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대립(1)
비밀 서고 밖으로 나온 시안은 곧장 콘라드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콘라드의 집무실.
“전하께서는 아까 전에 나가셨습니다만.”
하지만 콘라드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는 시종장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듣자하니 시안을 기다리다 지쳐, 황궁 밖에서 대기 중인 것 같았다.
‘비밀 서고에 그렇게 오래 있었나?’
카일의 비망록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는 했다만.
시안은 멋쩍게 웃음을 흘리며 곧장 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황궁의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자니.
꾸벅.
황궁의 마주치는 사람들이 시안에게 고개를 숙여왔다.
황궁의 고용인들은 물론. 내정관, 서기관 등등.
꽤나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 또한 시안을 마주칠 때면 고개를 숙여왔다.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백작 각하를 뵙는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충!”
심지어 로열 나이츠들 또한 시안을 마주칠 때면 경례를 해왔다.
그럴 때마다 시안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응이 안되네.’
후작가의 망나니이니 뭐니 무시당하기 바빴거늘.
정말 적응이 안되는 반응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야만 했다.
시안은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받으며 황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어느덧 시안은 황궁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황궁 밖으로 나서려던 바로 그때.
“시안 도련님.”
어디선가 시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시안은 당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호칭부터가 시안 백작 각하가 아닌 도련님.
지금 황궁에서 시안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아보자 역시나.
단단한 인상의 기사.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 에런이 시안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듀라크의 명으로 시안의 호위 겸 감시 역할로 따라붙은 에런.
분위기를 보아하니···.
에런은 계속 시안을 찾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시안이 비밀 서고에 있던 터라 찾지 못했던 것 같았다.
에런은 금방 시안의 앞에 서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안은 그런 에런을 가만히 바라봤다.
마주치는 시선.
시안은 툭, 말을 내뱉었다.
“그건 안될 것 같은데.”
그러자 에런의 표정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시안은 아무런 말없이 에런을 바라봤고 둘 사이에는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일순간 에런의 기세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그와 동시에 에렌에게서 섬뜩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 확고한 기세에는 지금 당장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무력도 불사하겠다는 에런의 의지가 느껴졌다.
기세가 오롯이 시안에게로 쏟아져내리며 상상하기 힘든 살의가 덮쳐왔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끔찍한 억제력이 감각 사이로 파고들며 죽음을 윽박질러왔다.
마스터가 뿜어내는 기세.
그것은 최상위 포식자들이 지니는 피어(Fear)와 닮아있었다.
먹잇감을 두려움에 질리게 하는 본능적인 공포.
평범한 이들은 이 기세에 짓눌려 아무것도 못했으리라.
하지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시안은 그 기세에 억눌리지 않았다.
“······!”
담담히 말을 내뱉는 시안의 모습에 에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절대로 이렇게 나올 수가 없었으니까.
시안과 에런의 격차는 까마득했다.
에런은 마스터 중급의 실력자.
아무리 시안이 더 이상 무능력한 이가 아니라할지라도 마스터의 경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스터의 기세를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는 없었다.
결코 저렇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러나 에런은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에런은 더욱더 기세를 피워올렸다.
“지금 당장 가문으로 복귀하셔야합니다.”
그와 동시에 터벅, 시안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점점 더 거세는 기세와 옥죄어오는 압박감.
바로 그때.
“그만.”
에런의 기세를 뚫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두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기억에 있는 얼굴.
로열 나이츠 제 2기사단의 단장, 예일.
로열 나이츠 제 3기사단의 단장, 필리프.
황궁을 수호하는 로열 나이츠의 단장들이었다.
둘은 싸늘한 눈빛으로 예일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윽고 둘이 에런을 향해 기세를 피워올렸다.
둘 모두 마스터 중급에 달하는 기사.
두 마스터의 기세에 에런의 기세가 순식간에 제압되면서 사그라들었다.
에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예일과 필리프를 바라봤다.
“엘란두르의 일입니다.”
에런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한 마디로 집안 싸움이니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물론 집안 싸움에 타인이 끼어드는 것은 좋지 못했다.
하물며 그 집안 싸움이 엘란두르라면 더더욱 끼어들면 안되었다.
하지만.
“엘란두르의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허나, 이곳이 황궁임을 잊은 건가 에런?”
그 장소가 썩 좋지 못했다.
아무리 엘란두르라도 황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는 에런이 물러나야함이 옳았건만.
