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 이어지는 유지(3)
제발 그만.
소리없는 구걸이 이어졌다.
누르비아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우웨엑···!】
누르비아의 몸이 꺾이며 끈쩍한 피가 쏟아져내렸다.
목구멍을 비집으며 무언가 턱턱, 막힘이 느껴졌다.
기침을 반복하며 막힌 무언가를 뱉어내는 것도 잠시.
빠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누르비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
굴네리아는 그 자리에 굳어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움직여봤자, 대항해봤자··· 의미가 없다.
대체 누가 악마고, 누가 인간이란 말인가.
악마들의 악마.
굴네리아의 시선에 시안은 악마(惡魔), 그 자체였다.
시안은 쓰러진 누르비아를 바라봤다.
누르비아의 축, 늘어진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에 정신이 끊어진 것 같았다.
정신의 자기 방어.
한계를 넘어선 충격에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의지를 단절시켰다.
그렇다면 초기화시키는 수밖에.
시안은 대수롭지 않게 누르비아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날려진 머리가 빠르게 재생한다.
【············ 허억···!】
누르비아가 달뜬 숨을 들이키며 눈을 번쩍, 떠보였다.
그리고 짓누르는 시안의 모습에 두 눈동자가 쉼없이 떨려왔다.
“재생이 빨라졌네.”
시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깨어진 성물의 봉인 때문인 것 같았다.
성물에 의해 제약되었던 힘이 계속해서 돌아오고 있는 상황.
그 덕분에 재생의 속도 또한 점점 빨라졌다.
“이러면 뭐.”
시안은 다시 한 번 누르비아의 몸뚱이를 걷어차버렸다.
뻐어엉! 하고 터져버린 몸은 허공을 부유하며 다시금 재생을 반복한다.
힘이 회복되며 재생력이 빨라졌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차마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만···!】
재생이 빨라졌다는 건 그만큼 고통 또한 빨라졌다는 뜻이었으니까.
육체의 데미지는 초기화 되며 사라진다.
그러나 정신의 데미지는 쌓이고 쌓여 누적된다.
퍼억─!
누르비아의 정신이 다시 한 번 끊어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다시 잘려진 누르비아의 목.
【제, 제발···! 제발···!】
누르비아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닥으로 추락한 목이 없는 몸이 바닥을 기며 손톱으로 땅거죽을 벅벅, 긁었다.
【그만해··· 그만해줘···.】
하지만 퍼석─!
시안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누르비아에게 반복되는 죽음을 선사했다.
죽음이 이어지고 이어질 때마다 누르비아의 정신은 점점 무너져갔다.
【이, 이건···.】
굴네리아의 표정으로 진득한 절망이 내려앉는다.
지금이야 이렇게 계속해서 재생하고 복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존재가 담을 수 있는 그릇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었다.
그건 지금 시안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초월의 힘으로 존재의 균열이 새겨져있었다.
마찬가지로 정신 또한 버틸 수 있는 한계치가 존재했다.
이렇게 계속, 계속 또 계속 억압당한다면 언제고 정신의 그릇은 붕괴한다.
설령 그것이 군주의 정신이라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본질의 타격을 받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뭘 멀뚱이 보고만 있어?”
콰직─!
굴네리아의 생각이 끊긴다.
【커허헉···!】
회복된 생각과 동시에 전신을 찢어버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단순한 육체적인 통증이 아니다.
영혼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듯한 격통.
본체의 힘을 현신하여 본질적인 타격이 영혼을 뒤흔든다.
통증의 격이 다르다.
도무지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통증이었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덥썩, 굴네리아의 입을 붙잡았다.
굴네리아의 두 눈이 쉼없이 떨려왔다.
시안의 동작, 행동, 몸짓 하나하나.
행하는 모든 것에서 두려움과 공포가 느껴졌다.
투지가 순식간에 사그라 든다.
분노? 짜증?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반항한다는 선택지는 진즉에 사라져버렸다.
저항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 경이로운 힘에, 저 아득한 너머에.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차라리··· 죽여···.】
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 끔찍한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면.
죽음이 더 편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부탁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거야.”
설마하니 너희들을 살릴리가 없잖아.
“다만, 지금은 아닐 뿐이지.”
꽈지직!
굴네리아의 입이 곰덫처럼 활짝, 찢어졌다.
굴네리아가 너덜거리며 쓰러진다.
