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46화 (246/322)

246화 - 수인족(1)

“하아···! 하아···!”

아리아가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몸을 비틀거렸다.

시안은 그런 아리아의 어깨를 잡아 부축해주었다.

아리아의 가녀린 몸이 시안의 가슴께로 살포기 기대어졌다.

아리아의 이마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화사한 백금발은 어느덧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역사상 가장 강대한 성녀.

그러나 결국 한 명의 인간이었고, 또 이렇게 여리고 여린 여인이었다.

신의 힘은 무한하나 그 힘을 사용하는 자는 엄연한 인간.

가진 것을 비웠으면 다시 채워야하는 시간 또한 존재해야하는 법이었다.

“고생했어.”

아리아는 말할 힘도 없는 것인지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여, 여긴···.”

“끄으윽···!”

이윽고 죽어가던 수인족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많은 수인족들이 정신을 차리며 일어났지만, 아쉽게도 모든 수인족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죽음과 싸우는 아리아의 강대한 신성은 가히 신의 기적이라 부름직 했다.

그러나 죽음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미약하게나마 생명의 불씨가 살아있으면 이를 다시 지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꺼진 불씨를 다시 점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죽은 생명에 다시금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일.

아르나이즈인 뮤리엘조차 그 일은 불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존재는 딱 둘.

천지만물을 굽어살피는 신(神).

그리고 순리를 역행하는 사령술사(死靈術士)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뭐, 사실 아리아의 신성력도 순리라 볼 수는 없겠다만.’

솔직히 지금 수인족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이 광경.

이것도 그냥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때문일까.

“내, 내가 어떻게···?”

“난··· 분명 죽었는데?”

되살아난 수인족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저기. 저기 봐.”

일순간 한 수인족이 한 쪽 어귀를 가리켰다.

수인족들은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인 것은 한 쌍 남녀.

다름 아닌 시안과 아리아였다.

루벤의 영주와 신성 제국의 성녀.

그러나 수인족들이 보기엔 그저 인간의 남녀일 뿐이었다.

심지어 시안의 모습은 자신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던 인간과 비슷한 외모의 인간이었다.

“크르르···!”

수인족들이 시안을 향해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런 수인족들의 경계에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리아가 되살렸다고는 하나 그 과정을 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안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죽이려했던 하얀 늑대 기사단 또한 인간.

수 백년간 세상과 등진 수인족들에겐 둘 모두 똑같은 인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시안은 생각을 마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다이애나의 부탁을 받고 온 사람입니다.”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자 용인족(龍人族)인 다이애나.

다이애나라는 이름에 수인족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이애나?”

“그게 누구지?”

수인족들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 그럴 수야 있었다.

다이애나가 수인족의 일원이라고 한들, 수인족들이 한 두명도 아니고.

어떻게 그 이름을 일일이 외운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역시나 다이애나는 용인족이었으니까.

드래곤의 특색을 지닌 용인족.

수인족들의 사정은 잘 모르나 흔치는 않은 종족임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안을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는 수인족들.

곰, 호랑이, 개, 말, 늑대 등등.

다양한 동물들의 형상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 중에 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용인족은 소수의 종족이었다.

게다가 천 년전, 세상을 구원한 아르나이즈 노에미.

노에미가 바로 용인족이었다.

아마 수인족 내에서도 용인족은 특별한 위치에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다이애나란 이름을 모른다는 건 조금 의아한 부분이었다.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바, 방금··· 방금 뭐라고 하셨소?”

어디선가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목소리에 걸맞게 희끗한 머리의 노인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노인처럼 보이나 노인은 아니었다.

거북이와 상당히 닮은 듯한 노인.

“파벨 장로님?”

수인족들 중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파벨은 떨리는 눈빛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방금 뭐라고···.”

파벨은 다시 한 번 시안에게 물었다.

시안은 뭔가 싶으면서도 그런 파벨에게 답했다.

