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61화 (261/322)

261화 - 이어지는 유지(1)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

갑자기 터져나온 굉음.

굉음은 하늘을 가득 메우다 못해 천지가 진동하며 떨려왔다.

그와 동시에 광기로 뒤덮인 세계가 일시에 어두워졌다.

어두워진다···?

전장의 소리가 멈추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하늘 위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보인 것은 마치 산이 통째로 하늘을 가린 듯한 광경이었다.

저것이 산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은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만일 퍼득거리는 날개짓의 움직임이 없었다면.

그로써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없었더라면.

거대한 산이 하늘을 드리웠다고 생각했을 터였다.

【······!!!】

【······!!!】

누르비아와 굴네리아의 두 눈이 동시에 크게 떠졌다.

크게 떠진 두 눈에는 놀람과 당혹의 감정이 떠올라있었다.

【너, 너는···!】

그리고 그 감정이 경악으로 변질되는 것도 잠시.

콰아아아아아아아아─!!

드리운 하늘 아래로, 시뻘건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산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처럼 이글거리는 불길이 지상의 마물들을 덮쳐갔다.

억겁의 화마와도 같은 열기에 마물들이 일시에 쓸려나갔다.

직접적으로 불길에 닿지 않은 마물들 또한 열기에 괴로워하며 사라져갔다.

이윽고 하늘을 가린 생명체가 지상으로 안착했다.

쿠우우우웅─!!

거대한 지진이 일며 시야가 뒤흔들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보인 거대한 생명체는 황금빛의 피부를 하고 있었다.

크나큰 날개와 길게 이어진 꼬리.

거진 100M에 달하는 실로 압도적인 크기.

“수호자님···.”

수인족들의 수호자.

최후의 드래곤, 카르제.

키, 키에엑···!!

마물들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온몸을 내리누르는 듯한 존재의 위압감, 드래곤 프레셔(Dragon Pressure).

카르제의 존재감에 짓눌려 마물들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수호자님께서 움직이셨다!!”

“수호자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인족들 사이로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지상에 내려앉은 카르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대한 고개가 움직이며 환호, 경악. 갖가지 감정을 표출하는 존재들을 관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르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카르제는 전장의 어떤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영 좋아보이지 않은.

그럼에도 쥐어진 검은 결코 놓지 않았던 인간.

카일의 후예, 시안.

시안은 군주들의 공격으로 갑옷 여기저기가 찌그러지고 짓이겨져 있었다.

짓이겨진 갑옷 사이로 새빨간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카르제는 시안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 또한 그런 카르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카르제님이 여길 왜···?”

정확히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카르제는 이곳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시안이 본 카르제는 짙은 타성에 젖어있었다.

천 년의 세월에 걸친 타성에 카르제는 살아있되, 죽어있는 존재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시안은 카르제를 전력 외의 존재로 상정했다.

이 싸움에서 카르제의 존재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

어찌된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심히 의뭉스러웠으나, 그 의문을 해결할 만큼 상황은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이 도마뱀 새끼가!!】

날선 누르비아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며 붉은 마력이 넘실거린다.

마력은 가느다란 실처럼 뽑아져나오며 풍경의 먹선을 그려내었다.

먹선은 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렸고, 그것은 다시 수 천, 수 만개로 분열했다.

틈조차 보이지 않는 수 만개의 마력 송곳들.

일시에 카르제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그 순간.

[사라져라.]

나지막한 카르제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거대한 덩치에서 비롯된 목소리는 천둥과 같았다.

그러나 느껴지는 감정은 침착하고 또 차분했다.

그리고.

키이이잉─!!

황금의 빛이 부풀었다.

거대한 진동. 그리고 굉음.

그것을 동반한 황금의 빛이 사방으로 터져나왔다.

다시 한 번.

꽈아아아앙!!!

황금의 빛이 마력의 세계를 찢어발겼다.

공간을 부수고, 쏘아지는 먹선의 송곳을 파훼한다.

그것에는 별 다른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라져라.’ 라는 한 마디만을 요할 뿐이었다.

“용언(龍言)···!”

어디선가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 있는지는 찾을 수 없었으나, 목소리는 분명 아리아의 것이었다.

용언(龍言).

언령(言靈)의 마법의 일종으로서, 술식이나 마법진이 필요 없이 언어로서만 마법을 구현하는 방법이다.

용언(龍言)은 그런 언령 마법의 최상위 등급.

아니, 언령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용언으로부터 파생된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는 드래곤이 마법의 주종이라 불리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무한의 마력을 담는 드래곤 하트(Dragon Heart).