누르비아는 바닥을 기며 애걸하고 있었다.
시안은 두 군주가 느끼는 공포를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한다면 두 군주의 정신을 붕괴시킬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누르비아는 벌써부터 그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어.’
그러나 시안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오염되지 않은 정신이었다.
그럼에도 악마 군주는 악마 군주였다.
존재가 저지르는 근원의 죄.
그 죄에서 깨어난 군주들은 그 자체가 공포이자 두려움이고, 또 절망이었다.
그런 정신을 붕괴시킨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포에게 공포를 선사하고, 절망에게 절망을 드리운다는 것과 같은 이치였으니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뿐.
그것이 결코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비틀.
재생되는 굴네리아의 시야.
비틀거리는 시안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꽈지직!
다시 육체가 짓이겨지며 정신이 끊어졌지만 굴네리아는 그 광경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재생되는 정신.
【이게 무슨 의미가··· 커헉···! 있다는··· 거지···!】
굴네리아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시안은 아무런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퍼석, 꽈직. 굴네리아에게 끊임없는 죽음을 선사할 뿐이었다.
영혼이 뒤흔들리는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저항을 해보려했지만 역시나 닿을 수 없었다.
【그만해··· 그만해··· 그만해줘···.】
누르비아는 이미 정신을 반쯤 놓고 있었다.
바닥을 기며 애결한 눈빛을 지어보였다.
참으로 나태다운 모습이라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인정한다.
굴네리아는 이 상황을 끝내 인정했다.
성물의 제약을 일부 풀었음에도.
본연의 힘까지 개방했음에도.
시안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을 방도 또한 없다.
이 싸움은 명백한 패배다.
퍼석─! 깨어지는 정신.
그리고 재생되는 육체.
【이 다음도··· 쿨럭! 이러할 수 있을거라 생각··· 하나.】
그러자 시안의 움직임이 뚝, 하니 멈추었다.
굴네리아는 찢어지는 듯한 격통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너는 지금의 우리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부정하지··· 않겠다.】
참으로 믿을 수 없지만.
아득한 정신에 뒷말이 차마 내뱉어지지 않는다.
시안은 그런 굴네리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더 이상의 억압은 행해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듣겠다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파르르, 떨리는 시안의 손이 눈에 띄게 격해져있었다.
아무래도 조만간 한계를 맞이할 것만 같아 보였다.
조금, 조금 더 시간을 끌면.
【하지만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이지?】
굴네리아는 쿨럭거리는 피를 토해내며 말을 이었다.
【그때도 네가 나서서 우리를 막을 생각이냐? 다 늙어빠져서는? 아니.】
굴네리아는 점점 심해지는 시안의 떨림을 지켜봤다.
【늙기도 전에 곧 죽을 처지겠지만.】
굴레니아는 피로 얼룩진 입가를 훔쳤다.
【설마 너의 후예가 남아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었다. 천 년전, 그 빌어먹을 것들이 후예를 남긴 것처럼.
그로써 지금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 펼쳐진 것처럼.
이들 또한 후예를 남길 수 있었다.
하지만 후예는 어디까지나 후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싸움이다.
【결국 우리들의 승리로 끝날 싸움이다.】
말 그대로 영원히.
【네가 한 모든 짓은 발악이다.】
발악.
온갖 짓을 해가며 악을 쓰는 행위.
그러나 결과에는 딱히 의미가 없는.
하하하하하하! 굴네리아는 광포하게 웃었다.
전신을 찢는 듯한 통증 속에서도 굴네리아의 입가엔 웃음이 걸려있었다.
“······”
그리고 시안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안다. 이 싸움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을 것임을.
그러나 시안은 여기서 끝이 났음을.
수 십개의 영약을 복용하여 얻어낸 초월의 마력.
그릇의 한계를 뛰어넘은 마력은 신체를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아직 두 군주의 정신을 완전히 붕괴시키지도 못했건만.
시안의 몸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결국, 발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시안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안은 이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천 년전, 카일이 행했던 그때처럼.
시안은 그 길을 걸어가고자 다짐했다.
그러니 이 선택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루벤의 사람들.
그들과 조금은 더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 일의 끝을 지켜보고 싶었는데.
정말로 아쉽지만 그 광경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역시나 천 년전, 카일이 행했던 그때처럼.
카일의 유지를. 아르나이즈의 유지를.
