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카일의 비망록(2)
내 물음에 카일은 답이 없었다.
‘미안하다···.’
그저 이런 말만 반복해올 뿐이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거야? 사람들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고 느껴진거야?’
‘아니, 넌 훌륭한 리더다. 너는 사람들을 연민하며 그들을 보듬어줄 능력이 있다. 그건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이지.’
카일은 살짝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네가 없었더라면 우린 이렇게 모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네가 없었다면 나도, 이 대륙도 무너졌을거다.’
‘그러면 대체 왜! 왜 우리를 떠나야만 하는 건데!’
나는 소리쳤지만 카일은 여전히 답을 해오지 않았다.
‘많은 것을··· 알려줄 수가 없다.’
이 사실을 알면, 너희들도 위험해지니까.
카일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마지막을 말 내뱉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난 시선을 들어 카일을 바라봤다.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
처음 카일을 만났을 때.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차가운 모습.
난 그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상으로 카일을 붙잡을 수 없음을.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난 끝내 카일을 붙잡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기는 하는 거야?’
‘······ 그것도 확답할 수가 없다. 허나, 언제고 반드시 돌아오겠다.’
난 아무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카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런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툭, 말을 던졌다.
‘레아는.’
우뚝, 멈추는 카일의 발걸음.
‘레아도 안 만나보고 가려고?’
카일은 그 자리에 박혀 아무런 움직임도 내보이지 않았다.
역시나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카일은. 말없이 서 있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등을 돌린 카일을 바라보며 나는 오래토록 궁금해하던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네가 떠나려는 이유가, 네가 언제고 그리워하던 사람과 관련이 있는 거야?’
카일이 그리워하던 존재.
카일이 갑자기 떠나는 것은 여전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붙잡을 수 있다면,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카일이 떠나려는 이유가 오래토록 그리워하던 무언가와 관련되어 있다면.
조금은··· 수긍할 수 있을 거라,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또한 답을 기대를 하지 않았다.
카일은 이런 물음을 던질 때면 아무런 답을 해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카일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미련의 일환으로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니.’
이번에는 카일은 답을 해왔다.
그리고 그 대답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카일은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런 카일의 눈빛에는 더 이상의 미련도, 그리움도 없었다.
어떤 알 수 없는 결의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이곳의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다.’
카일은 그 말을 남긴 채, 홀연히 떠나버렸다.
난 카일이 떠난 장소를 멍하니 바라만 봤다.
그리고 카일은 언제고 돌아온다고 약속했지만···.
난 알고 있었다. 알 수 있었다.
카일은 다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이제 두 번 다시는 카일을 볼 수 없을 것임을.
아주 오래 전, 홀연히 떠났던 그때처럼.
그렇기에 난···.
차마 그 사실을 레아에게 말해줄 수가 없었다.
‘레아, 지금부터 내 말 잘들어.’
난 레아에게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레아가 카일을 잊어야만 했기에, 난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일에겐 오래 전부터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고.
카일은 항상 그녀를 그리워했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카일은 그녀를 만나러 갔다고.
나는 레아에게 끝내 거짓을 말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레아는 역시나 충격에 빠졌다.
식음을 전폐하며 떠나간 카일을 그리워했다.
괴로워하는 레아를 보며 나는 하루에 수 백번도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이야기해야할까.
하지만 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카일은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카일을 잊어야만 했다.
돌아오지 않을 존재를 기다리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지금은 힘들고 괴롭지만 잠깐일 뿐.
시간이 지나면 레아도 카일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뼈저리게 후회해야만 했다.
‘샤를롯, 레아가···.’
문득 찾아온 엘로디의 말.
엘로디는 나에게 그 간의 사정을 낱낱이 말해주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
레아가 왕궁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난 황급히 레아를 찾아갔고 잠들어있는 레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때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샤를롯. 전 레아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엘로디가 고개를 숙이며 말해왔다.
그리고 난··· 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레아에게 진실을 이야기 해줄걸.
아니, 아니다.
진실을 이야기 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겠지.
레아는 돌아오지 않을 카일을 계속해서 기다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처음부터 카일을 소개해주지 말았어야했다.
