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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질하는 영주님!-264화 (264/322)

264화 - 가치있는 죽음

“시안!! 시안!!!”

아리아는 백금발을 휘날리며 쓰러진 시안에게 뛰쳐나갔다.

쓰러진 시안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마치 경련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쉼없이 몸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까뒤집은 눈에서는 의식이 엿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달랐다. 그동안 봐왔던 시안의 모습과는 달랐다.

아리아는 지난 날, 루슈리아를 대적하며 과부하가 걸린 시안을 본 적이 있었다.

경이로운 광경을 자아내고, 그 반동으로 쓰러지는 시안을 봐왔었다.

그런데 다르다. 그때와는 다르다.

이건··· 이건···.

푸화확!!

들썩거리는 시안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올랐다.

거뭇하게 죽어버린 피가 화산처럼 시안의 입가로 끓어올랐다.

아리아의 얼굴로 피가 뿌려진다.

아름다운 백금발이 피로 물들었다.

죽는다.

새하얀 아리아의 얼굴이 그보다 더 새하얗게 질려갔다.

“아··· 아아···.”

진한 충격으로 생각이 정상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리아를 이를 까드득, 씹으며 충격을 떨쳐내었다.

떨쳐냄과 동시에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시안이 신성력을 싫어하는 것은 알고 있다.

신성력만 보이면 기겁을 하며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화아아아아아악!

아리아는 시안의 몸 위로 양손을 가져다 대었다.

찬란한 신성의 빛은 아리아의 손을 타고 시안에게로 스며들어갔다.

파르르르르르.

그러자 시안의 경련이 더욱 심해졌다.

들썩거리던 몸이 뭍에 나온 활어마냥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거부 반응이다.

아리아는 멈칫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솟구치던 피만큼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육체는 신성력에 의해 조심씩 회복되고 있었으니까.

푸화학!!

말 그대로 조금씩.

죽지만 않는다면 살릴 수 있는 강대한 신성이건만.

그럼에도 시안의 상태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리아는 더욱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그럴 때마다 시안에게서 쏟아지는 피가 줄어들었다.

주륵.

또 그럴 때마다 아리아에게서 같은 양의 피가 쏟아져나왔다.

“제발··· 제발···!”

아리아는 신(神)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화아아아아악!!

신성력의 빛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안의 상태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 꼭 이러할까.

신성력을 부어도 부어도, 쏟아내어도, 쏟아내어도 끝이 없었다.

휘청.

아리아의 시야가 흐려지며, 아득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럼에도 아리아는 신성력을 거두지 않았다.

바로 그때.

[그만두거라.]

천둥과도 같은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그 뒤를 이어 쿠웅···! 거대한 지진과 함께 카르제가 아리아 앞에 서보였다.

“제발··· 제발··· 제발···.”

그러나 아리아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릴 뿐이었다.

카르제는 그런 아리아를 바라보다 행동에 나섰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저 강대한 신성의 아이마저 쓰러질 터.

카르제는 살며시 앞발을 들어 가볍게 휘저었다.

그와 동시에 터져나오면 황금빛의 마력이 신성력을 옭아매며 소멸시켜버렸다.

“이게 무슨···?”

아리아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고개를 홱, 치켜 바라본 시야.

아리아는 주위를 둘러싼 루벤의 병사들과 수인족들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방해한 카르제의 존재 또한 눈치챌 수 있었다.

“지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아리아는 카르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카르제는 아리아를 억압한 마력을 거두지 않았다.

[너의 신성은 이 아이와 상성이 좋지 않다. 애초에 신성으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니 당장 이거 푸세요!”

아리아는 신성력을 터트리며 구속된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아이에게 육체의 회복은 의미가 없다. 이 아이는 존재의 그릇이 붕괴된 것이니까.]

존재를 구성하는 두 요소, 혼(魂)과 백(魄).

정확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혼(魂)은 영혼이요.

백(魄)은 육체라 말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존재를 정의하는 것은 영혼.

다름 아닌 혼(魂)이라 할 수 있었다.

당장 방금 전의 군주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군주들의 육체는 다른 이의 것이나 영혼은 악마군주였다.

혼(魂)과 백(魄)이 다른 상황.

그러나 그들은 악마 군주라 정의할 수 있었다.

존재를 정의하는 혼(魂)이 살아있는 한 존재는 죽어도 죽지 않는다.

그것이 악마 군주들이 아무리 육체가 손상되어도 죽지 않았던 이유였다.