그리고 나의 유지를.
이어받아 이곳에 남길 뿐.
“쿨럭···!”
시안이 크게 각혈하며 몸이 꺾였다.
전신의 신경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에 시안의 몸이 휘청거렸다.
하하하하하. 굴네리아의 웃음이 높아졌다.
시안을 바라보는 표정에는 명백한 비웃음이 걸려있었다.
이거봐라. 넌 끝내 우리조차 없애지 못하지 않았는가.
목구멍으로 치솟는 핏덩이만 아니면 소리쳤을 그 소리.
시안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 끝도 없는 절망에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굴네리아는 눈동자를 굴려 시안을 바라봤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시안의 눈빛은 어째서인지 죽어있지 않았다.
통증에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서서히 존재가 붕괴되고 있었다.
그런데 눈빛은 그 여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사아아아아아─!!!
시안의 전신으로 끔찍한 어둠이··· 피어오른다.
【······!!!】
그와 동시에 굴네리아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다르···다.
지금 느껴지는 이 힘.
【이건···!】
굴네리아가 경악 어린 외침을 터트렸다.
드리운 어둠의 세계에 그 물음은 소리없이 삼켜졌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힘이 시안의 몸으로 유입되었다.
공간이 파르르, 거리며 떨려온다.
소리조차 터져나오지 못하고 흉측하게 풍경이 일그러진다.
감각 너머에서 아득한 힘이 느껴진다.
시안은 멸살의 검을 꽈득,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군주의 정신을 완벽히 붕괴시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본체의 힘을 끌어왔어도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단순한 고통. 계속되는 죽음.
그것만으로 군주라 불리우는 악(惡)의 정신을 붕괴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약화 정도는 시킬 수 있었다.
투지와 전의가 꺾인 두 군주의 정신.
그리고 끝이 다가온 시안의 상황.
시안은 이를 까드득, 깨물었다.
시안이 현재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일격은 단연코 아수라(阿修羅)였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시안이 지금까지 펼친 아수라는 사실 아수라가 아니었다.
아수라(阿修羅)에 깃든 묘리는 도합 두 가지다.
검(劍)을 이루는 본질적인 두 형태.
베기(斬)와 찌르기(衝).
그 두 가지 묘리를 극한으로 단련한 것이 앞선 1식과 2식.
마혼수라검의 제 1식, 수라천살(修羅天殺).
수라천살은 베기의 묘리를 극한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마혼수라검의 제 2식, 멸천수라(滅天修羅).
찌르기의 묘리를 극한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아수라(阿修羅)는 그 두 가지 식(式)을 하나로 이은 형(形)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시안이 시전한 아수라는 그렇지 않았다.
오직 베기와 찌르기의 묘리만 담은 일격이었으니까.
수라천살이 아닌 베기(斬)만을 담아내었다.
멸천수라가 아닌 찌르기(衝)만을 담아내었다.
허나, 진정한 아수라(阿修羅)는 단순히 베기와 찌르기를 잇는 것이 아니다.
1식, 수라천살.
2식, 멸천수라.
두 본질의 극한을 하나로 이어펼치는 모순적인 일격.
그것이 바로 아수라(阿修羅)의 참된 묘리였다.
그리고 시안은 할 수 없었다.
까마득했으니까.
그 아득한 경지에 닿지 못했으니까.
시안에게 아직 허락된 경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타락에 몸을 던진다. 피어난 어둠이 사방을 휩쓸었다.
어둠이 생명을 탐한다. 드리운 암흑이 존재를 말살한다.
【어, 어떻게···!】
굴네리아의 경악이 크게 일그러진다.
지금 굴네리아를 핍박하는 무언가.
공간 전체를 드리운 알 수 없는 무언가.
괴물···?
그렇게 말하기엔 그 느낌이 미묘하다.
공간 자체가 대적(大敵)이 되어오는 듯한.
어둠 안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괴현상.
이건 그렇게밖에 설명이 불가하다.
설명할 수 없는, 인지할 수 없는 일들이 터지고 반복한다.
세상의 그 어떠한 개념으로도 설명이 불가하다.
꽈르르르릉!!
뇌명이 터지며 세상이 뒤틀렸다.
그 속에서 시안은 가진 바 모든 마력을 폭사시켰다.
아수라에 깃든 베기의 묘리에 수라천살(修羅天殺)을 담는다.