그 무한한 의지의 기관으로서만 작용할 수 있는 용언 마법.

신화에 따르면 엘로디조차 용언 마법만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엘로디는 어디까지나 엘프였고.

그렇기에 그녀는 드래곤 하트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엘로디는 용언 마법을 구현하고자 연구를 계속했고, 끝내 탄생시킨 것이 바로 언령(言靈)마법이었다.

그러나 그 언령 마법조차 현재로서는 사장되었다.

엘로디 이후로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부서져라.]

카르제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꽈지직!

누르비아와 굴네리아를 담고 있던 공간이 우그러졌다.

공간 자체를 격하며 공간에 간섭하는 힘.

전조의 증상조차 없는 현상에 두 군주는 미처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제기랄···!】

두 군주는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누르비아는 양손을 빠르게 휘저으며 우그러지는 공간을 다시금 재조립했다.

굴네리아는 아가리를 벌리며 우그러지는 공간을 삼켜 초기화시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꽈아아아아앙!!

다시 한 번 공간을 찢고 들어온 힘.

두 군주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눈을 치켜뜨며 바라본 시야로 시안이 비쳐보였다.

번쩍─! 하며 시야 가득히 검은빛이 드리웠다.

【소용없어!】

누르비아가 크게 소리치며 광기의 마력을 폭사시켰다.

붉디 붉은 피안개가 피어나며 앞선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꽈아아아앙!

힘과 힘이 충돌하며 피어난 피안개가 소멸한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시안의 검 또한 누르비아에게 닿지 못했다.

【굴네리아!!!】

광기 섞인 외침에 굴네리아가 움직였다.

심연의 아가리를 쩌억, 벌리며 틈을 보인 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꽈지직─!

굶주림이 찢어졌다. 그 위로 드리운 것은 거대한 앞발이었다.

그것이 굴네리아의 탐(貪)의 권능을 찢어버렸다.

꽈아아아아아앙!

그대로 땅을 짓누르면서 카르제가 황금빛 마력을 터트렸다.

마법의 주종, 드래곤.

허나, 그것이 드래곤이 마법만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만물 위에 군림하는 궁극의 생명체.

발톱이며, 피부며, 근골이며.

카르제를 구성하는 신체의 모든 것들은 지상 최강의 무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폭발하는 땅거죽.

굴네리아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누르비아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연신 내뱉었다.

다 끝난 싸움이었다.

이제 수확만 하고 결과만 지켜보면 되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모습.

[깨어져라.]

꽈드드드득!

파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력의 결계가 산산히 깨어졌다.

그 사이로 시안의 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쇄도해왔다.

공간 전체를 휩쓸며 들어오는 마(魔)의 힘.

막을 수 없는 이 힘은 그 자체로서 폭력이나 다름 없었다.

꽈아아앙!

충격에 정신이 뒤흔들리며 푸확!

전신으로 새빨간 피가 솟구쳐 올랐다.

대체 이게 어딜 봐서 인간이고, 검술이란 말인가.

한 번 밀려버린 기세는 도무지 다시 가져올 수가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

[멈춰라.]

우뚝.

꿰뚫는 듯한 카르제의 용언에 누르비아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행동을 구속하는 용언.

누르비아는 속박과 거의 동시에 그 힘을 떨쳐버렸다.

그 과정에서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

그러나 찰나의 틈이면 충분했다.

퍼석─!

【까으으윽···!!】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누르비아는 잘려나간 왼팔을 재생하며 이를 까드득, 씹었다.

씹은 이빨 사이로 내장 조각들이 듬성듬성 느껴졌다.

누르비아는 퉤, 씹히는 내장 조각들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재생이 느리다. 시안이 행하는 일격.

그 일격 하나하나가 영혼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일격 하나 조차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무너져라.]

카르제의 용언이 시도때도 없이 간섭해왔으니까.

카르제는 누르비아를 끊임없이 견제했다.

시안에게 계속해서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면서 굴네리아를 압박까지 하고있었다.

거슬린다.

카르제의 존재가 너무도 거슬렸다.

이래서 미리 처리하자고 했던 것이었다.

이 도마뱀은 존재만으로도 이런 비대칭성을 유발하니까.

이번 계획에서 최대의 변수였던 존재.

하지만 그런 후회는 이제 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존재는 카르제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모두 영주님을 도와라!!”

“수인족들의 전사들이여 싸워라!! 수호자님과 함께 싸워라!!”

뒤바뀐 전황에 잔챙이들이 전의를 불태웠다.

절망의 구렁텅이에 허우적거려야 하거늘.

지금은 죽음을 불사하며 싸우고 있었다.