“다이애나의 부탁을 받고 왔다고 했습니다만.”

“······!”

그러자 파벨의 눈이 부릅, 떠졌다.

다이애나라는 이름.

사실 파벨에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저 이름이 원래는 무엇이었는지 파벨은 알고 있었다.

“루, 루나님이···.”

용인족의 루나.

파벨은 루나가 인간 사회에서 다이애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나?”

그리고 이번엔 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안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인지도 확실하지 않은 무엇이었다.

“루나···? 루나라면 설마···?”

“그 루나를 말씀하시는 거요 파벨 장로?”

그런데 수인족들은 알고 있는 이름인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이, 이게 무슨···?”

한 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을 비롯한 파벨과 수인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인 달빛을 닮은 은발의 여인.

“다이애나?”

“루나··· 님?”

시안과 수인족들의 입에선 서로 다른 이름이 내뱉어졌다.

#

“그러니까··· 원래는 다이애나가 아니라 루나라는 이름이었다는 겁니까?”

상황을 정리하고 모인 이들.

시안의 물음에 다이애나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시안의 예상대로 용인족은 흔하지 않은 종족이었다.

그리고 수인족 내에서도 특별한 위치에 있는 종족이기도 했다.

“전대 대족장의 따님이었고요.”

정확히는 대족장의 혈족으로서 아르나이즈 노에미의 혈통.

“······ 네.”

즉, 다이애나는 노에미의 머나먼 후손이었다.

수인족들을 이끄는 대족장.

이는 다크 엘프의 숲지기와 같은 위치로서 인간 사회로 치면 국왕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대족장의 딸이라 함은 공주의 지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떠난 겁니까?”

그럼에도 다이애나는 수인족의 사회를 떠났다.

암흑가에 발을 들여 끝내 암흑가의 정점에 올라섰다.

공주라는 신분을 버리고 범죄자 집단의 수장이라니.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

다이애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시안의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어떤 사연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난 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이애나는 별로 말하고 싫어하지 않는 눈치인 것 같았다.

저렇게까지 말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캐물어서 무엇할까.

‘이제 와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이미 지난 과거가 무에 중요할까.

다이애나든, 루나든.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든, 수인족의 공주이든.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시안은 시선을 돌려 파벨이라는 노인을 바라봤다.

“하얀 늑대 기사단이 왜 수인족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겁니까?”

엘란두르가 여기서 하려는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파벨이라 불린 수인족.

파벨은 거북이의 특색을 지닌 귀인족(龜人族)으로서 수인족의 장로였다.

희끗한 머리와 자글한 주름은 인간의 노인과 상당히 닮아있었다.

그러나 거북이의 수명을 생각하면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을 터.

괜히 수인족의 장로라 불리는 것은 아닐 터였다.

“······”

파벨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수인족인 파벨이 보기엔 똑같은 인간이었으니까.

하얀 늑대 기사단이든, 흑사자 기사단이든.

파벨의 눈엔 똑같은 인간이나 다름 없었다.

물론 파벨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은 같은 종족임에도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유일한 종족.

같은 종족이되 사실상 다른 종족이었다.

따라서 나쁜 인간의 종족이 있는 반면.

선한 인간의 종족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을 파벨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세상을 등진 수인족이었지만 귀인족인 파벨이 살아온 세월은 상당히 길었으니까.

그렇기에 결국은 같은 인간이라는 종족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인간은 쉽게 믿어서 안되는 종족임을 파벨은 너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말해줘 파벨.”

루나··· 아니, 다이애나는 그렇지 않아보였다.

다이애나는 시안이라는 인간을 믿고 있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의 부탁을 받고 도움을 주러왔다는 말.

“그것이···.”

파벨은 끝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시안은 수인족들을 도와준 것은 확실했으니까.

죽어가던 수인족들을 되살려준 것을 파벨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정확히는 인간이 맞는건가···? 의심이 드는 미모의 여인.