카일과 레아를 만나게 해서는 안되었다.
애초에 이렇게 떠날 운명이었다면.
이것이 반드시 마주해야만 운명이었다면.
카일을 우리들의 동료로 받아들여서는 안되었다.
난 그 날 처음으로.
‘카일···!’
카일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하지만 원망의 대상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의 원망은 갈 곳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그리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갈 곳 잃은 나의 원망이 한이 되어 자리잡을 때쯤.
‘샤를롯.’
떠나갔던 카일이, 나를 다시 찾아왔다.』
.
.
.
사락.
“응? 뭐야?”
시안은 저도 모르게 이렇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비망록의 다음 장.
“없어···?”
그 다음 장이 적혀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안은 계속해서 비망록의 다음 장을 넘겨보았다.
그러나 저 이후로 온통 새하얀 백지로만 가득해있었다.
그 어떠한 이야기도 쓰여져있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어렴풋이 글자가 쓰여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낙서인지 글자인지 모를 것들이었다.
천 년의 세월이 흘러 낡고 해진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쓰여져있지 않은 것일까.
“이게 말이 돼?”
어느 쪽이든 저기서 끊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한창 재밌어지는 부분에서, 제일 궁금한 부분에서 끊기지 않았는가!
“미친 거 아니야?”
이건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아르나이즈의 리더고 뭐고.
제국의 초대 황제고 나발이고.
샤를롯은 진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샤를롯을 잡아다 가두고 싶었다.
하지만 천 년전의 인물을 가둘 수도 없었을 뿐더러.
애시당초 그럴 깜냥도 되지 않았다.
엑시드(Exceed)의 기사, 아르나이즈를 대체 뭘 어쩐단 말인가.
“차라리 레아한테 그 뒷내용을 물어보면···.”
그래도 모르겠구나.
시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망록의 기록에 레아는 카일이 돌아오기 전에 잠들었다.
그리고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시안과 마주했던 것.
저 이후의 일은 레아도 알 수 없을 터였다.
해서 샤를롯을 찾아온 카일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무엇보다.
“그래서 카일이 떠난 이유가 뭔데?”
카일이 왜 이들을 떠나야만 했는지.
이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레아는 물론 샤를롯 또한 그 이유를 알지 못했─.
바로 그때.
띠링!
스마트 폰에서 경쾌한 알림음이 들려왔다.
뭔가 싶어 바라본 화면.
〈메인 스토리 퀘스트 ‘카일이 마주한 진실’을 시작합니다.〉
“카일이 마주한 진실?”
이거 저번에 했던 거잖아.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이미 클리어한 퀘스트였으니까.
다름 아닌 레아를 처음 만난 날에 받았던 퀘스트였고다.
그리고 신성 제국에서 색욕의 악마와 대적하면서 클리어한 퀘스트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미 클리어 한 퀘스트.
아니나 다를까.
띠링!
〈Error! 해당 인과가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알림음과 함께 화면 위로 오류창이 떠올랐다.
그 오류창에 시안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 이거. 원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 퀘스트였나?”
그러니까 스토리 퀘스트인 ‘카일이 마주한 진실’.
아무래도 이건 본래 이곳에서부터 시작되는 퀘스트인 것 같았다.
이 카일의 비망록을 읽음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시안은 이미 그 퀘스트를 받은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레아에게서 직접 그 내용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나이즈 전당에 천 년간 잠들어 있던 레아.
그리고 퀘스트의 흐름상 레아는 본디 소멸되어야 마땅했다.
왜냐면 당시의 ‘아르나이즈 유산’ 퀘스트.
『[스토리 퀘스트] - ‘아르나이즈의 유산’
▶ 전당을 지키고 있는 원귀(怨鬼)를 찾아 퇴치하고.
아르나이즈 카일이 남긴 유산을 쟁취하세요!』
.
.
그건 전당의 망령, 레아를 퇴치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은 퀘스트의 목적과는 달리 레아를 소멸시키지 않았다.
아르나이즈 전당에 내려져오던 동화 같은 이야기.
뛰어났던 남자.
그 남자가 그리워한 여인.
그리고 그런 남자를 탐냈던 황제.