“도련님을 데려가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관여치 마십시오.”
에런은 한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당장 황궁 소란죄를 물어도 될법한 행동이었음에도 에런은 단호했다.
이번 일은 쉬이 넘어가서는 안 되었으니까.
시안을 반드시 가문으로 돌려보내야했으니까.
물론 지금의 이 행동이 문제가 될 것임을 에런은 모르지 않았다.
아무리 엘란두르라도 황궁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허나, 그건 나중의 일.
지금은 반드시 시안을 가문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에런은 로열 나이츠의 압박에도 그 뜻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안오나 했더니···.”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에 에런은 그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에런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태양빛을 닮은 금발의 사내.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의 2인자. 황태자, 콘라드가 서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콘라드의 등장에 에런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콘라드는 그런 에런을 신경쓰지도 않고는 곧장 시안에게로 다가가갔다.
“여기서 대체 뭐하는 겐가.”
그리고는 질책하는 표정으로 시안에게 말했다.
“루벤으로 같이 가기로 해놓고 이렇게 늦으면 어떡하는가.”
루벤? 같이 가?
에런은 콘라드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시안이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콘라드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에런이 가문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시안의 답에 그때서야 콘라드가 에런을 바라봤다.
“시안을 가문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 그렇습니다.”
에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콘라드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네가 무슨 권한으로?”
“당연히···.”
“시안은 이제 엘란두르 가문의 일원이 아니네만?”
에런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시안에게 백작위가 하사된 지금.
시안은 더 이상 엘란두르의 일원이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조금 곤란한 상황이네만.”
이윽고 콘라드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루벤으로 가고자 모든 준비를 마쳤거늘. 시안을 가문으로 데려가야한다라···.”
이어진 콘라드의 말에 에런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파악했다.
유난히도 웅성거리던 황궁 밖.
그리고 루벤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는 황태자의 말.
그러니까, 시안이 황태자와 함께 루벤으로 가기로 했다···?
어쩐지.
로열 나이츠의 단장씩이나 되는 예일과 필리프가 왜 한 자리에 있나 싶었다.
“시안이 내 누이와 오래 전에 약속했던 일이었거늘.”
콘라드의 누이라 함은 다름 아닌 황녀였다.
그 말은 즉.
황태자뿐만 아니라 황녀도 같이 루벤으로 간다···?
“그게 무슨···?”
에런은 저도 모르게 콘라드를 바라봤다.
“설마하니 손님 맞이에 주인이 자리를 비운다는 말인가?”
“······”
콘라드의 말에 에런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것도 다른 가문의 일로 말인가?”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콘라드의 말마따나 황태자와 황녀가 손님으로 오는 상황이다.
그런데 주인이 자리를 비운다?
심지어 그 이유가 이제는 다른 가문이 된 가주의 명이다?
이건 말이 안 되었다.
듀라크의 명이든 나발이든.
황태자의 방문이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가야만 했다.
심지어 황녀까지 같이 방문한다면 말 다한 수준이었다.
그 어떤 말을 늘어놓아도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듀라크의 명은 절대적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안을 가문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무력이라도 써서 강압적으로 끌고 가야하나?
물론 필요하다면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 생각은 고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엘레나랑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는가? 빨리 출발하도록 하지.”
황태자와 황녀가 개입된 순간, 무력을 쓰면 그건 반역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행동에 나서자니 황태자를 거역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듀라크의 명을 거역하는 셈이었다.
에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순간.
“그러게 제가.”
문득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
“안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에런은 정말이지,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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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이 위치한 어둠의 숲.
“가주께서 한시라도 빨리 시안 공자님을 데려오라 명하셨습니다.”
에런은 그 앞에서 후작가에서 달려온 파발을 만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늦어지는 시안의 복귀에 가문에서 파발을 보내온 듯 싶었다.
“······”
하지만 에런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저 앞에 보이는 모습을 보라.
“조금만 더 가면 루벤입니다.”
“이런 곳에 영지가 있다니··· 참 신기하군.”
가볍게 담소를 나누는 두 금발의 사내.
다름 아닌 시안과 황태자, 콘라드였다.
“그러고보니, 그 유령은 아직도···?”
그리고 그 옆에서 말을 거드는 한 여인.
저 여인은 무려 제국의 황녀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다름 아닌 루벤의 방문이었다.
저기다 대고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어떡··· 합니까 단장님?”
이어진 하얀 늑대 기사의 말.
어떡하긴 뭘 어떡한단 말인가!