지금 시안이라는 인간 옆에 있는 인간의 여인이 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저 여인 또한 시안이라는 자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파벨은 결심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저희를 습격한 인간들은 성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물?”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물을 요구한다는 파벨의 말.

그리고 시안은 성물이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천 년전에 뮤리엘이 남긴 성물.

또 뮤리엘이 교황청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맡겼던 성물.

설마 뮤리엘이 성물을 맡긴 이가 카일이 아니라 노에미였나?

시안은 다시 파벨에게 물었다.

“성물을 가지고 뭘 하려고요?”

“저희도 그것까지는 잘 모릅니다. 사실··· 저희는 성물이 뭐에 쓰는 것인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도 잘모릅니다.”

파벨은 고개를 살며시 고개를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그저 사명처럼 지켜왔을 뿐이죠.”

“사명이요?”

“혹시 아르나이즈 노에미님을 아십니까.”

시안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6인의 아르나이즈 이름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파벨 또한 진심으로 물은 것이 아니었던 듯 곧장 입을 열었다.

“천 년전, 노에미님은 수인족들이 살 수 있는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 저희 수인족들에게 성물을 꼭 지켜달라,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노에미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이후부터 저희 수인족은 사명처럼 성물의 존재를 지켜왔죠.”

어째, 파벨이 말한 성물은 뮤리엘의 성물이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한 뮤리엘은 자신의 성물을 노에미에게 맡긴 것 같았다.

‘왜 카일이 아니라?’

이 부분은 조금 의아하긴 했다.

성물을 반드시 지켜야했으면 카일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텐데 말이다.

아직은 풀리지 않은 의문.

시안은 다시 파벨에게 물었다.

“그런 성물을 엘란두르가 왜 달라고 요구하는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또한 사명처럼 성물을 지켜왔으나, 왜 지켜야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터라···.”

파벨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보였다.

또한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어거지로 얻어낸 정보이고, 교차 증언을 할 대상도 없어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가만히 있던 다이애나가 한 발 나서보였다.

그리고 방금 들려온 다이애나의 말.

아무래도 정보를 벌써 캐낸 것 같았다.

그러니까시안이 넘겼던 하얀 늑대 기사단의 부단장, 케이든의 입을 열게 만든 것 같았다.

어쩐지 갑자기 왜 혼자 이곳에 왔나 싶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입을 열게 했어?’

확실히 전문가는 전문가인 모양이었다.

“성물을 찾는 이유는 레이첼이라는 자의 부탁 때문이라고 합니다.”

“레이첼?”

“잠깐, 레이첼이라면···.”

다이애나의 말에 시안은 물론이고 아리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다름 아닌 레이첼이라는 이름.

그 이름은 황혼 교파의 수장이자 전대 추기경의 이름과 똑같았으니까.

그리고 색욕의 악마, 루슈리아와 관련이 있을거라 추측되는 인물이었다.

다만, 갑자기 종적을 감춰버린 터라 추측으로만 남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여기서 들려올 이름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레이첼이 성물을 찾고 있다? 대체 왜···?”

“그것이···.”

다이애나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주저하는 표정과 머뭇거리는 몸짓.

이걸 말해도 되는 건지 상당히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시안은 그런 다이애나를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이애나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악마 부활··· 이라고 했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다이애나는 곧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안 되었으니까.

악마라니 그 무슨 말도 안된다는 소리란 말인가.

악마들은 천 년전, 아르나이즈들에 의해 사라졌다.

그리고 무려 천 년동안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모로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걸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괜히 말을 꺼내 혼동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고 들은 것을 안 들었다 할 수는 없어 말한 것 뿐이었다.

“아무래도 고문 끝에 정신이 나가버려 헛소리를 내뱉은 것 같습니다. 고된 고문을 하다보면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이애나는 그저 정신 나간 헛소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수장, 다이애나.

