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틀어짐(2)
루벤의 갑작스러운 회군.
그것은 제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기는 커녕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봄이 정확했다.
“엘란두르 관할령을 3분의 1을 점령하지 않았나···?”
“파죽지세로 밀고 있는데 갑자기 왜···?”
루벤은 엘란두르를 압도적으로 밀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수 백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엘란두르의 아성.
그 아성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었으니까.
루벤은 회군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 밀고 올라가면 끝이었다.
루벤은 엘란두르의 후작가를 점령하고 승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정작 들려온 소식은 루벤의 회군.
그것도 완전한 회군이었다.
“대체 왜···?”
“아니, 갑자기 왜···?
사람들은 그런 루벤의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거 처음부터 다 짜고 친 거 아니야?”
“역시··· 보여주기 식이었나?”
일부 사람들은 짜여진 각본이라 생각했다.
신생 가문인 루벤의 화려한 신고식을 위한 각본.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들 어쨌거나 시안은 엘란두르였으니까.
그런 시안을 위해 엘란두르가 판을 짜준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럿 나오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있지만···.”
“엘란두르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욱 많았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루벤이 회군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건 그렇지만···.”
그러나 그들 또한 갑작스러운 루벤의 회군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루벤의 행보.
그렇게 제국의 정세가 발칵, 뒤집혀 있는 가운데.
어둠의 숲에 위치한 루벤.
또 루벤의 영주성에 위치한 아리아의 방이자 그 방에 딸려있는 커다란 욕실.
첨벙.
아리아는 물이 가득 담겨 있는 욕조에 손을 집어 넣었다.
이내 적당한 온도임을 확인하고는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성녀이자 초월적인 미(美)의 소유자.
실오라기 하나 걸쳐있지 않은 아리아의 몸은 다른 의미의 초월적인 미(美)를 풍기고 있었다.
아리아는 다리부터 천천히 욕조에 몸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몸 전체를 욕조에 집어 넣었을 때.
“흐아···.”
아리아는 탄성을 내뱉어버렸다.
살짝, 풀려있는 아리아의 표정과 눈.
욕조에 뭐라도 장치해놓은 것일까.
아니면 물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너무 좋아···.”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지 몸이 녹아내리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흐어···.”
계속해서 새어나오는 탄성.
로라가 들었다면 ‘성녀님! 그게 무슨 할아버지 같은 소리에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라며 기겁을 했을 터.
하지만 로라는 루벤을 구경한다고 나가있는 상황이었다.
다나의 요리를 먹겠다고 싱글벙글도 그런 싱글벙글도 없었다.
“나한테는 성녀로서의 체면을 지키라할 땐 언제고.”
아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젖은 백금발의 머리를 정리했다.
“아, 맞다. 그러고보니 엘리가 만들어준 약초가 있었는데.”
정확히는 약초라기보다는 피부가 좋아지는 욕조제였다.
듣자하니 루벤의 특산물로서 샤를롯 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들었다.
특히나 귀부인들에게는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고.
“여기 어딘가 두었던 것 같은데.”
아리아는 욕조제를 찾아 몸을 일으켰다.
아니,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불쑥.
갑자기 욕실의 바닥을 뚫고 사람의 머리가 튀어나왔다.
백은색의 머리와 초점 없는 회백색의 눈동자.
고혹적인 미모의 여인이자 원귀.
-이거 뿌려줘?
레아가 아리아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뭐, 뭐, 뭐야···!”
갑작스러운 레아의 등장에 아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일어나기 직전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바닥에 넘어졌을 터였다.
레아는 아리아에게 다가와 무언가를 건네었다.
그리고 그런 레아의 손에 들린 무언가.
-이거 뿌려주냐고.
그건 다름 아닌 엘리가 만들어준 욕조제였다.
그리고 아리아가 막 찾으려 가던 것이기도 했다.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 놀랐잖아!”
-응? 나 오는거 몰랐어?
“그렇게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알아!”
-시안은 잘만 알던데? 기척을 감췄는데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더구만. 그런데 넌 기척도 안 감췄고, 나랑 상극인데도 왜 몰라?
레아는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아는 눈을 부라리듯 소리쳤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목욕하는데 왜 들어온거야?”
-아니, 요 앞을 지나가는데 네가 중얼거리는 게 들리잖아. 딱 보니 목욕하는 것 같고. 욕조에서 몸 지지는데 나오면 기분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좀 도와주려고 했지.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게! 좀 내버려 둬!”