엘란두르에서 듀라크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그 명을 따라야했다.
그런데 그 명을 따르자니 황태자의 명을 거역해야만 했다.
듀라크의 명령은 개뿔.
아무리 듀라크의 명령이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는 법이었다!
듀라크가 직접 찾아와 황태자와 대면한다면 또 몰랐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듀라크가 직접 찾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지금 에런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없었다.
에런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따라붙는 것이 전부였다.
시안을 호위한다는 명목 하에 말이다.
그렇게 황궁을 떠나 지금.
어느덧 어둠의 숲 영역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조금 있으면 루벤에 도착한다.
이대로 시안을 루벤 안으로 들어보내는 것이 맞는걸까?
지금이라도 강압적으로 나서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러니까 반역의 죄를 저질러야 하나?
아니면 듀라크의 명을 거슬러야 하나?
나보고 대체 뭘 어쩌라는 걸까.
에런은 심히 고민했지만.
“일단은··· 계속 따라간다.”
에런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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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숲은 제국 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름 뜻 그대로 어둠으로 가득찬 숲이었다.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천 년전, 악마와의 최후의 전투 이후로 변질된 땅.
그 때문에 어둠의 숲은 마기(魔氣)로 가득 들어차있었으며 간간히 마족들이 소환되는 어둠의 땅이었다.
그렇기에 오래 전부터 제국에서도 이 땅을 정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대로 두면 제국에도 필시 위협이 될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현재 보이는 어둠의 숲.
제국은 어둠의 숲 정벌에 번번히 실패만 반복했고.
끝내 어둠의 숲 정벌을 포기하게 된다.
제국은 어둠의 숲을 금기 구역을 지정.
그 이후로 누구도 찾지 않는 땅이었다.
그렇게 어둠의 숲은 사람들에게서 버려지고 잊혀졌다.
오직 일부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삶을 영위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안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 앞으로 어둠에 삼켜진 숲의 풍경이 비쳐보였다.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건만.
마치 심연의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곳에 영지가 있는 겐가?”
아니나 다를까 의구심을 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콘라드가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당장 지금 어둠의 숲 전역에서 느껴지는 마기(魔氣).
이 마기에서 느껴지는 불길함은 어디서 느껴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으니까.
시안이야 애초에 마(魔)를 다루기도 했거니와.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정겨운 곳이었다.
하지만 콘라드를 비롯한 로열 나이츠들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로열 나이츠들은 물론.
시안을 따라온 하얀 늑대 기사단들과 에런 또한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시안은 잠시 시선을 고정시켜 에런을 바라봤다.
지금쯤이면 듀라크의 명이 전달되었을 터.
그러나 에런은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 어쩔거야.’
황태자와 황녀가 오겠다는데 일개 기사 따위가 뭐 어쩐단 말인가.
물론 마스터 중급이자 하얀 늑대 기사 단장이 어찌 ‘따위’겠냐만은.
황태자와 황녀 앞에서는 따위가 맞았다.
시안은 속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럴려고 저를 끌어들이신 거군요?”
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
바라본 그곳엔 엘레나가 시안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었다.
그리고 루벤을 한 번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콘라드와는 달리 엘레나는 별 달리 긴장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뭐를 말씀이십니까?”
“하얀 늑대 기사 말이에요. 그 방패 막이로 저를 내세우신거 아닌가요?”
“설마요. 제가 그렇게까지 파렴치하지는 않습니다.”
시안은 전혀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어쩐지. 공자님께서 먼저 제안을 주신다 했어요.”
하지만 엘레나는 그닥 믿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뭐, 딱히 신경쓰지도 않는 모습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어 엘레나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둠의 숲이 뿜어내는 마기에도 긴장하지않던 엘레나였거늘.
엘레나는 약간 두려움에 떠는 듯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유령은··· 아직도 있나요?”
시안은 그때서야 왜 엘레나가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레나가 말하는 유령은 다름 아닌 레아였다.
레아는 샤를롯의 여동생이자, 엘레나의 오랜 선조.
그리고 지난 날 엘레나가 루벤에 방문했을 당시.
엘레나는 레아에게 털렸던(?) 경험이 있었다.
뭐, 처음엔 엘레나는 당연히 레아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아가 샤를롯의 여동생이라는 것을, 자신의 오랜 선조임을 믿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때 레아가 뭐라 그랬더라.’
황궁에 있는 비밀의 방 어쩌고 한 것 같았는데.
