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시안은 태연하게 물어올 뿐이었다.

엘레나는 그런 시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 똑같이 1골드죠.”

“이젠 금화라는 형태도 없습니다만.”

“형태만 없어졌을 뿐, 그 안에 담긴 금은 그대로니까요. 금가루의 가치는 그대로 1골드죠. 대체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신거죠?”

엘레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고.

시안은 그때서야 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는 이 금화에 갖은 수작을 걸었습니다. 생크림을 묻혀 더럽혔고, 반으로 접어 형태를 변형시켰으며, 심지어 금화라는 모습을 떠올릴 수조차 없도록 오러를 끌어 분쇄시켰습니다.”

시안은 차분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 위에 쌓여있는 금빛의 가루.

그건 더 이상 금화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황녀님께서는 말씀하시더군요. 이 금화의 가치는 여전히 1골드다. 라고 말입니다.”

이윽고 시안의 시선이 다시 엘레나를 향했다.

“그럼 대체 왜입니까.”

그렇게 이어진 시안의 말.

“이 한낱 금화조차 갖은 수작을 부림에도 가치를 잃지 않는데. 왜 사람은 가치를 잃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엘레나의 두 눈이 다시 한 번 크게 떠졌다.

그리고 그건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놀람이었다.

“언제고 어둠의 마나에, 광기에 더렵혀질 수 있다는 이유로 다크 엘프들이 살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의 가치가 사라진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뇌리에 꽂히듯 들려오는 시안의 말.

“이 한낱 금화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요.”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뚝, 하고 굳어버렸다.

정신이 멍해지며 엘레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시안의 손바닥에 쌓인 금가루.

금화라는 형태가 사라진 금가루.

그러나 이 금가루의 가치를 묻는다면 여전히 1골드다.

금가루를 모아 다시 녹여 금화로 만들면 되니까.

그럼 똑같은 1골드의 가치를 지닌 금화가 되니까.

생크림으로 더럽혀져도.

반으로 접혀져도.

심지어 형태를 완전히 분쇄시켜버려도.

그 누가 온갖 수작을 부려놔도.

이 금화는 여전히 1골드다.

“제가 왜 다크 엘프들의 죄를 끌어안았냐고 물으셨죠.”

시안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넘을 수 없는 벽에 좌절할 수도 있고. 해도 안되는 일에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삶을 끝내고 싶을 때도 있겠죠. 하지만.”

어쩌면 나와 비슷해보여서.

과거, 가문에 있을 적.

어린 시안의 기억은 오로지 멸시와 핍박이었다.

처참한 재능에 가문에서 온갖 멸시를 받았고.

사생아라는 신분에 갖은 핍박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후작가의 망나니이자, 무능력한 놈팽이.

그러니 나는 안 된다고.

나같은 놈은 나아갈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던 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겪어온 수많은 일들 속에서 시안은 알 수 있었다.

그 어떤 수작과 더럽힘이 있어도.

그 누가 뭐라 하더라도.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는 훼손되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금화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넘어진 몸을 다시 일으키면 됩니다. 그리고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에 쌓여 괴로워할 뿐.

그래서 알려주고 싶었다.

아스란디즈에게.

다크 엘프들에게.

단지.

“그뿐입니다.”

시안은 손바닥에 쌓인 금가루를 조심스레 인벤토리에 담았다.

그리고.

“······”

엘레나는 여전히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이 멍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르···다.

엘레나가 그간 봐왔던 제국의 귀족들.

엘레나가 그간 마주했던 수많은 영주들.

그들과는 달랐다.

달라도 너무도 다르다.

사람을 품는 그릇 자체가 너무도··· 다르다.

가식이라고는 일절 보이지 않았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발언.

한낱 영지의 영주라고 생각될 수 없는 그릇이었다.

한낱 귀족가의 도련님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이건···이건 가히···.

그렇기에 엘레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콘라드가 어째서 시안을 그렇게 총애하는지.

또 황제가 왜 시안에게 관심을 두는지.

엘레나는 한동안 멍하니 시안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엘레나의 시선을 마주한 시안.

‘왜 저래?’

시안은 뭔가 싶었다.

질문을 하더니 갑자기 엘레나의 표정이 붕 떠버렸다.

마치 망치로 거하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

‘그러고보니 저번에 연회장에서 전하께서도 저러시더니.’

남매는 남매라는 것인가.

‘닮아도 이상한 것만 닮았단 말이지.’

설마하니 샤를롯도 저랬던 건 아니겠지?

시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엘레나가 정신을 차린 것인지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런데 어딘가 시안을 바라보는 눈이 심히 반짝거렸다.

‘이거··· 설마.’

라는 생각이 들던 찰나.

이윽고 엘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결혼하자는 이야기라면 미리 거절하겠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시안의 대답.

“······”

엘레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물론 시안과 결혼하고자 하는 생각은 있었다.

황태자가 총애하고 황제가 개인적인 관심을 갖는 존재.