-이 년은 챙겨줘도 지랄이네.
“누가 챙겨달래? 그런 건 챙겨주는 게 아니라─.”
-아 됐고. 그래서. 뿌려줘 말아.
레아는 손에 들고 있는 욕조제를 다시 한 번 들이밀었다.
아리아는 그런 레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욕조에 몸을 푹, 담그며 말했다.
“······ 뿌려줘.”
-기집애, 새침하기는.
레아는 그러면서 욕조 이곳저곳에 욕조제를 뿌려주었다.
욕조제가 풀어지며 사아아, 하는 거품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퍼져나가는 포근하고 향긋한 향기.
레아 때문에 울컥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어딘가 괜시리 기분 마저 좋아지는 향기는 피부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좋아지는 욕조제인 것 같았다.
-야, 그런데 넌 뭐하러 이거 쓰니?
“이 욕조제?”
-그래. 피부도 좋은 년이 뭘 더 좋아지겠다고.
레아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리아의 몸을 바라봤다.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순백색의 피부.
목욕물과 거품에 가려져 어깨 선까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완벽한 피부였다.
“원래 좋을 때 관리해야하는 거야. 안 좋아지고 관리하면 이미 늦는다고.”
-그건 그렇긴 한데. 신성력 덩어리인 네가 피부가 안 좋아질리가 있긴 해? 뮤리엘은 두 달인가? 세 달 동안 세수 한 번 안해도 뾰루지 하나 안 나더만.
그래서 재수없긴 했지만.
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건 뮤리엘이니까 가능한 일이었고. 난 뮤리엘이 아니잖아. 난 너무 관리 안하면 뾰루지 같은 건 나. 물론 금방 사라지지만.”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아리아.
그러나 뮤리엘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했다.
뮤리엘은 신녀이자 대륙을 구원한 6명의 영웅, 아르나이즈.
아르나이즈 앞에서 아리아는 신성력 좀 강한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은 빼다 박았는데 뭘.
“얼굴은 얼굴이고. 난 뮤리엘이 아니야. 왜 자꾸 나랑 뮤리엘을 비교하는 거야?”
아리아는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하긴, 얼굴만 빼다 박았지 다른 부분은 뮤리엘에 비하면 처량하긴 해. 신성력도 뮤리엘에 비하면 그닥 강하지 않고. 무엇보다···.
그러면서 레아가 아리아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욕조물 아래, 아리아의 가슴 부근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레아가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치려던 찰나.
-특히나 여기는 처량하다 못해 박살이 나있네.
레아가 참으로 안 되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 뭐? 내, 내 가슴이 뭐 어때서!”
-어떠긴? 몰라서 묻는 거니? 난 만졌는데 이게 가슴인지 등인지 몰랐다 야.
“그, 그 정도는 아니거든! 그리고 나 정도면 작은 거 아니거든? 이 정도면 상위권 중에서도 상위권이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리아는 결코 작다고 볼 수는 없었다.
-나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하지만 레아와 비교해서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짙은 사념과 어둠 그리고 옷 위로 가려져 있었지만··· 딱히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레아는 위에서 아래로 아리아를 내려다 보았다.
이것이 너와 나의 차이라는 듯, 레아는 재수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아리아는 그런 레아에게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할 말이··· 없었으니까.
“흥. 그렇게 커봤자 나이 들어서 쳐지기만 하지.”
-그러게 나도 걱정이다. 천 년이 지났는데, 언제 쯤 쳐질라나···.
“······”
-시안한테 마구 괴롭힘 당하면 쳐질라나?
“뭐, 뭐?”
아리아는 순간 당황해보였다.
당황을 넘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저, 저게 무슨 남부끄러운 소리란 말인가.
아무리 아리아가 천덕스러운 성격이라고는 하나 저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 몰랐니? 원래 만지면 탄력을 잃는단다.
하지만 레아는 거침이 없었다.
어째,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원귀라 그런가.
조신함 따위는 개나 줘버린 모습이었다.
하기사 있다고 한들 아마 960년도 전에 갖다 버렸겠지.
아리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그리고 너. 그렇게 작으면 시안이 싫어한다?
“무, 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안이 여기서 왜, 왜 나와? 그리고 안 작아! 네가 무식하게 큰 거 뿐이야!”
-난 평균이란다. 그보다 작은 너는 평균 미만.
