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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249화 (249/322)

249화 - 최후의 드래곤(2)

품 속에서 들려온 스마트 폰의 알림음.

그러나 시안은 스마트 폰을 차마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끔찍한 압박감.

최상위의 포식자들만이 지닐 수 있는 권능, 피어(Fear).

지금 이 압박감은 그 피어와 닮아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피어는 먹잇감을 공포에 질리게 한다.

그로써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게 함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지금 이 기운은 아니었다.

오로지 기세만으로 존재를 짓눌러 죽인다.

생명체에 각인된 본능.

학자들은 이를 드래곤 프레셔(Dragon Pressure)라 정의했다.

쿠구구구궁─!

짓누르는 억제력이 점점 강해졌다.

마혼제법을 100% 달성하면서부터 웬만한 억제력은 시안을 억제할 수 없었건만.

과연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일까.

호흡을 들이쉬고 내뱉는 과정이 힘겹다.

시안을 둘러싼 공기가 무게를 지니며 전신을 무겁게 짓눌러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괜찮았다.

하지만 그 호기심을 과하게 자극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시안은 압박감을 떨쳐내며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여기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건 불가하다.

따라서 입을 닫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고 곧이 그대로 답을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수인족들의 위기를 외면한 드래곤, 카르제.

왜인지 모르겠지만 호기심이 충족되면 카르제는 더 이상 시안과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 같지 않았으니까.

찰나의 고민.

“카일.”

시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카일의 후예입니다.”

그러자 카르제의 기세가 일변했다.

전신을 내리 누르는 압박감이 사라지며, 무심하던 카르제의 눈동자에 놀람의 기색이 깃들었다.

잠깐의 정적.

[카일···.]

카르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라본 카르제의 눈은 오래 전의 일을 회상하듯 차분히 잠겨있었다.

[그 이름은 이미 죽어져 사라진 운명이다.]

그리고 재차 들려온 카르제의 말.

아무래도 카르제는 시안의 말을 쉬이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카일은 천 년전에 죽었고 천 년의 세월 동안 카일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아르나이즈들의 후예들은 그 명맥을 이어왔지만 카일은 아니었다.

쉽사리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에 제 힘을 보셨지 않으십니까.”

마냥 그럴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카르제의 두 눈이 다시금 시안에게로 향했다.

아까 전, 시안이 사용했던 마(魔)의 힘.

그것은 분명 카르제의 기억 속에 있는 힘이었다.

비록 천 년이라는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카르제는 잊지 않았다.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경이로운 힘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실로 인간이라고는, 법칙에 구속된 같은 존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강함.

그렇기에 카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그마한 인간.

이 인간은 그때의 인간이 아니다.

그때의 인간과 비교하면 너무도 초라하다.

또 그렇기에 후예라는 말도 믿기 힘들었다.

그와 같은 힘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초라해도 너무도 초라했으니까.

카르제는 가만히 시안을 바라봤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카르제는 시안을 향했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무심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성물의 위치를 알고 싶다고 했었나.]

카르제가 다시금 무심한 어투로 물어왔다.

시안은 갑자기 카르제가 왜 저러나 싶었다.

아니, 카일의 후예라 헀으면 뭐라도 반응을 보여야하지 않겠는가.

거짓말 같으면, 구라치지 마라. 네 까짓게 무슨.

조금이라도 믿는다면, 어떻게 네가···? 그렇다면 증명해봐라.

뭐, 여타부타한 반응이라도 보여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카르제는 아무런 반응도 내보지 않았다.

이건 마치 아무렴 어떻냐는 듯한 태도였다.

구라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시안은 심히 의문이 들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정적.

[악마들이 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카르제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천 년전의 상황을 미루어보면 또 다시라는 말은 맞았다.

그런데 그 느낌과는 달랐다.

“또 다시라 하심은···?”

시안이 묻자 카르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 끝내 우려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카르제의 무심한 눈은, 시안이 아닌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악마들은 끝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지.]

“······?”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에도 악마가 나타난 적이 있었어?’

물론 카르제는 ‘아주 오래 전’이라 표현했다.

그러니까 천 년전의 일이라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카르제는 분명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이후’라 했다.

그 말은 즉.

아르나이즈들이 죽은 이후에 발생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처음 듣는 일인데?’

그런데 시안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시안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악마가 나타난 것은 오로지 천 년전의 일.

그 이후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랬다면 악마가 천 년전의 존재이니 뭐니 하는 말은 없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면 대륙 전체가 발칵, 뒤집혔을 일이었다.

반드시 기록으로 그 사실이 남아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악마들이 나타났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륙에는 다시 한 번 큰 혼란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설 이들은 이미 죽어 사라져있었지. 하지만 그들의 후예는 남아있었다.]

[대륙은 그 후예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힘을 모았다.]

여기서 그들은 역시나 아르나이즈를 칭했다.

그렇기에 후예라 함은 아르나이즈의 후예들.

[허나, 그 위기 속에서도 단 한 명의 후예만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일의 후예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강대했던 존재. 그러나 그의 후예는 없었다. 그의 후예가 남아 있었다면··· 아마 샤를롯의 아이가 죽는 일도 없었을테지.]