해서 시안은 악마 군주의 혼(魂)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시안 또한 그 혼(魂)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상황에서 백(魄), 육체를 아무리 회복시켜봐야 의미가 없었다.

존재를 정의하는 영혼에 크나큰 타격을 입은 것이니까.

존재의 그릇이 깨어진 것이니까.

따라서 시안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붕괴된 영혼을, 깨어져버린 그릇을 다시 이어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불가능하다.

장작을 태워 억겁의 화마를 지펴올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잿더미를 다시 장작으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건 이 고립된 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인과(因果)의 법칙.

그래도 아리아의 신성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카르제는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뮤리엘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가능한 일은 오직 신(神)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아리아의 행동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리아는 기세를 꺾지 않았다.

“무의미한 일이라해도 상관없어! 그런 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시안을 살리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거 당장 풀어!!!”

아리아는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카르제는 발악하는 아리아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스쳐지나간다.

무려 천 년전의 일.

그러나 지금과 다르지 않은 일.

‘어, 어떻게··· 어떻게 방법이··· 없는 건가요···? 카르제?’

그래, 그때도.

그때도 이러했었지.

당시 뮤리엘은 절망했었다.

그 어떠한 방법이 없음에, 그 어떠한 것도 의미를 갖지 못함에.

‘아아··· 아···.’

뮤리엘은 그 앞에서 좌절했었다.

그러나 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지금 당장 풀라고!!!”

아리아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절망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의미한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절망하던 뮤리엘.

발악하는 아리아.

카르제가 보기에 아리아는··· 여러모로 뮤리엘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농담이 아니라 뮤리엘이 환생한 것이 아닐까.

심히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많이 닮아있었다.

그래서 카르제는 아리아가 뮤리엘이라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그 생각이 조금은 달라졌다.

“야이 도마뱀 새끼야!!!”

일단 성격부터가 영···.

카르제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순간.

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카르제의 마력이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아리아를 구속하던 마력이 사라졌다.

억압이 풀린 아리아는 지체없이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끌어올린 신성력을 거리낌없이 시안에게 밀어넣었다.

그리고 이번엔, 카르제는 그것을 막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만 볼 뿐이었다.

같은 상황, 같은 한계.

뮤리엘은 이 상황에 절망했지만, 아리아는 발악을 선택했다.

후예는··· 후예일 뿐이라는 것인가.

아리아는 뮤리엘과 완연히 다른 존재다.

무엇이 아리아를 움직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리아는 그녀와는 다른 선택을 하고 있었고.

또 그렇기에 그들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었다.

“정녕··· 정녕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일순간 카르제를 향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라본 그곳엔 한 인간이 카르제에게 물어오고 있었다.

시안이 이끄는 루벤이라는 영지.

그 영지의 경비대장이라 불리던 이었던가.

시안이 저 인간을 두고 루카스라 부르던 기억이 카르제의 뇌리를 잠시 스쳐지나갔다.

루카스는 절박한 표정으로 카르제에게 묻고 있었다.

그 뒤로 루벤의 병사들 또한 절실한 표정으로 카르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님을··· 저희 영주님을 살릴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어지는 루카스의 물음.

카르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다.]

카르제의 말에 루카스가 화들짝 놀라보였다.

부릅, 뜬 두 눈으로 성큼 카르제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의 영혼은 붕괴되어가고있다. 완전히 붕괴된 영혼을 이어붙일 방법은 없지만···.]

카르제는 루카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붕괴의 진행 과정을 멈출 수는 있다.]

“어떻게···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이 아이의 영혼이 붕괴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당할 수 없는 마력. 정확히는 이 세계의 법칙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을 보유했기 때문이지.]

준엄한 세계의 법칙은 모순적인 현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시안은 존재 자체가 모순이나 다름 없었다.

인간이라는 그릇이 담을 수 있는.

세계가 규정해놓은 한계의 허용치를 초과해버렸다.

정확히는 과(果)에 합당한 인(因)이 존재하지 않았다.

너라는 존재는 이 세계에 있어서는 안돼.

따라서 시안의 존재는 세계의 의지에 인해 붕괴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다.

[허나, 한계를 새로이 조정한다면··· 과(果)에 합당한 인(因)을 부여한다면, 붕괴의 과정을 멈출 수는 있다.]

그렇게 붕괴가 멈춘 영혼은 서서히, 아주 서서히 회복의 과정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

[영혼이 안착할 새로운 그릇.]

한계치가 새로이 조정된 그릇으로 시안의 영혼을 안착시키면 되었다.