마지막으로 남자와 정략 결혼했으나 잊혀졌던 여인의 존재.
그리고 동화 속 이야기의 진실은 남자는 카일.
남자를 탐낸 황제는 샤를롯.
남자가 그리워한 여인은 가상의 존재였으며.
남자와 정략 결혼하여 잊혀진 존재는 다름 아닌 레아였다.
하지만 동화 속 진실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고.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로 레아를 퇴치하면 이곳 황궁의 도서관에서 비로소 진실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
역시나 이 카일의 비망록을 읽음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시안은 홀로 이야기의 진실을 파헤졌다.
레아를 이해하고 또 연민했으며.
끝내 레아에게 드리운 광기를 거두어내었다.
그로써 스토리 ‘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해 레아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아로부터 ‘카일이 마주한 진실’의 퀘스트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레아 덕분에 시안은 퀘스트를 앞당겨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모바일 영주식 표현으로 인과가 틀어졌던 것.
“어쩐지, 그동안 스토리 퀘스트가 하나같이 불친절하더라니.”
시안은 그때서야 스토리 퀘스트에 내용이 일절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즉.
『[스토리 메인 퀘스트] - ‘풀리지 않은 의문’
▶성물을 찾으세요.』
<보상: ????>
.
.
.
역시나 스토리 퀘스트에 새로운 내용이 떠올라 있었다.
다만, 문제는.
“성물?”
여전히 불친절하다는 것은 변함 없다는 것이었다.
“성물이라면···.”
이름 그대로 해석하자면 성물(聖物).
말 그대로 성스러운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시안은 이 성물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었다.
다름 아닌 나태의 악마, 누르비아.
루벤을 침공했던 악마 7군주 중 하나로 누르비아는 분명 성물을 찾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랐다.
어떤 용도인지도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퀘스트에서 말하는 성물이라 함은, 악마 7군주들이 찾는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성(聖)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신성 제국.
“설마 아리아와 관련이 있는 건가?”
성녀(聖女), 아리아.
단순하게 생각하면 역시 아리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지난 날, 신성 제국에 방문했을 때 별 다른 반응이 없었으니까.
“다른 의미의 성물인건가?”
깊어지는 고민.
“머리만 더 아파졌잖아?”
어째, 머리만 더 복잡해진 기분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시안은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바로 그때.
“백작 각하. 지금 전하께서 각하를 찾으십니다.”
문 밖으로 사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루벤으로 떠날 준비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돌아가서 아리아한테 한 번 물어나 봐야겠다.”
시안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비밀 서고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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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이 백작위를 하사 받았다!
수도에서 시작된 소문은 일파만파 제국 전역으로 뻗어나갔다.
아무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는 하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소문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요, 속된 말로 뚝딱.
시안이 백작위를 하사받았다는 소문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는 것은 정말이지 뚝딱이었다.
이에 사람들 사이로 수많은 이야기가 나돌았다.
황제가 엘란두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로르실트와 엘란두르, 이 두 저울추에 무게가 기울었다.
주로 엘란두르와 시안을 엮어서 생각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 둘을 분리해서 따로 생각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소문과 이야기가 무성한 가운데.
엘란두르의 후작령에 위치한 듀라크의 집무실.
“······ 이상, 이번 행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어진 총관, 레리트의 보고에 듀라크의 움직임이 뚝, 하니 멈추었다.
집무실 전체로 묵직하게 내려앉는 침묵.
듀라크는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집무실 의자에 앉아 검지 손가락을 탁탁, 두들길 뿐이었다.
북부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행사 자리.
듀라크는 시안이 행사를 참석함에 있어 별 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시안이 행자의 주인공이기도 했거니와.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시안에게 돌아갈 곳이 없었다.
지금 루벤을 향하는 카이와 하얀 늑대 기사단.
이제 곧 루벤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조금 더 확실히 하고자 에런을 호위겸 감시로 붙여두었다.
그러니 모든 것은 완벽했다.
그 어떤 변수도 모조리 차단해버렸다.
해서 듀라크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되려 행사 자리에서 시안이 받아올 하사품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품고 있었다.
북부 전역을 뒤집어 놓았던 거대한 사건.