카르제는 여전히 무심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잠깐.’

샤를롯의 아이가 죽어···?

샤를롯의 아이라 함은 곧 샤를롯의 후예.

그리고 샤를롯의 후예라 함은 곧 제국의 황제를 의미했다.

저 말은 즉.

제국의 황제가 죽었다는 뜻이었다.

물론 황제도 인간이었기에 결국은 죽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듣자하니 악마와의 사투로 인해 죽은 것 같았다.

그리고 제국의 역사상 딱 한 번.

황제가 수명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수 백년 전에 닥쳐온 제국의 존망이 달린 큰 위기.

그리하여 제국의 황제가 피살되었던 모종의 사건.

그로써 샤를롯의 검술이 소실된 사건.

‘잠깐. 그때라면···?’

시안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왔다.

그런 시안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럼에도 그들은 악마들과 싸웠다.]

카르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다시금 대륙에 등장한 악마들.

아르나이즈들이 없는 대륙에 그들을 막을 존재는 없었다.

허나, 악마들이 미처 예상치 못한 것들이 있었다.

[나 또한 대륙의 위기를 두고볼 수만은 없었지.]

천 년전, 멸종했을 거라 생각했던 드래곤, 카르제의 존재.

당시의 카르제는 고작 수 백살의 드래곤이었다.

건장하다 못해 팔팔한 성룡인 카르제였다.

[나는 그들의 후예와 힘을 모아 싸웠다.]

하지만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아르나이즈들의 후예들은 어디까지나 후예.

아르나이즈들과 비교해서는 역시나 모잘랐다.

또한 카르제가 성룡이었다고는 하나 결국은 혼자였다.

악마 7군주들을 상대하기엔 여러모로 부족했다.

그럼에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

정확히는 악마들이 예상치 못했던 것.

[성물의 힘이 없었더라면··· 나 또한 그때 죽음을 맞이했을 터.]

뮤리엘이 남긴 성물.

그 성물이 악마들의 힘을 약화시키지 않았더라면 대륙은 끝장이 났을 터였다.

언제고 다시금 악마들이 돌아올 것을 예견한 뮤리엘.

그들이 남긴 유지는 아직 남아있었다.

[대륙은 다시 한 번 악마들의 위협으로부터 평화를 지켜내었다.]

그렇게 싸움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일단 샤를롯의 후예, 제국의 황제가 피살되었다.

제국 전체가 몰락할 뻔한 대위기.

[비록 그 또한 거짓된 평화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악마들이 언제고 다시 올지 모른다는 일이었다.

하여, 그 일이 있은 직후.

[그들의 후예들은 성물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성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악마들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

먼 훗날, 다시금 악마들이 찾아온다면 이 성물부터 찾을 터였다.

그리고 만일 이와 관련한 기록이 존재한다면 그 위치는 쉽게 발각될 터였다.

그렇게 성물이 악마들의 손아귀에 넘어간다면···

아르나이즈들이 없는 세상.

온전한 힘을 개방한 악마 7군주를 막을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해서 모든 기록을 지워버렸다.

성물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물론, 악마가 침공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수인족들과 함께 이곳에 자리했다.]

그 과정에서 수인족들이 세상을 등졌다.

인간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던 수인족들이 등을 돌렸다.

시안은 그때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성물을 지키는 것이 수인족들의 사명이라는 파벨의 말.

또한 수인족들이 왕국을 옮긴 이유.

천 년전의 기록과 현재의 수인족 왕국의 위치가 다른 이유.

게다가 수 백년 전의 악마 침공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던 이유까지.

그 모든 것이 이 때문인 것 같았다.

세상으로부터 성물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위해서.

그리하여 언젠가 다시 찾아올 악마들로부터 성물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

하여, 지금 카르제는 수인족들의 수호자임과 동시에.

[그리고 지금까지 그 성물을 지켜왔지.]

성물의 수호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수인족의 수호자가 아니라 성물의 수호자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그 말과 함께 카르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시안은 그런 카르제를 기다렸고, 이내 카르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물은 현재 레비스 숲에 있다.]

시안은 레비스 숲이 어딘지는 몰랐다.

보아하니 수인족들이 살아가는 지역 어딘가인 것 같았다.

그 위치야 파벨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이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안은 빠르게 움직여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엘란두르는 성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테니까.

엘란두르보다 먼저 성물을 확보하려면 지금 당장 움직여야했다.

그런데 시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한 가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거라.]

다름 아닌 지금 보이는 카르제의 모습.

자리에 드러누워 움직이지 않는 고룡.

‘대체 왜···?’

시안은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수인족들의 수호자이자 성물의 수호자, 카르제.

카르제는 수호자로서 수 백년 전에도 악마들과 맞서싸웠다.

아르나이즈들의 후예들과 힘을 모아 악마들을 몰아내었다.

그럼 지금도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이번에도 그 몸을 일으켜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다시금 악마들이 등장했음에도 카르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성물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망각한 채, 성물을 방관하고 있었다.

무심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와는 달리 늙었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안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카르제의 무심한 눈빛이 시안에게로 향했다.