“아니라고!”
-네네. 그러시겠죠~.
레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어보였다.
평소 레아와 그닥 다르지 않은 모습이거늘.
지금은 저 모습이 왜 이렇게 짜증나게 느껴질까.
바로 그때.
“성녀님. 안에 계세요?”
욕실 밖에서 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벤을 구경하겠다고 나갔던 로라.
-응! 여기 안에 있어! 들어와!
아리아 대신 레아가 답을 해보였다.
그런 레아의 말에 달칵, 욕실의 문이 열리며 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레아님도 같이 계셨어요? 그런데···.”
로라는 욕조에 같이 있는 레아와 아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두 분이 욕조 안에서 뭐하고 계신 거예요?”
-아, 그냥 여인의 자존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여인의 자존심이요?”
-그러니까 평균치가 어느 정도냐는 건데. 어. 잠깐. 가만히 있어봐.
갑자기 레아가 로라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로라와 아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평균 이상이라더니··· 너 로라보다도 작은데?
빠직.
그 순간 아리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죽어보자.”
-미안해서 어쩌나. 난 이미 죽어있는걸.
“너 진짜···!”
-에베베베.
“죽여버리겠어!”
-난 이미 죽었다니까 글쎄?
아리아는 부들부들, 주먹을 쥐어보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진짜, 진짜 인정하기 싫었지만···.
개겨봤자 질 것을 알았으니까.
“······ 두고 봐. 언젠가 꼭 성불시켜버릴테니까.”
-어머, 꼭 기다리고 있을게. 한··· 500년 정도 기다리면 되니?
“나이 많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자랑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너도 나이 먹으면 좀 커져있을지도?
“이익···!!”
아리아는 발끈하며 소리쳤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지금은 개겨봤자 질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금. 다음에 만날 때는 아닐거다.
아리아는 굳은 복수를 다짐하며 고개를 돌렸다.
“······ 그보다 로라. 루벤 구경은 다 끝낸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말씀 드릴 것이 있어서 다시 돌아왔어요.”
“말해줄 거? 나한테?”
“네.”
로라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진 말.
“아까 시안 백작님이 돌아오셨더라고요.”
아리아는 물론 레아의 고개 또한 같이 기울어졌다.
“응? 시안이?”
-지금?
“아뇨. 아까요.”
로라의 답에 레아와 아리아의 고개가 다시 한 번 기울어졌다.
아까 돌아왔다라니?
그러니까 돌아왔다가 지금은 다시 떠났다는 뜻?
“방금 전에 다시 떠나셨다고 하던데요.”
정말로 그런 뜻이었던 것 같았다.
잠깐의 정적.
“이게 진짜!”
벌떡.
아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 욕조 밖으로 걸어나왔다.
“성녀님? 지금 어딜···?”
“시안한테!”
아리아는 크게 소리쳤다.
바라본 아리아의 표정은 상당히 화가 나있었다.
뭐, 충분히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아무리 억지로 오겠다고 했지만 아리아는 루벤의 손님.
하지만 아리아는 손님으로서 방치되어있다시피 했으니까.
물론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이유이긴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오고 싶다고 우긴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심 섭섭하고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들려온 로라의 말.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할 것이지! 심지어 아무런 말도 않고 또 그냥 가?”
아리아는 이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리아는 성큼, 욕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분노와 서운함, 어떤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아마 그래서일까.
“서, 성녀님! 옷은 입고 가셔야죠!!!!”
로라가 기겁을 하며 아리아를 뒤따라나갔다.
#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앞서 가던 다이애나가 잠시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변을 드리운 울창한 숲의 풍경.
그리고 마기(魔氣)의 힘이 피부 끝으로 느껴지는 어둠의 숲.
‘어둠의 숲에 있기는 했구나.’
수인족들의 왕국은 결국 어둠의 숲에 있었다.
‘뭐, 위치를 숨기는데 어둠의 숲만한 곳은 없긴 하지.’
제국마저 포기한 금기의 구역.
대륙에서 어둠의 숲을 수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꽤 멀리 이동했네.’
그리고 같은 어둠의 숲이라고는 하나 그 거리는 굉장히 멀었다.
지금 이곳도 루벤에서 꽤나 많은 거리가 떨어져있었다.
당연히 시안이 찾았던 기존의 왕국과도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거리로만 따지면 거진 이틀을 꼬박 새야 닿을 수 있었다.