듀라크가 느끼기에도 시안의 공로는 압도적이었으니까.
최소 후작령의 영토 확장.
어쩌면 세금 감면의 혜택도 받을 지도 몰랐다.
듀라크는 반신반의하며 황궁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고.
그런 듀라크의 기대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엘란두르에 주어진 보상은 파격적이었다.
15개의 마을과 황실 관할 2개의 영지.
동시에 엘란두르에서 거둬들이는 향후 6개월 간의 세금을 면한다.
이건 듀라크의 예상을 깨버릴 정도의 파격적인 보상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 뒤에 들려온 내용 또한 듀라크의 예상을 산산히 깨버렸다.
시안에게 내려진 백작위.
제국에서 백작의 작위는 쉬이 볼 것이 아니었다.
한 지역에서의 최고 관리자.
즉, 패업을 이룬 제후를 가리켰다.
쉽게 말해 독립적인 세력을 일굴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
이것을 다시 말하면 시안이 엘란두르 가(家)에서 독립한 자격이 주어진 셈이었다.
“······”
듀라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물론 시안이 백작위를 받았다고하여 그것이 곧 독립적인 세력을 일구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격은 어디까지나 자격일 뿐.
본인이 싫다고 하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허나 시안이 독립적인 세력을 일굴려고 한다?
그럼 듀라크, 본인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설마하니 시안이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할까.
엘란두르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미친 짓을 할리가 없었다.
그러니 시안이 백작위를 받은 것은 그 자체로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
정말··· 문제가 되지 않는 건가?
“카이는?”
“현재 하얀 늑대 2,3,4 기사단을 대동하여 루벤으로 향했습니다.”
듀라크의 물음에 레리트가 곧장 대답해왔다.
하얀 늑대 2,3,4 기사단.
이 정도면 웬만한 백작령 수준은 아작이 날 정도였다.
여기에 카이까지 더해졌으니 루벤이 지도에서 사라지는 일은 걱정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안이 돌아갈 곳은 사라진다.
시안이 독립할 세력 또한 없어진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
듀라크는 가슴을 간질이는 이상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단 공로 행사 자체가 너무도 이상했다.
실로 파격적인 황가의 행보.
앞서 귀족들에게 과한 보상을 책정한 것도.
시안에게 백작위를 하사한 것도.
또 백작령 관할 영지로 루벤을 하사한 것도.
무엇보다 엘란두르에게 파격적인 보상을 책정한 것.
이건 마치···.
“이거 줄테니 시안과 루벤을 떼어내라?”
이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은가.
듀라크의 눈빛이 일순간 번뜩였다.
사실 일 자체만 놓고 본다면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상을 받았음을 물론.
시안이 백작위를 받은 것도 결국 엘란두르의 가문을 드높이는 일이었으니까.
이 이상으로 잘 흘러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상했다.
너무도 착착 맞아떨어지지 않은가.
마치 누군가에게 짜여진 각본처럼.
누군가 치밀하게 계획한 계획처럼.
듀라크는 말없이 탁탁, 검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들겼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하나의 사건.
“사라진 예산은 어떻게 되었지.”
“아직 추적 중에 있습니다만···.”
레리트는 고개를 숙이며 말을 흘렸다.
보아하니 아직도 그 정황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8,200만 골드가 사라졌는데도 아직도 추적을 못하고 있다라···.
“예산이 사라진 때가 언제지?”
“2주일이 조금 넘었습니다.”
2주일이 조금 넘은 시기.
그건 시안이 황궁으로 떠났을 때와 절묘하게 겹쳤다.
듀라크는 머릿속으로 말도 안되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만일. 정말로 만일.
이 모든 것이 시안이 계획한 일이었다면?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일이라면?
엘란두르에게, 자신에게 반역하고자 계획한 일이라면?
그동안 보인 모든 것들이 연기였다면?
자신은 그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라면?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 가설을 끼워넣으니···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다시 한 번 내려앉는 침묵.
“지금 당장···.”
일그러지는 듀라크의 눈썹.
“시안을 내 앞으로 끌고 오거라···!”
듀라크의 얼굴에, 분노라는 뚜렷한 감정이 떠올라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