“왜 수인족들을 외면하고 계신 겁니까.”

시안을 향하는 카르제의 눈빛.

그 눈빛은 강대한 존재라 생각될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있었다.

[삶을 선호하는가 인간이여. 그 찰나의 깜박임을.]

이윽고 카르제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회피할 수 없는 일을 늦추기 위해 그토록 인고의 시간을 보내왔으나··· 그 끝없는 굴레 속에서 변한 것은 없었다.]

카르제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무심’이라는 감정에 기반한 눈빛이 아니었다.

삶에 미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천 년의 세월 속에서 젖어든 타성.

[한 때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끝내 마주하게 된 건 필멸(必滅)의 운명뿐이었지.]

[수많은 이들이 운명을 바꾸기 위해 발악했으나··· 결국은 아무도 해내지 못했다. 결국 필멸(必滅)의 운명에 스러져 사라졌을 뿐이지.]

카르제는 무심한 눈빛을 무심하게 돌렸다.

그리고 그때서야 시안은 카르제의 타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끝나지 않는 악몽.

악마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죽지도, 소멸되지도 않았다.

카르제는 천 년의 세월 속에서 그들과 싸워왔다.

처절한 사투를 벌이며 대륙을 지켜왔다.

천 년전에도, 수 백년 전에도.

시안이 알지 못하는 무수한 세월 속에서.

카르제는 싸웠지만 악마들은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그 운명을 바꾸고자 수많은 죽음이 있어왔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는 숭고한 희생이라 말했지만, 결국은 바꾸지 못했다.]

천 년의 세월 속에서 그 반복되는 운명을 지켜본 고룡.

[죽음이 너무도 무의미했다. 가치 있는 죽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죽음에 이를 뿐이었지.]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이미 정해진 결과고, 죽음을 극복하는 이는 없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

[단지, 시기의 차이일 뿐.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게 어느덧 끝이 다가온 고룡의 삶.

천 년이란 까마득한 삶의 끝자락에서 고룡은 느꼈다.

[삶은 한 순간의 깜빡임이고, 죽음은 영원하다.]

[내가 나선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은 모두가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발악해도 달라지지 않는 무의미함을.

결국은 죽음 앞에 모두가 평등해짐을.

100년의 삶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

그 인간들조차 죽음 앞에서 삶의 덧없음을 깨닫는다.

하물며 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고룡은 어떠할까.

수많은 존재들의 죽음을 보아온 카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돌아가거라.]

카르제는 살아있되, 살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카르제를 바라보던 시안.

“······”

시안은 정말이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타성에 젖은 천 년의 고룡.

그 타성 앞에서 시안은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카일의 힘을 사용하여 호기심을 자극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호기심은 끝내 타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렇기에 시안은 이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무언가를 묻는다고 한들 카르제가 답을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카르제는 이미 모든 것이 덧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런 대화를 유도한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성과였다고 볼 수 있었다.

아마 시안이 호기심을 끌어내지 못했더라면 얻어내지 못했을 성과였다.

어쨌거나 이 이상으로 대화를 끌어낼 수는 없었다.

카르제의 도움 또한 이 이상으로 바랄 수가 없었다.

시안은 생각을 마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카르제는 긍정도, 부정도 해보이지 않았다.

너는 지껄여라 난 그냥 듣기만 할테니.

그런 방관적인 태도로 카르제는 두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시안은 그런 카르제에게 말했다.

“혹시 쓸모 없으시면··· 가지고 계신 보물들을 좀 나눠주실 수 있으신지···.”

그러자 카르제가 순간 멈칫, 거렸다.

정확히는 몸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시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 별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어차피 죽음을 앞에 두시고, 또 삶이 덧없다고 느끼시니 가시기 전에 좀 나눠 주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하하.”

카르제의 두 눈이 슬며시 떠졌고.

시안은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그런데 말이 이렇게 나와서 그렇지.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삶에 덧없음을 느끼는 것이야 그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함에 더 이상 수호자로서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마찬가지로 재화나 보물 또한 덧없다고 느끼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죽음까지 가져가지도 못할 보물.

좀 나눠줄 수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수호자로서 방관만 할 거면 좀 나눠줄 수도 있지 않은가.

시안은 웃음을 흘리며 서 있었고.

카르제는 그런 시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종일관 무심했던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마치 이거 뭐하는 미친 새끼지?

···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는 게. 그냥 혹시. 호오옥시나 해서 여쭙는 겁니다. 어차피 죽으실거라면 필요 없으실 거 같아서··· 하하.”

[······]

카르제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천 년의 세월 속에서 이런 인간은 처음이었다.

인간 뿐만아니라 모든 존재를 통틀어 자신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새끼··· 아니, 존재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곧 뒤질 거라면 좀 나눠달라니.

이게 지금 뭔···.

무구한 세월을 살아온 카르제.

그 세월 속에서 카르제는 온갖 희노애락애오욕을 경험했다.

그러나 지금, 카르제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모종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호기심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그리고 호기심은 끝내 타성을 이겨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아니, 티끌만이라도 좀···.”

이 감정은 어째 타성을 이겨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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