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 자승자박(1)
위고의 두 눈동자가 일순간 멍해졌다.
한스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얼이라는 것이 빠져버렸다.
아니, 말이 안 되지 않은가.
말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표현이 딱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소식이 전달되기까지 루벤과 이곳 제이른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동부 끝자락에 위치한 루벤과 중앙에 위치한 제이른.
조금이라기 보다는 꽤나 멀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소식이 느릴 수는 있었다.
아무리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소문이 퍼지는 절대적인 시간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막 소식이 들려온 참이었다.
크라우드의 병력이 루벤 앞에 당도해 진을 쳤다는 소식이 말이다.
정확히는 어둠의 숲 인근 영역에 진을 쳤다는 소식이었다만.
“난 영지전이 끝나고 바로 오는 길이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출타하는 어이와 승천하는 정신.
위고는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
위고는 귀를 잠시 의심했지만 생각 외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고?
이게 제대로 된 말로 성립되려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영지전이 시작하자마자 끝이 났다.
그러니까, 크라우드 병력이 진을 쳤다는 파발이 출발한 직후.
그와 함께 영지전이 끝나버렸다.
그럼 얼추 말이 되었다.
영지전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할 파발은 이미 출발해버렸으니까.
그런데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영지전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아무리 짧아도 몇 주.
길면 몇 개월에서 수 년까지 걸리는 전쟁.
물론 제국법 상 90일 간 진행되는 것이었다만.
결코 순식간에 끝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아.”
그 순간 위고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설마··· 루벤이 패배한 건가?”
다름 아닌 패배한 것이 루벤이다.
이러면 어느 정도 말이 되었다.
애초에 전력 차가 상대가 되지 않던 상황이지 않은가.
승부의 행방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스가 위고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그 때문.
아마··· 시안이 포로로 잡힌 것 같았다.
따라서 한스는 시안의 몸값을 벌기 위해 용병일을 하고자 위고를 찾아온 것이고.
이러면 얼추 말이 되었다.
그러니까···.
“음? 아니네. 영지전은 루벤의 승리로 끝이 났어.”
지금 들려오는 한스의 이야기보다는 더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
위고는 정말이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또한 한스의 말을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망이라도 난 겐가?”
진짜 이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네. 영지전은 루벤의 승리로 끝이 났어.
하지만 한스는 단호했다.
애시당초 한스가 거짓말 할 이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바라본 한스의 두 눈은 거짓말을 하는 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몸은 늙고 쇠약해져있었으나 두 눈은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수 십년 전에 돌풍 용병단을 이끌었던 그때의 눈빛.
아니, 그때보다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모든 말이 진실이라는 뜻.
“대체 어떻게···?”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런 위고의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것일까.
“그러니까···”
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제국 동부에 위치한 어둠의 숲.
“백작 각하. 진군할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이어진 기사의 보고에 크라우드 백작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의 숲 영역이 시작되는 경계선.
그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도열해있었다.
잘 정돈된 제식과 휘황찬란한 갑옷의 군대.
모두 크라우드 백작가의 군대였다.
병사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기세로 눈을 번뜩이고 있엇다.
그런 병사들이 시야 끝에서 끝.
빈틉없이 도열해있었다.
보병과 궁병이 각각 6천. 3천.
중기갑병이 2천.
기병 1천과 더불어 기사 500까지.
여기에 보병과 궁병을 각각 1천씩 더 끌어 모았다.
하여 도합 1만 5천.
어마어마한 규모의 군대가 지금 이 자리에 도열해있었다.
막강한 자본력으로 무장한 최정예 병사들.
이 군대 앞에서 루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라.
비단 루벤뿐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가문과 영지와 대적해도 밀리지 않을 전력이었다.
“진군하라!!”
뿌우우우─!!
크라우드 백작의 우렁창 소리와 함께 뿔피리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척척, 칼같은 제식에 맞춰 병력이 진군을 시작했다.
육중한 갑옷에서 울려퍼지는 절제된 소리.
병사들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숲의 땅이 작게 진동을 해왔다.
그렇게 크라우드의 군대는 어둠의 숲 영역으로 발을 내딛었다.