시안이 마혼무영보를 극한으로 사용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거리.
제국의 국경은 진즉에 넘어서 있었다.
시안은 고개를 돌려 루카스에게 물었다.
“루카스. 병사들은 어때?”
굉장히 먼 거리였고 또 어둠의 숲은 어둠의 숲이었다.
오면서 마주한 마수 무리들만 해도 꽤나 많았다.
하지만 어둠의 숲에서 살아온 짭밥이 있는 것일까.
“큰 문제 없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셔도 문제 없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루카스.
시안은 그런 루카스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루벤의 병사들은 일상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엘란두르와 전쟁할 때보다 더 편한 듯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 수는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또한 켄드릭과 세라 그리고 마법 병단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모두 루벤에 남아있었다.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니까.’
회군을 했다고는 하나 그것이 전쟁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루벤과 엘란두르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그리고 공격을 루벤만 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루벤에 시안이 없는 지금.
엘란두르가 병력을 모아 루벤을 쳐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를 기회로 여겨 루벤을 치는 전략을 할 수도 있었다.
물론 현질로 덕지덕지 쳐바른 루벤의 방벽.
그리고 레아가 있었기에 쉽게 함락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는 건 있으니까.’
해서 시안은 켄드릭을 비롯한 병사들과 기사들.
그리고 세라와 마법 병단을 루벤에 남겨두었다.
이 정도면 혹시 모를 변수가 발생하더라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터.
아무리 못해도 시안이 루벤에 올 때까지 버틸 여력은 충분했다.
해서 현재 시안이 대동한 전력은 루카스를 비롯한 병사 1,000
루벤의 기사인 흑사자 기사단 100명.
마지막으로.
“야··· 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
겁많은 성녀와 그녀를 보좌하는 여사제였다.
켄드릭을 비롯한 병사들을 루벤에 두고 다시 떠나려던 찰나.
갑자기 아리아가 헐레벌떡, 뛰어와 시안을 붙잡았다.
홀딱, 젖은 백금발의 머리.
어째 목욕하다 말고 뛰쳐나온 것 같았지만··· 뭐, 아무튼.
‘야! 나도 데려가!’
아리아는 다짜고짜 자기도 데려가달라며 소리쳐왔다.
그리고 시안은 당연히 거절했다.
엘란두르 관할령을 공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엘란두르와 전쟁을 하러가는 길이었다.
어쩌면 본격적인 전쟁이 터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곳에 아리아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아리아가 발목을 잡거란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발목을 잡을 여인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는 어디까지나 타국의 성녀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외교적인 문제로 불거질 수 있는 일이었다.
시안은 완강히 거절했으나 어째서인지 아리아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네가 저번 작위식에서 그랬지. 엘란두르 후작한테서 루슈리아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그런데?’
‘그럼 엘란두르가 악마 7군주와 관련이 있는 거 아니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시안도 내심 그런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긴 했었으니까.
다만, 확신할 수는 없어 의심 정도로만 여길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건데?’
‘악마가 관련되어있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니, 신성 제국에서도 이를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야.’
뭐··· 이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악마 7군주가 관련되어있다면.
아리아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잠깐의 고민.
‘그래라 그럼.’
시안은 아리아의 동행을 허락했다.
엄밀히 따지면 엘란두르와의 전쟁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국경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해서 지금.
시안의 곁에 아리아가 찰싹, 달라붙어있었다.
그 때문에 마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마혼제법 100%를 달성해도 이 모양이니.’
몇 번이나 떨어지라 말을 해도 들어쳐먹지를 않았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잖아.”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아직 거리가 있나보지. 아니면 마법으로 공간을 감췄다던가.”
“마법으로 공간을 감춰? 그게 가능해?”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드래곤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아리아는 드래곤이니 뭐니 그런 건 알지 못했다.
시안이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뭐, 이렇게 따라붙은 이상 설명을 해주긴 해야했지만···.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다.
안겨있는 팔뚝으로 덜덜, 거리는 아리아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렇게 무서우면 그냥 루벤에 있지. 대체 왜 따라온거야?”
“내, 내가 언제 무서워했다고 그래? 그, 그냥··· 상성이 안맞을··· 뿐이야.”
“얼씨구. 벌벌, 떨리는 몸이나 어떻게 하고서 그런 말을 하지? 그보다 너. 저번에도 똑같은 말 하지 않았냐?”