그런 위치에 있다보면 거짓된 정보를 수없이 접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시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비단 시안 뿐만이 아니었다.

“야, 이거 설마···.”

아리아 또한 이 일을 쉽게 넘기지 않았다.

시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벨의 이야기에 따르면 수인족의 성물은 뮤리엘의 성물이었다.

뮤리엘이 성물을 카일이 아닌 노에미에게 맡겼고, 그 성물이 지금까지 전해져내려오고 있었다.

어째서 카일이 아닌 노에미에게 맡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뮤리엘의 성물은 현재 수인족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성물을 찾고 있는 레이첼.

지난 날, 소멸된 것이라 생각되었던 루슈리아의 기척.

마지막으로 악마 부활.

“케이든이 뭐라고 했는지 최대한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헛소리라도 상관없으니 모조리요.”

어째, 상황이 상당히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

수인족들이 모여사는 왕국.

그 한적한 어딘가.

“아직 성물의 위치를 특정하진 못했다.”

듀라크는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듀라크의 말을 받는 한 여인.

백합을 닮은 머리색과 뒤로 곱게 땋인 머리를 한 여인.

“쉽게 찾을 거란 생각은 안했습니다만··· 그래도 좀 늦어지네요.”

“정확히는 특정하긴 했다. 하지만 저항하는 과정에서 한 놈이 빼돌렸는지 어느새 사라졌더군. 계속 추적 중이니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레이첼이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미소 지어보였다.

듀라크는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다 툭, 말을 내뱉었다.

“그보다 거래 내용은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죠. 저희는 거래에 따른 대가를 톡톡히 돌려 준답니다. 그 이후는··· 책임지지 않지만요.”

레이첼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보였다.

듀라크는 그런 레이첼을 가만히 바라봤다.

“설마 저희의 능력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음··· 그럴까봐 저희들의 힘을 살짝 보여드렸는데··· 아직도 의심이 드시는 건가요? 대공자는 만족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어진 레이첼의 말.

듀라크는 그때서야 레이첼을 향한 시선을 거두었다.

“······ 찾으면 다시 연락하지.”

그리고는 차분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나갔다.

레이첼은 듀라크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듀라크는 완전히 떠나갔고.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 뒤를 이어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여인이었다.

수수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인간의 여인.

레이첼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확실한 것이 좋으니까요. 괜히 그때처럼 일을 그르쳐서는 안되잖아요?”

“······”

여인은 아무런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마치 레이첼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잠깐의 침묵.

“수 백년도 전의 일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네?”

“당연히 저야 모르죠. 하지만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요. 지금 당신과 같은 이유죠. 아니, 우리와 같다고 해야하나요?”

레이첼의 물음 아닌 물음에 여인은 코웃음을 쳐보였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주제에.”

“그래도 알 건 다 알고 있답니다.”

레이첼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어보였고.

여인은 그런 레이첼을 바라보다 혀를 차보였다.

“쯧, 좋아. 그땐 우리의 명백한 실수였고, 지금의 네 계획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니까. 다만, 이 일이 끝나면 루벤인지 뭔지. 그 곳은 반드시 내가 처리할거야.”

엘란두르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루벤.

현재 루벤을 어찌할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봄이 옳았다.

“물론이죠.”

그러나 레이첼은 별 다른 의문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었으니까.

존재가 갖는 죄의 근원,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그때의 일 때문에 이 망할 년이 아직도 굴복을 하지 않고 있어.”

여인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지만 힘을 온전히 되찾는 그날엔···.”

여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흉측한 악의(惡意)가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에서 쥐어짜낸 듯한 광기.

나태(Pigritia)의 악마, 누르비아.

지난 날, 루벤을 습격했으나 시안에게 쫓겨나듯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악마 7군주.

【그 새끼는 내가 반드시 갈가리 찢어주겠어.】

누르비아의 얼굴이 끔찍한 악의(惡意)로 물들어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