제국마저 포기해야만 했던 금기의 땅, 어둠의 숲.
그런데 막상 마주한 어둠의 숲은 생각보다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딱히 음침한 구석도 없었고, 별 다른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게 숲이 맞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숲이라 함은 보통 나무들이 울창해있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나무가 그리 많지 않았다.
군데군데 자라나 있었다만, 딱히 숲이라 정의내릴 정도로 울창하지 않았다.
뭔가 싶었지만 크라우드 백작은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나무의 모습.
“아무래도 누군가 벌목을 한 것 같습니다.”
나무를 누군가 모조리 베어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루벤의 사람들이겠지.
아마 땔감으로 쓰기 위해 벌목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멍청하군.”
크라우드 백작은 비릿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천혜의 방벽을 제 스스로 없애버린 꼴이지 않은가.
추위에 견디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다만.
그 덕분에 루벤으로 향하는 길이 더없이 편했다.
정말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계속 진군하라!”
뿌우우우우─!
크나큰 뿔피리 소리와 함께 크라우드의 병력이 진군을 계속했다.
그리고 역시나 진군의 속도는 거침 없었다.
해서 다시 한 번 시안의 멍청함에 감탄을 하고 있는 그때.
키엑─! 키에엑!
키르르륵─!!
한쪽 어귀에서 소름끼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
그곳엔 어떤 존재들이 몰려있었다.
자그마한 키와 짧은 팔 다리.
우악스럽게 생긴 얼굴.
고블린.
그것도 얼추 수백에 달하는 고블린들이었다.
키에에에에엑!!
고블린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크라우드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고블린의 습격이었다만 사실 예상된 바이기도 했다.
1만 5천에 달하는 크라우드의 군대.
기척을 숨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으니까.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땅이 작게 진동할 정도거늘.
그 때문에 고블린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크라우드의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방금 전보다 한층 짙어진 괴성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괴성에 겁을 먹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블린이었으니까.
하급 중에서도 최하급에 속하는 몬스터, 고블린.
고블린은 막말로 건장한 성인 남성이 적절한 무기만 갖추어진다면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허약했다.
몬스터라 불릴 수 있는 수준의 마지노선.
그것이 바로 고블린이었다.
그렇기에 딱히 문제가 될 수준이 아니었다.
“처리해.”
크라우드 백작은 턱짓으로 명령을 내렸다.
이윽고 병사들 몇몇이 움직였고 크라우드 백작은 관심을 돌렸다.
그리고.
“끄아아아악!”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고블린의 비명이 아니라.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크라우드 백작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키엑─! 키에엑!
키르르륵─!!
크라우드의 병사들을 도륙내고 있는 고블린들을 볼 수 있었다!
피로 물들인 듯한 시뻘건 광채.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짙어진 광기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새까만 증오가 기지개를 피듯, 사방을 잠식해온다.
“......!!”
크라우드 백작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저, 저게 고블린··· 이라고?”
저건 고블린이 보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게 고블린이면 몬스터의 정의는 새롭게 해야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명백한 현실.
“전투 준비!!”
“평범한 고블린이 아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때서야 기사들이 나서며 병사들의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런데.
“뭐, 뭐야!”
“얘네 왜 이렇게···!”
예상과는 달리 고블린 무리들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고블린은 평범한 고블린과는 달랐다.
마수화가 진행된 고블린이자 오우거를 사냥한 기록이 있는 마수(魔獸).
물론 늙고 병든, 수명이 거의 다한 오우거였지만 그래도 오우거는 오우거.
어둠의 숲에 기거하는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결을 달리했다.
그래도 천만다행히 고블린은 고블린이었던 걸까.
“허억···! 허억···!”
“이게 무슨···!”
1만 5천의 군대 앞에서 고블린들은 모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라!”
“이깟 일에 동요하지 마라!”
기사들은 병사들을 다독이며 정비를 거듭했다.
피해는 있었지만 병사들 또한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아직 군대는 건재했으니까.
고블린들은 결국 이 압도적인 군대 앞에 쓰러졌으니까.
그렇게 크라우드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진군을 하려던 그때.
취익─! 취이익!
취이이이익─!!