아리아는 왜인지 답을 해오지 않았다.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두려움에 듣지 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만.
“하아···.”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아무래도 도착할 때까지 이럴 것 같았다.
‘약한 척 하는거야 뭐야.’
솔직히 아리아 정도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마혼제법을 100% 달성했음에도 들끓는 마기.
괜히 뮤리엘의 환생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리아는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에 속했다.
그런데 아리아는 어둠의 숲에만 나오면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 마기(魔氣) 이외에 다른 것을 느끼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어둠의 숲이 생겨난 배경은 과거 천 년전.
악마들과 최후의 전투 이후로 생겨난 숲이었다.
악마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악의(惡意)만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악의(惡意)로 변질된 것이 지금의 어둠의 숲.
어둠의 숲에 드리운 마기는 사실 악의(惡意)가 세월에 변형된 것이 지금의 마기라는 학설도 있었다.
한 마디로 악마의 기운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냥 가설만은 아닌 것이 시안도 마기 안에 잔재된 악의(惡意)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잔재된 것이기에 악의로서는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시안은 근원의 마(魔)를 다루기에 느낄 수 있었지만, 켄드릭은 물론 레아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아는 신성력 그 자체인 성녀.
아마 본능적으로 마기 속의 악의를 감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 언제··· 도착해···?”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지만.
시안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얼마나 더 가야합니까?”
그런데 왜일까.
“······”
다이애나는 왜인지 답이 없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보이는 시안의 모습.
그러니까 시안 옆에서 찰싹, 달라붙어있는··· 아니, 안겨있다시피한 백금발의 미녀.
‘대체 왜 신성 제국의 성녀가···.’
다이애나는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수장,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신성 제국의 성녀가 어떤 인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모습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지.
아니, 말이 안되다 못해 상상도 못할 일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성녀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시안에게 안겨있는 것일까.
설마 둘이···?
하지만 성녀에게 연인이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무엇보다 성녀를 연인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일이던가?
다이애나는 도무지 시안이라는 자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시안을 바라보는 다이애나의 표정은 멍해있었다.
그리고 그런 다이애나를 바라보던 시안.
‘왜 저래?’
시안은 다이애나가 왜 저러나 싶었다.
바로 그 순간.
“음?”
일순간 시안의 두 눈이 치켜떠졌다.
감각 사이로 걸리는 기묘한 무언가.
그와 동시에 부스럭.
한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때서야 다른 이들도 인기척을 감지했다.
시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끄으으윽···!”
어떤 한 사내였다.
사내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상처를 심하게 입은 것일까.
새빨갛게 물든 옷 사이로 뚝뚝,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쏟아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사내는 어떻게든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그러나 시안의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비단 시안뿐만 아니라 아리아, 로라, 루카스, 루벤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사내를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
다이애나만이 부릅, 떠진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레스!”
아니나 다를까 다이애나가 앞으로 쏘아지듯 뛰쳐나갔다.
아무래도 저 사내의 이름이 흐레스인 것 같은데···.
“흐레스?”
시안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바로 그때.
“길드장의 직속 정보관입니다. 길드장의 심복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안의 옆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그곳엔 루벤의 암살 교관인 커너가 서 있었다.
한때 그림자 달 길드의 특급 암살자였던 커너.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길드장과 같이 다니는 심복 중에 심복입니다. 안 그래도 길드장이 혼자인 것이 이상하다 싶긴 했습니다만···.”
커너는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사내의 모습.
“흐레스가 어째서···.”
커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다이애나의 심복인 흐레스.
한 마디로 적은 아닌 것 같았다.
시안은 흐레스가 있는 곳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겼다.
“끄윽···!”
가까이서 본 흐레스의 상태는 굉장히 심각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있는 것은 물론.
상처 부근에서는 심장 박동에 맞춰 피가 꿀렁꿀렁,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털썩.
결국 흐레스가 바닥에 쓰러졌다.
다이애나가 황급히 쓰러진 흐레스에게 다가갔다.
“흐레스! 어찌된 일이야! 이건 대체···!”
그런 다이애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흐레스가 눈을 희미하게 뜨며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도, 도망··· 치십··· 시오··· 쿨럭!”
흐레스는 피를 왈칵, 토해내며 말을 이어갔다.
“하, 하얀 늑대···! 기사단이··· 지금···.”
힘을 잃어가는 목소리.
희미하게 떠진 흐레스의 두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