분명 같잖지도 않은 것들이건만.

지금은 정말이지 그 누구보다 거슬려왔다.

【잔챙이들은 꺼져!!!!】

짙은 분노가 피어오르며, 광기의 마력이 폭사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화아아아아악!

그 뒤를 이은 찬란한 신성력의 빛이 피어난 광기와 함께 자멸했다.

홱, 돌아간 시선.

그 시야로 아리아가 숨을 헐떡거리며 신성력을 터트리고 있었다.

제기랄. 제기랄!

누르비아는 이를 까득, 씹었다.

가뜩이나 상성도 좋지 않거늘.

저 빌어먹을 신성력은 잔챙이들과는 달랐다.

거슬린다. 거슬린다.

모두 죽여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이 든다.

일순간 누르비아의 생각이 툭, 하고 끊어졌다.

시야가 일순간 암전되며 의식이 끊어졌다.

끊어진 의식은 금방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암전된 시야는 아직 회복의 과정에 있었다.

서걱─!

암전된 시야로 절삭음이 들려왔다.

이내 회복된 시야로 허공을 부유하는 풍경이 비쳐보였다.

허공을 부유해?

누르비아는 목을 움직여보았지만 어째서인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동자만 돌려 주변의 시야를 바라봤다.

그리고 머리가 분리된 자신의 몸뚱아리를 볼 수 있었다.

목을 잃은 몸은 휘청휘청 흔들거리더니 털썩, 그 자리에 쓰러져버렸다.

누르비아는 그때서야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머리가 잘리면 생각을 못한다는 어떤 사실.

툭. 데구르르르.

누르비아의 잘린 머리가 바닥을 나뒹굴렀다.

#

잘려진 누르비아의 목.

“허억···! 허억···!”

시안은 목 없는 누르비아의 몸 앞에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악─!!!

끔찍한 귀곡성이 터져나왔다.

분명 성대가 존재하지 않는 목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뚜렷한 비명의 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지옥의 이명처럼 길게 울리는 괴음.

모든 증오와 악의 그리고 광기가 덩어리 지어져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목이 잘린 것만으로는 본체에 타격을 입히지 못하나.’

악마는 존재의 그릇을 기반으로 현실에 강림한다.

보이는 육체는 어디까지나 육체일 뿐, 본질은 영혼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누르비아의 그릇은 다름 아닌 헬렌이었다.

세미르와 평생을 약속했으나 악마에게 사로잡힌 여인.

시안은 세미르와 헬렌에게 꼭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하지만 성물의 봉인이 해방되었기 때문일까.

누르비아와 헬렌의 연결 고리가 쉽사리 끊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마 헬렌은 이 이상으로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거진 200년이 넘도록 이어진 저항이었다.

차마 인간의 정신력이라 부를 수 없는 기적이나 다름 없었다.

한계는 이미 오래 전에 맞이했을 터.

봉인까지 깨어진 누르비아의 힘에 헬렌의 정신은 쉼없이 갉아먹히고 있었다.

그리고 누르비아의 힘은 지금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모두 죽여주마!!!】

누르비아가 본체의 영혼을 태우며 힘을 폭사시켰다.

붉게 일렁이는 두 눈에 이성이 보이지 않았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끝도 없는 붉은 마력의 세계.

존재의 격이 다르다.

힘의 농도가 다르다.

꽈꽈꽝!!!

통제에서 풀려난 마력이 폭발한다.

폭발한 마력이 세계를 갈갈이 찢어버리며, 닿는 모든 것들을 붕괴시켜버렸다.

“커헉···!”

시안의 몸이 그 힘에 휘말려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시안은 부서진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멸의 갑옷이 처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수 억골드를 질러서 강화한 초월 장비였건만.

그래도 초월 장비는 초월 장비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복구가 될 터였다.

다만, 누르비아의 힘은 불멸의 갑옷만으로 막아낼 수가 없었다.

아마 불멸의 갑옷이 없었다면 방금 일격에서 치명상을 입었을 터.

아니, 이미 진즉에 골백번도 더 죽었을 터였다.

【죽어─!!!】

잘려진 목에서 발작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목이 없는 몸 뚱아리가 시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머리가 없어 균형을 잘 잡지 못하는 것일까.

삐걱거리며 달려드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냈다.

[무너─.]

【닥쳐!!!!】

꽈꽈꽈꽝!!!

크나큰 폭음과 함께 카르제의 용언이 힘을 잃었다.

카르제는 곧바로 꼬리를 들어 누르비아를 향해 내리쳤다.