어디선가 괴기한 콧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런 콧바람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흉악한 돼지의 얼굴을 한 몬스터, 오크.
그런데 일반적인 오크와는 달랐다.
고작 1m 크기의 오크와는 다르게 지금 보이는 오크는 무려 2m는 넘는 거구였으니까.
취이이이이익─!!
그 거구에서 터져나오는 콧바람은, 그야말로 광포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그리고 역시나.
취이이이이익─!!
취익─! 취이익!
오크들은 영역을 침범한 크라우드 병사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해왔다.
“모두 전투 준비!!”
“대열을 벗어나지 마라!!”
그리고.
“끄아아아악!”
“크허헉···!”
오크는 방금 전의 고블린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아니, 이게 오크가 맞는 건가?
오우거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배, 백작 각하! 위험합니다!”
“이런 젠장! 대체 뭐가 어떻게 되먹은 곳이야!!!”
크라우드 백작 소리를 지르며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오크를 섬멸할 수 있었다.
아무리 마수의 오크라 해도 1만 5천의 대규모 군대는 쉬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피, 피해상황은?”
“그게··· 2천의 전력이 손실되었습니다.”
이제는 1만 5천이 아니었지만.
이어진 보고에 크라우드 백작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고블린과 오크를 상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영지전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전력 중 2천이 손실되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하지만 크라우드 백작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말이 안되는 손실이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전력은 많았다.
이 정도만 해도 루벤을 밀어버리기엔 충분했다.
분명···
키르르르륵─!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괴한 괴성.
크라우드 백작의 고개가 괴성이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에 떡하니 보이는 거대한 크기의 몬스터.
“트롤···?”
크라우드 백작의 정신이 아득해져갔다.
#
한편.
“왜 안와?”
시안은 어리둥절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식을 접한지가 한참이나 되었거늘.
와도 진즉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는데 어떻게 된 게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설마···오다가 도망친 건 아니겠지?”
시안은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정말··· 곤란했다.
그러면 전쟁 배상금이 그대로 날라가는 꼴이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레민턴을 빌미로 어그로를 끌어야하나?
···싶은 생각까지 들던 찰나.
“영주님! 크라우드 병사들입니다!”
병사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바라본 시야.
그곳엔 까마귀 문양이 새겨진 갑옷들이 루벤의 영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쟤네 왜 저래?”
어째···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갑옷은 여기저기 피칠갑이 되어있었고.
들고 있는 무기는 군데군데 이가 나가있었다.
또한 언뜻 보이는 병사들의 얼굴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있었다.
한 마디로 만신창이.
저게 군대인지, 거렁뱅이들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갈 정도였다.
“아무래도 오면서 마수들에게 습격을 당한 듯 싶습니다.”
들려온 루카스의 말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어제까지 싹 정리해놨잖아.”
“잔당들이 조금 남아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어둠의 숲의 마수는 끊이질 않지 않습니까.”
“그거야 뭐···.”
“무엇보다 군대 단위로 움직이는 터라 시선도 많이 끌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루카스의 말마따나 마수들과 전투를 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거 하나 처리 못하고 저렇게 되었다고?”
“그러게 말입니다.”
시안과 루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크라우드의 군대를 바라봤다.
뭐, 아무튼.
“상황이야 어찌되었든. 루벤 앞까지 온 거니까 영지전 시작한 거 맞지?”
“영지전 규율 상 그렇습니다. 침략자는 저쪽이니 선전포고를 할 의무도 저쪽에 있습니다.”
“좋았어.”
시안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로써 명분은 확보된 셈.
“어떻게 병사들을 바로 출병시킬까요?”
“아니. 됐어.”
루카스의 말에 시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굳이 루벤의 병사들을 출병시킬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 처음부터 시안은 제대로 된 영지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영지전의 진짜 목적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름 아닌 엘란두르의 숨은 꿍꿍이를 진작에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루벤의 힘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엘란두르도 알지 못했고.
그로써 카이와 하얀 늑대 기사단이 패퇴했다.
엘란두르로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일.
해서 엘란두르는 본격적인 전면전의 나서기 전.
루벤의 탐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그 수작질이 바로 지금.
크라우드와의 영지전이었다.