딱히 관심있게 듣지 않았던 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 아무튼.
“있기야 있습니다만···.”
루벤에는 당연히 레아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대로라면 둘이 또 다시 만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잠깐. 그러고보니···.’
생각이 이쯤 흘러가자 자연스레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다.
다름 아닌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금발의 사내.
황태자, 콘라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의 엘레나는 레아가 샤를롯의 여동생임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콘라드는 아니었다.
콘라드는 레아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엘레나와 마찬가지로 콘라드 또한 레아의 머나먼 후손.
‘황녀님처럼은 아니더라도 황태자로서 대하지는 않을텐데···.’
현 황제에게도 나부랭이라 칭하는 레아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레아에게 예를 갖추라 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까마득한 후손은 맞지 않은가.
솔직히 말하면 이건 콘라드가 레아에게 예를 갖추어야했다.
‘이걸 전하께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아니, 설명한다한들 콘라드가 믿어줄까?
어째 벌써부터 개판이 되버리는 루벤의 풍경이 보이는 건 왜일까.
‘젠장···.’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에런의 말문을 막아버린 것까지는 좋았다만···.
깊어지는 고민.
‘······ 에이, 모르겠다.’
시안은 금방 생각을 떨쳐버렸다.
고민해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 뿐더러.
저 멀리 보이는 루벤의 풍경.
이제 와 고민해도 늦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시안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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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느덧 가까워진 루벤의 풍경.
일순간 시안의 뒤쪽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저게 무슨···?”
그와 동시에 콘라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콘라드가 눈을 부릅, 뜨며 루벤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단 콘라드 뿐만이 아니었다.
뒤 따라온 로열 나이츠들 또한 모두 놀란 눈을 짓고 있었다.
뭐,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
그러니까 가까이서 마주한 루벤의 모습.
그건 결코 평범한 영지라 볼 수 없었으니까.
일단 루벤을 단단히 에워싼 ‘넌 모찌나간다! 티타늄책! Lv.7’
저건 아무것도 모르는 엘레나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아니, 범상치 않은 수준이 아니라 미친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 주위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해자 Lv.7
사각 지대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천상의 경비탑 Lv.7까지.
“저, 저게 루벤이라고요···?”
그 때문인지 엘레나 또한 놀란 눈을 뜨고 있었다.
지난 번에 보았던 루벤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그 짧은 기간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루었다?
아니, 이 정도면 발전 수준이 아니었다.
거진 영지 자체가 완전히 탈바꿈된 수준.
“세상에나···!”
엘레나가 받는 충격은 더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루벤은 제국의 수도 다르칸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아니, 되려 반대였다.
다르칸이 비교조차 안될 지경이었다!
“맙소사···.”
“어찌 이런···!”
콘라드와 엘레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그리고.
“오!”
시안 또한 루벤의 자태에 탄성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도 처음 봤으니까.
엘란두르의 예산으로 현질을 직접하긴 했으나 그 결과를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직접 그 결과를 확인한 바.
“역시 현질은 현질인가.”
투자가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물론 시안의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뭐, 어쨌든.
“가시죠.”
시안은 당당히 걸음을 내딛었다.
오랜 만에 보는 루벤의 모습 때문일까.
아니면 남의 돈으로 현질한 뿌듯함 때문일까.
괜시리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돌아가십시오!”
그 기분도 잠시였다.
일순간 성난 외침이 시안의 귓가로 파고들어왔다.
“저희는 시안 영주님이외의 그 어떤 명령에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재차 들려오는 외침.
그 외침은 루벤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또 시안에게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루카스···?”
루벤의 경비 대장을 역임하고 있는 루카스.
쩌렁쩌렁, 하게 울려퍼지는 이 외침은 분명 루카스의 것이었다.
시안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떠보이며 루벤을 자세히 바라봤다.
현질로 탈 바꿈된 웅장한 루벤의 자태.
그 앞으로 일련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영지민들이 마중을 나온 것인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모두 중무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루벤의 기사단 혹은 병사들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모두 흰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마치 설원의 눈과도 같은 흰 갑옷.
하지만 루벤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보급된 갑옷은 모두 검은색이었다.
그러니 저들은 루벤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런 이들 앞에 서있는 한 존재.
낯이 익으면서도, 또 익숙지 않은 인물.
엘란두르 가문의 장자이자 시안의 맏형되는 이.
“카이···?”
카이 엘란두르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