더불어 방금 전, 시안의 모습에서 엘레나는 그 생각을 확실히 굳힐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마···.

평소의 엘레나라면 결혼 이야기를 바로 꺼냈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엔 아니었다.

오라버니가··· 그러니까, 콘라드가 절대 그러지 말라했었으니까.

제정신이 박힌 것이라면, 절대 그러지 말라 그랬었으니까.

그리고 콘라드가 남녀 간의 정에 대해 조언해주기를.

천천히 연을 만들고 친분을 쌓는 것이 먼저다.

콘라드는 그리 조언했었다.

그렇기에 이번엔 다짜고짜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 했었다.

“설마··· 정말 결혼하자는 부탁이셨습니까?”

그런데 지금 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짓는 시안의 모습에 엘레나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게 고백하지도 않았는데 차였다는 그런 말인가?

뭐, 지난 날에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 그럴 수 있다만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

벙쪄버리는 표정.

그리고 이번엔 왜인지 싱숭생숭한 기분.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어째서죠? 다들 저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데요. 오라버니와 폐하의 반대로 모두 물러났지만.”

“저희 이제 두 번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결혼하는데 몇 번 만난 것이 중요한가요?”

중요하지 않나?

아직 결혼을 해보지 않은 시안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에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하여간···.’

시안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결혼 이야기라면 미리 거절하겠습니다. 그 외의 부탁이라면 얼마든지요.”

“알겠어요. 그럼 결혼 부탁은 드리지 않을게요.”

엘레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공자님 영지에 놀러가도 되나요?”

“안 됩니다.”

“너무 단호하신거 아니예요?”

칼대답도 이런 칼대답이 없었다.

이 정도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정도가 아닌가!

엘레나는 다시 한 번 말문이 막혀버렸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거절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다짜고짜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영지에 놀라가도 되냐는 부탁이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황녀가 놀러가겠다하면 반겨야할 일이 아닌가?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절할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멍해지는 엘레나의 표정.

시안은 일말의 여지없이 고개를 저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루벤이 또 개판날려고!’

엘레나가 루벤에 오면 지랄 맞은 상황이 뻔히 그려졌으니까!

일단 레아가 엘레나를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레아는 아르나이즈의 리더인 샤를롯의 여동생.

샤를롯의 후손인 엘레나는 그런 레아의 까마득한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난 날의 경험상.

레아는 엘레나를 성녀인 아리아만큼이나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보나마나 엘레나를 갈굴 것이 뻔했고.

그걸 보다 못한 로열 나이츠가 또 나서겠지.

결국 레아와 싸움이 날 것이고.

아주 개판이 날 것이 분명했다.

그 과정에서 레아가 엘레나를 쫓아내달라 매일 같이 닥달할 터.

‘절대 안돼.’

생각만으로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 그 뿐이랴.

황녀는 제국 내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다.

그것도 황태자와 황제가 끔찍이 아끼는 황녀.

그런 여인이 루벤의 영지를 활보한다?

모르긴 몰라도 영지민들 전부가 바짝 긴장을 할 터.

제대로 할 일을 하지도 못 한 채, 매 순간 불편하게 지낼 것이 분명했다.

영지가 한동안 가동을 멈춰버릴지도 몰랐다.

그럼 그만큼 벌어들이는 골드도 멈춰버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막아야한다.

왜 엘레나가 루벤에 오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루벤에 오는 것은 막아야했다.

“생각 정도는 해보실 수 있으시잖아요.”

“음···.”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안 됩니다.”

“진짜···.”

엘레나가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결혼 이외의 다른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주시겠다면서요?”

“정정하겠습니다. 결혼이랑 영지에 오시는 것. 그 2개 빼고 얼마든지요.”

“지난 번에 먹었던 다과가 먹고 싶어서 그래요. 그 다과 맛이 자꾸 생각이 나, 황궁의 음식을 못 먹고 있는 걸요.”

“제가 루벤에 돌아가는 그 즉시. 다과를 제작해 특급 배송 마차로 신속히 배달해드리겠습니다.”

“다과는 갓 구워 따끈따끈한 것이 가장 맛있잖아요.”

“저희 영지에 제리라는 뛰어난 마도학자가 있습니다. 현재 열 보존 식기를 연구 중에 있습니다만, 연구가 끝나는 대로 가장 먼저 보내드리겠습니다.”

엘레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시안을 노려봤다.

별 다른 표정은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안은 어딘가 엘레나가 화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잠시 간의 정적.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이윽고 엘레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시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살짝 기분이 상하신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엘레나가 루벤에 오면 기분이 상하는 정도가 아닐 터.

조금 미움을 받더라도 여기서 끝내는 것이─.

“2천만 골드.”

일순간 들려오는 엘레나의 목소리.

“제가 폐하를 잘 설득해서 이번 일의 보상으로 공자님께 2천만 골드를 드리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우뚝.

시안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띠링!

《저, 저, 저 여자가 미쳤나봐욧!!!!!》

발작하는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