자신들의 전력은 철저하게 숨긴 채 다른 이를 이용해 목적을 달성한다.
아마 영지전이 끝나면 관련한 사항이 듀라크에게 보고될 터였다.
‘손 안대고 코 풀겠다 이거지.’
그러니 그 수작질에 어울려줄 필요는 없었다.
진짜 적은 패를 까지도 않았는데.
이쪽이라고 패를 깔 이유가 있을까.
“그럼 어떻게···?”
루카스의 물음에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계획은 루벤의 방벽을 믿고 질질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루벤을 둘러싼 ‘넌 모찌나간다! 티타늄책 Lv.7’의 방어는 그야말로 뚫리지 않는 최강의 방벽이었으니까.
그러니 성문을 걸어 잠근채 농성을 하려던 계획이었다.
그로써 크라우드 병사들이 제풀에 지쳐있을 때 한번에 일망타진하려던 계획.
이쪽의 패를 까지 않고 전력을 감추면서 승리할 수 있는 계획.
물론 시간이 질질 끌릴 수밖에 없다만은.
전력을 감추려면 어쩔 수 없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크라우드의 거렁뱅이 같은 모습을 보니···.
꽤나 괜찮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이쪽의 패를 까지도 않으며.
또 질질 끌지도 않고 단번에 영지전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적군이라지만 같은 백작인데. 꼴이 저래서야 쓰나. 세미르!”
시안은 저 멀리 보이는 세미르를 불렀다.
#
“이 갑옷을··· 시안이 보내왔다?”
“그, 그렇습니다.”
크라우드 백작은 눈앞에 보이는 갑옷과 투구를 바라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갑옷과 투구.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종류의 것이었다.
장인 중의 장인이 만든 갑옷이라 해도 이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한 마디로 다시 없을 진귀한 보물.
“이걸 대체 왜···?”
그렇기에 크라우드 백작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귀한 갑옷을 왜 적군인 자신에게 보낸단 말인가.
“그, 그것이···.”
기사는 잠깐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루벤의 전령이 전하길, 멀리서 보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고귀한 백작께서 어찌 그런 몰골을 할 수 있는가. 같은 백작으로서 마음이 아프다. 비록 적이나 백작으로서의 예우를 표하고 싶다···. 라고 말했습니다.”
“허어···.”
크라우드 백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훗날, 이 소식을 접한 제국의 귀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시안의 크나큰 배포에 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쟁 속에서도 적장을 예우할 줄 아는 품격.
망나니라 알려진 시안의 이미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품위와 품격을 지킬 줄 아는 진정한 귀족.
귀족 사회에서 시안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탈바꿈 되는 배포이자 아량이었다.
하지만.
알 만한 이들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안의 옆에 있던 루벤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저기,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갑옷 보이지? 저거 크라우드 백작이니까. 저 부근으로 신기전의 화력을 집중해.”
저건 다 개수작이라는 것을!
키이이이이잉···!
시안의 말과 동시에 신기전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의 파동이 터져나왔다.
푸슈슈슈슈슉!!
그리고 신기전에서 불꽃이 터져나오며 장전된 화살을 모조리 하늘로 쏘아보냈다.
하늘을 뒤덮는 화살의 소나기.
그것은 저 멀리,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갑옷 있는 곳.
“세미르한테 빛 반사 잘 되게 만들어달라했더니. 역시 세미르는 세미르네.”
크라우드 백작이 있는 곳을 향해 집중 포화되었다!
콰콰콰콰콰쾅!!!!
꽈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발과 함께 숲 전체가 떨려왔다.
시야를 가리는 진한 먼지 구름.
그렇게 피어난 먼지 구름은 한참의 시간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들려온 시안의 목소리.
“S등급의 갑옷을 입혀놨으니까 죽진 않겠지?”
죽으면 안 되는데.
그러면 배상금을 뜯어낼 사람이 없잖아.
시안은 뭐라뭐라 중얼거리면서 조마조마하게 먼지 구름이 흩어지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그런 시안을 지켜보던 루벤의 사람들.
“······”
“······”
“······”
시안은 사실 악마 8군주가 아닐까···?
잠시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