아수라에 깃든 찌르기의 묘리에 멸천수라(滅天修羅)를 담는다.
1식과 2식을 잇는 완전한 1형(形).
천 년전, 카일이 행한 진정한 아수라(阿修羅).
그 순간.
사아아아아아···.
시야가 흐려지며 어떠한 환각이 비쳐보였다.
펼쳐진 지옥도. 그 사이로 드리운 기나긴 길.
그 길의 끝에는 은발의 미남자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리고 전보다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은 무얼까.
조금은 당신의 곁에 서게 된 것인가.
나는 비록 실패했지만.
확실히 들려오는 카일의 목소리가 전보다 선명했다
시안은 그런 카일의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언젠가 당신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언젠가 당신을 뛰어넘겠다고 호기롭게 소리쳤는데.
아쉽게도.
나의 길은 여기서 끝을 맺어야할 것 같았다.
시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이로써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뒤가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잘해줄 것이다. 시안이 없어도 그들은 충분히 잘해낼 것이다.
시안은 카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저도 실패했습니다.
시안은 내딛던 발걸음을 멈춰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그 순간 문득.
아니.
들려오는 카일의 목소리.
넌 인─의 ──을 틀─ 놓─다.
지금 뭐라고···?
사아아아아···.
환각이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카일의 모습 또한 흐릿해졌고.
귓가를 간지럽히던 목소리 또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보인 것은 경악을 넘어서는 굴네리아.
정신이 반쯤 미쳐버린 누르비아.
마지막으로.
한계를 맞이하여 붕괴되는 시안의 육체였다.
붕괴되는 육체로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이 치솟아오른다.
그리고 펼쳐진 경이로운 힘은.
공간 자체를 뒤집어놓으며 무(武)의 영역을 잠시나마 초월했다.
마혼수라검(魔魂修羅劍).
제 1형(第 一形).
진(眞) - 아수라(阿修羅).
#
부릅, 떠진 커다란 두 눈.
저도 모르게 벌어진 거대한 입.
카르제는 경악이라는 감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공간이 분열과 소멸을 반복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세계의 법칙이 관여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안이 마지막으로 펼친 일격.
그 일격을 이 세계가 감당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공간은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다.
그런 공간에 관여한다는 것은 세상의 법칙에 관여한다는 것.
시안은 펼친 일격은 그런 법칙에 관여하다 못해 으스러뜨렸다.
세계가 허락하지않는 모순된 현상을 구현함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세계는 그 현상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다.
존재해서는 안되는 모순(矛盾).
허나, 준엄한 세계의 법칙에 모순은 있을 수 없는 법.
해서 세계는 그 현상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고자 차원 자체를 소멸시켜버렸다.
모순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소멸시켜버렸다.
그것이 지금 보이는 무(無)의 공간이자 차원.
[소멸했구나.]
지배하던 악마들의 정신은 역시나 무(無)로 돌아갔다.
절대적인 악(惡).
엄밀히 말하면 군주들은 저 힘에 스러지지 않을 존재들이었다.
성물의 봉인이 깨어졌고, 또 본연의 힘을 끌어온 지금.
군주들은 저 힘에 최소한 스러지지 않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시안이 그것을 가능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군주의 정신을 무디고 무뎌지게 만들어 대항의 힘을 꺾어버렸다.
그리하여 군주들의 정신이 깨어져 붕괴되었다.
[허나···.]
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시안은 스스로의 존재를 제물로 초월의 힘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것은 단순한 반동 같은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스스로의 존재를 제물로 바친 것.
초월의 마력이라는 불길을.
시안이라는 장작으로 지펴올렸다.
그 불길은 끝내 절대적인 악을 집어 삼켰지만.
푸화학!
털썩.
그 장작은 잿더미가 되어 스러지고 있었다.
존재를 구성하는 그릇 자체가 깨어져 붕괴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진 그릇은 절대로 다시 이어질 수 없었다.
예외는 없었다. 확답할 수 있었다.
그 어떠한 방법도 없다.
천 년전, 최강의 아르나이즈라 불리던 존재.
카일 또한··· 그렇게 죽었으니까.
오직 신(神)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을 행하고자.
카일은 스스로의 존재를 태우다 끝내 스러졌다.
그리고 지금.
오늘. 여기서.
“시, 시안!!”
“영주님!!!”
그 후예 또한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