【도마뱀 새끼는 꺼져!!!!!】

목만 남은 누르비아가 번뜩이며 비명을 내질렀다.

몸뚱이가 마력을 터트리며 카르제의 꼬리를 붙잡았다.

【다른 곳에 여유를 두면 쓰나.】

그 뒤로 굴네리아가 카르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르제는 누르비아와 굴네리아, 두 군주를 상대로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과연 드래곤은 드래곤인 것일까.

비록 완전한 해방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악마 군주는 악마 군주.

아르나이즈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절대적인 악이었다.

카르제는 그런 두 악마 군주를 상대로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어느 정도 밀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카르제의 피부가 누르비아의 손톱에 종잇장처럼 찢겨져 나갔다.

오러조차 가뿐히 막아내는 드래곤의 피부도 소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카르제는 지금 너무 늙고 쇠약해져있었다.

아마 아리아를 비롯한 루벤의 전력들.

그리고 수인족들이 싸우고 있지 않았다면 두 군주를 상대로 버티는 것이 힘들었을 터였다.

역시, 시간은 이쪽의 편이 아니다.

시안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는 카르제를 향해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카르제님. 들리십니까.”

작디 작은 소리였다.

전장의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도 않을 너무도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말하라.

그러나 카르제는 답을 해왔다.

그리고 그것은 귀가 아닌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소리가 아닌 의지로서 전달하는 의사.

카르제는 여전히 누르비아와 굴네리아와 싸우고 있었다.

“버텨주실 수 있으십니까.”

흠칫.

일순간 카르제의 몸이 잠깐 굳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누르비아와 굴네리아가 달려들었다.

콰직─! 촤학─!

크워어어어어어어─!!

섬뜩한 파육음과 카르제의 괴성이 그 뒤를 이어 들려왔다.

카르제는 두 군주를 상대로 여력이 없는 것일까.

꽤나 오랜 시간동안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시안은 그때까지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저 카르제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군주들은 계속해서 힘을 회복하고 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카르제의 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단순했다.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미 깨어진 성물.

비록 온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군주들은 차츰차츰 힘을 회복하며 강대해지고 있었다.

버티면 버틸수록,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이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 아니다.

그걸 시안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버텨주실 수 있으십니까.”

시안은 카르제에게 버텨달라,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카르제는 다시 한 번 답이 없었다.

흘깃, 바라본 시안의 얼굴.

-설마···.

카르제는 시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카르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부탁드립니다.”

시안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카르제는 또 다시 답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엔 방금 전과는 다른 의미의 침묵이었다.

지금 시안이 하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대가를 요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그것이 맞는 것일까?

그 생각이 정말 정답인 것일까?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오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시안은 주저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왜일까.

아주 오래 전의 남자와 너무도 닮아있었다.

-내 삶은 크든, 작든. 이미 틀려먹은 삶이었다.

크게 들이쉬는 호흡.

-이제 와 또 다시 틀린다 한들, 상관 없겠지.

카르제는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쳐보였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마.

크워어어어어어어어─!!!

어마어마한 괴성과 함께 카르제의 입가로 시뻘건 불길이 뿜어져나왔다.

드래곤의 절대적인 권능, 브레스(Breath).

주변의 모든 수분들이 일시에 증발하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대지의 수분이 모조리 빨려나가며 쩌저적, 갈라진다.

억겁의 화마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렸다.

【굴네리아!】

【이건 나도 못 삼켜!!】

두 군주가 불길에 휘말리며 일순간 행동 불능이 되었다.

시안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달아오른 열기가 폐부로 들어오며 그대로 익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졌지만 꾹, 눌러참았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시안은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곧장 『마일리지 샵』 항목에 접속했다.

바뀌는 화면에 시안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특수품목』 항목에 들어갔다.

꾹.

-불로초 (500,000 M)

-엘릭서 (500,000 M) [매진]

-황금사과 (600,000 M)

-천도(天桃) (620,000 M)

.

.

.

그러자 무수한 물품들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시안은 지난 날의 엘릭서(Elixir)와 같은 효능의 영약들을 선별했다.

복용자에게 어마어마한 마력을 주는 영약.

확실하지는 않았다. 마일리지 샵의 품목들은 그 성능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시안이 그 동안 고민하고 선별한 것들은 있었다.

시안은 주저없이 선별한 항목들의 구매버튼을 눌렀다.

꾹. 꾹. 꾹.

띠링! 띠링! 띠리링!!

시안의 터치와 함께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러나 시안은 알림창을 무시하며 항목들을 구매했다.

그 동안 수 억 골드를 현질하며 쌓여있는 무수한 마일리지들.