그리하여 과(果)에 합당한 인(因)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법칙을 만들어내면 되었다.

그 자체로서 온전한 영혼이자 하나의 법칙을.

[허나, 대상이 되는 존재는 반드시 죽음을 맞이한다.]

그 대가는 희생되는 존재의 죽음이었다.

한 마디로 다른 존재의 희생으로서 시안의 죽음을 미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나 루카스는 주저하지 않고 답을 해왔다.

아니, 비단 루카스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루벤의 병사들, 기사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

“영주님이 없으셨으면··· 전 아마 진즉에 어둠의 숲에서 마수의 먹이가 되었겠죠. 제가 하겠습니다.”

“마수의 먹이 뿐이겠습니까. 살아간다는 기쁨조차 모르고 비참하게 죽었을 겁니다.”

그들 모두가 스스로가 희생하겠다 자처하고 있었다.

카르제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생존은 생명체에 각인된 절대적인 본능이다.

그리고 카르제가 보아온 인간이라는 개체는 더욱 그 본능이 강했다.

살고자 동족을 배신하고.

살아남고자 동족의 등에 칼을 꽂는다.

그런데 이들은 달랐다.

“영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야 뭐.”

“목숨 같은 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 절대적인 본능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다.

천 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달라지지 않았거늘.

이들은 카르제가 보아온 인간들과는 다른 결과였다.

하지만.

[불가하다.]

카르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으려는 것도 잠시.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르제가 재차 그 입을 열었다.

당연하게도 천 년전, 카일의 죽음 당시에도 이 방법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겠다.

[말했다시피, 이 아이의 영혼이 붕괴되는 이유는 세계가 감당하지 못하는 힘 때문이다.]

초월의 마력. 그 아득한 힘을 담아낸 대가로 시안의 영혼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리고 혼(魂)이 존재의 본질이라고는 하나.

존재의 구성은 엄연히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 시안이 보유한 초월의 마력은 여전히 백(魄)에 남아있었다.

시안의 육체에 잔재되어있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그릇을 만들어준다 한들. 그것은 정말 잠시뿐이었다.

백(魄)에 남아있는 마력을 버티지 못하면, 다시 깨어져 붕괴될 뿐이었다.

그렇기에 불가능이라 단정지었던 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천 년전, 카일의 마력을 감당할 그릇 같은 건.

그리고 지금, 시안의 마력을 감당할 그릇 같은 건.

그 어떤 아르나이즈들조차 카일을 담아낼 수 없었다.

오직 딱 한 존재.

드래곤, 카르제를 제외하고는.

만물 위에 군림하는 궁극의 생명체, 드래곤.

그 중에서도 드래곤 하트(Dragon Heart)라 불리는 심장.

그것은 가히 무한의 마력을 담아낼 수 있었다.

세계의 법칙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마력을 능히 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천 년전의 카르제는 할 수 없었다.

카일의 붕괴는 지금의 시안보다 더 끔찍했으니까.

상정되는 수치가 남달랐다.

그럼에도 한다면야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카르제는 그러지 않았다.

첫째는 카르제가 카일을 위해 희생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둘째는 희생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천 년전의 카르제는 너무도 어렸다.

태어난 지 몇 십년이 지나지 않은 새끼 드래곤 해츨링에 불과했다.

드래곤 하트는 무한의 마력을 담아낸다.

그러나 갓 태어난 새끼 해츨링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드래곤을 찾자니, 모두 악마들에게 사냥 당한 이후.

대륙에 남아있는 드래곤은 카르제가 유일했다.

그리고 천 년전이나 지금이나.

카르제는 여전히 대륙에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었다.

그러나 그때와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 해츨링.

그리고 천 년의 고룡이라는 크나큰 차이가.

카르제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서서히 붕괴되는 시안.

아리아는 계속해서 신성력을 밀어넣고 있었다.

무의미함을 아리아, 본인이 잘 알고 있을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입가에 잔뜩 번져있는 선혈에도 아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카르제의 생각이 깊어져만 갔다.

천 년의 세월.

참으로, 참으로 기나긴 세월이었다.

그리고 그 기나긴 세월 속에서 카르제가 느낀 것은 타성이었다.

발악해도 달라지지 않는 운명에 대한 무의미함이었다.

그렇게 카르제는 죽어가고 있었다.

존재의 죽음은 곧 끝과도 같았기에.

다가온 삶의 끝자락에서 카르제는 의미를 찾지 않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그 이후의 일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으니까.