현재 보유 중인 마일리지가 얼마인지 확인하지도 않았다.

엘란두르 비자금 때부터 마일리지를 거진 사용하지 않았으니···.

엘란두르 비자금 5억.

샤를롯의 검술과 엘로디의 기록을 판매한 3억 5천.

그리고 카르제에게서 얻어내어 현질한 2억.

대략 10억 골드에 따른 마일리지가 쌓여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그저 되는 대로, 눈에 잡히는 대로.

효과의 확인, 성능의 효율. 신중함.

그 역시나 고려하지 않았다.

황금사과, 천도, 넥타르, 암브로시아.

소마, 신편귀독주, 생명의 물, 에이트르···.

꾹. 꾹. 꾹.

시안은 계속해서 항목들을 구매했다.

그렇게 얼마 간을 구매했을까.

《보유 중인 마일리지가 부족합니다!》

더 이상 구매할 수 없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리고 내려다 본 시야.

시안의 발 아래로 무수한 영약들이 쌓여있었다.

어림잡아도 두 자리수는 충분해보였다.

시안은 그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과의 모양은 누가봐도 황금사과였다.

시안은 황금사과를 한 입 베어물었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입 안으로 사과의 향이 가득히 퍼져나갔다.

맛과 향은 천상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시안은 그것을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

화아아아아악!!

시안의 전신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이 치솟기 시작했다.

“아으윽···!”

그와 동시에 실핏줄 하나하나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지며, 의식이 저만치 멀어져만 갔다.

시안은 떠나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계속해서 마혼제법의 구결을 되뇌었다.

그리고 영약의 힘이 흡수되기도 전.

시안은 쌓여있는 영약에 또 다시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약초처럼 생긴 무엇.

이름이 뭐지 싶은 생각도 전, 시안은 그것을 입에 가져다 넣었다.

와그작, 거리는 식감과 함께 다시 한 번.

쿠구구구구궁···!!!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이 시안의 전신으로 폭사했다.

그리고 멈추지 않았다.

시안은 다시 한 번, 쌓여있는 영약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집어들며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 넣었다.

입에 넣음과 동시에 다시 영약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끄으으윽···!”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찢어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견뎌낸다.

드래곤 수준의 신체 강도.

극마지체로 진화한 신체의 수준.

한계를 뛰어넘는 영약들의 마력이었지만 진화한 신체는 그 마력을 그릇 안에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불안전했다.

툭, 건들면 깨어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시안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드래곤 수준으로 진화했지만 시안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었다.

극마지체로 진화한 신체였지만 어디까지나 1성의 단계였다.

한계는 존재한다.

그리고 이 초월의 마력은 인간이라는 그릇을 아득히 넘어버렸다.

시안은 스스로의 그릇에 자그마한 균열이 새겨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 끝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

반드시라고 할 만큼.

그릇이 붕괴되어 죽을 것이다.

이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다.

반드시, 기필코 나는 죽는다.

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시안은 계속해서 영약들을 입에 털어넣었다.

억지로 입을 움직여 씹어 넘겼다.

그리하여 끝내 구매한 모든 영약들을 삼켰을 때.

사아아아아아아─!

주변에는 이미, 칠흑과도 같은 어둠의 시간이 찾아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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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칫.

멈칫.

누르비아와 굴네리아의 움직임이 동시에 덜컥, 굳어버렸다.

카르제의 브레스를 피했지만 그 열기마저 막아내지는 못했다.

이글거리는 살갗으로 끔찍한 통증이 느껴진다.

탐(貪)의 권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힘.

그러나 두 군주의 움직임을 멈추게 한 것은 카르제의 브레스가 아니었다.

두 군주의 시선이 자연스레 한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보인 것은 어떤 한 존재였다.

그래, 저건 어떤 존재였다.

모습은 분명 인간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었다.

본능을 경고하는 치명적인 공포.

저건 도무지 인간이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너, 아까랑 다르게 굉장히 이상─.】

말문이 채, 내뱉어지기도 전이었다.

뻐어어엉!

옆에서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굴네리아의 몸이 뒤로 쏘아지며, 기괴하게 벌린 심연의 아가리에서 붉디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커허헉!

고통에 찬 굴네리아의 신음이 뒤늦게 들려온다.

누르비아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늦었다.

그것도 한참.

보이지도 않았다.

그 어떠한 순간조차.

【이게 무슨···?】

인지의 영역이 따라가질 못한다.

주변을 둘러봤을 땐, 어느덧 칠흑의 어둠이 찾아와있었다.

대체 언제···?

빠아아악─!!

생각이 그 이상으로, 이어지질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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