가치있는 죽음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쓰러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절대적인 악마는 쓰러졌다.

불가능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끝내 현실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천 년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의미한 노력. 발악과도 같은 의지.

그 자그마한 인(因)이 지금의 과(果)를 만들어내었다.

‘인과의 운명. 그것은 언제나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허나, 과정을 이해하면 결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법.’

믿지 않았다. 불가능이라 단호히 고개를 저어버렸었다.

하지만 지금.

후우우우웅···.

카르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들이쉬는 숨에 커다란 폭풍우 일었다.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생각은··· 역시나 변함 없었다.

여전히 운명은 바뀌지 않았고, 잠깐의 틀어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카르제는 죽어가는 시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너라면. 그래 너라면.

황금빛의 마력이 카르제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마력의 줄기가 시안과 연결되며 사방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신성력을 불어넣던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보였다.

고개를 홱, 치켜들며 카르제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지금 뭐하는···.”

아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보였다.

황금빛의 마력에 감싸여진 시안의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으니까.

쥐어짜낸 신성력으로도 반응조차 없었던 경련이었다.

그런데 황금빛의 마력에 조금씩,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시안에게서 어떤 거대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아리아는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떠보이며 카르제를 바라봤다.

카르제의 전신 또한 찬란한 황금빛으로 감싸여져있었다.

하지만 시안과는 달랐다.

시안의 존재감은 점점 커져가는 반면.

카르제에게서 느껴졌던 압도적인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카르제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시안을 바라봤다.

‘나는 이 망가진 운명의 고리를 끊겠다.’

오래 전의 일이었고, 또 실패했던 일이었다.

호기롭게 소리친 존재는, 끝내 필멸(必滅)의 운명에 굴복하여 스러졌다.

그런데 지금와서 드는 이 생각은 왜일까.

만일, 만일 카일이 그때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했다면, 지금의 결과가 나올 수 있었을까.

아르나이즈들이 추하게 살아남았다면.

지금의 평화로운 대륙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마 그래서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르나이즈들이 천 년의 역사 동안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말이다.

천 년전에 이미 죽어 사라졌을 이름이건만.

그들의 존재는 영원히 기억되는 이유가 말이다.

그리고 이제, 카르제의 죽음은 다가온다.

카르제는 이제 죽어 사라진다.

그런 카르제의 머릿속으로 카일이 남긴 마지막 말이 스쳐지나간다.

‘설령, 내가 할 수 없을지라도.’

카일은 할 수 없었다. 아르나이즈들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카르제도 할 수 없었다.

이 바뀌지 않는 운명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카르제는 삶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토록 타성에 젖어있던 삶이 의미가 없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선택. 지금 이 죽음.

그로써 시안의 존재 속에, 이름 속에.

카르제의 의지와 존재가 계속해서 이어나갈 것이니까.

세대와 세대를 이어 무한히, 영원히.

아르나이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얼마나···.]

가치있는 죽음이란 말인가.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시안을 중심으로 초월의 마력이 휘몰아쳤다.

카르제는 그 마력을 드래곤 하트에 온전히 담았다.

그리고 그 힘을 시안에게 이어 붙였다.

드래곤 하트의 의지를 시안의 몸 속에 심었다.

카르제의 심장은 그렇게 시안의 존재에 각인되어 굳어졌다.

반면에 심장이 사라진 카르제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존재의 죽음을 맞이하며, 카르제는 마지막 남은 절차를 진행했다.

드래곤은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다.

혼(魂)과 백(魄)의 일체.

드래곤은 죽어도 시체를 남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으로 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드래곤의 흔적이 대륙에 남아있지 않은 이유였다.

그리고 드래곤만이 시안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이유이기도 했다.

무한의 마력을 담아내는 드래곤 하트(Dragon Heart).

혼(魂)과 백(魄)의 일체로 구성된 그릇.

그렇기에 카르제는 드래곤으로서 죽지 말아야했다.

시안에게 혼(魂)을 부여하고.

그 혼(魂)이 사라지지 않게끔 백(魄)을, 육체를 이 세상에 남겨야한다.

아마 드래곤으로서 저급한 죽음일 것이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는다.

드래곤으로서는 저급할지 모르겠으나.

그 어떤 죽음보다 고결하고 또 가치가 있을테니까.

[나 카르제는···.]

아르나이즈들이 이 세상에 남긴 것처럼.

카르제의 유지 또한 이곳에, 시안 속에 계속 남아.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겠다.]

영원히 불멸(不滅)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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