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 금의환향(1)
이어지는 멍한 정신.
하지만 시안은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뭐하고 있어?”
주변 상황이 멍하니 서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콕콕, 옆구리를 찌르는 아리아의 손길에 시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인 카리스와 수인족들에게 가볍게 화답해보이고는 천천히 자리를 벗어났다.
괜시리 멋쩍은 마음도 있었거니와.
말마따나 시안이 자리를 비켜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수 백년만에 수인족들의 거처가 바뀌는 일이었다.
수인족들끼리 이것저것 의논하고 상의할 일들이 상당히 많을 터.
물론 시안이 있어도 큰 상관은 없었다만 그래도 자리를 비켜주는 편이 좋았다.
“그럼 떠날 준비되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
시안은 다시 스마트 폰을 꺼내들어 방금 전의 보상 목록을 확인했다.
아르나이트 특전, <노에미의 자연>.
굉장한 효과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시안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효과 3]의 항목인 자연지기(自然志氣)였다.
『《자연지기(自然肢氣)》
▶업적 보유자의 신체가 자연의 성질을 닮아갑니다. 자연에 존재하는 기(氣)를 온전히 흡수합니다. (마력 축적 효율 +∞%)』
.
.
“마력 축적 효율이 무한으로 증가한다고?”
시안은 발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무한으로 증가한다니.
이게··· 말이 되는 효과란 말인가.
“이 뭔···.”
시안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딴 사기적인 효과가 다 있는가 반면.
한편으로는 효과만 사기이지 사실상 쓸모가 없는 효과라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체가 무한의 효율을 버티지 못할테니까.
이는 시안이 직접 겪어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초월의 마력을 버티지 못해 존재가 붕괴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무한의 효율로 마력을 쌓는다?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긴 하다만···.”
물론 지금의 시안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긴 했다.
카르제의 유지를 이은 드래곤 하트.
그 무한의 그릇이 시안의 가슴 속에서 세차게 뛰고 있었으니까.
따라서 시안에게만은 개사기적인 효과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진짜야?”
그러니까 정말로 무한의 효율을 발휘한다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사실인지 의심이 들었다.
진짜로 무한의 효율을 갖게 된다니.
하지만 효과 설명에 버젓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간 모바일 영주를 생각하면 사실이라고 봐야했다.
현질로 사기를 쳤으면 쳤지, 보상으로 사기를 치지 않았으니까.
“음···.”
그럼에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이건 직접 사용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나.
《<노에미의 자연> 개방 비용 - 500,000 G》
현질이 필요했다.
띠링!
《진행을 하다 막혔을 땐, 현질을···.》
그 순간 모바일 영주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왜일까. 평소와는 달리 그 문구가 이상했다.
평소라면 ‘현질을 해보세요!’ 혹은 ‘현질을 해보시든가욧!’ 등의 깐쪽거림이 떠올랐을 터.
《한 번쯤은 안 하셔도 될 듯···요?》
이번에는 왜인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평소의 모바일 영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하지만 시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그저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남아있는 금액을 확인하려던 찰나.
“아 맞다. 인벤토리 밖에다 두고 왔지.”
시안은 성큼, 멈추었던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나오자.
시안은 무너져내린 지면 속에 고이 놓여있는 인벤토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루카스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루카스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
그건 어떤 여인이었는데··· 꽤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다름 아닌 아리아를 보좌하는 여사제, 로라.
“그래서 그러셨던 거군요.”
“그렇다니까요. 성녀님이 어찌나 난리시던지···.”
루카스와 로라는 인벤토리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주님이 그런 부분에선 눈치가 없으시긴 하시죠.”
“시안 백작님 못지 않게 저희 성녀님도 마찬가지에요.”
하하호호, 웃음꽃이 피는 것이 꽤나 돈독해보였다.
상당히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음? 아, 영주님 오셨습니까?”
이내 루카스가 시안을 발견하고는 몸을 바로해보였다.
로라는 화들짝 놀라며 살짝 당황해보였다.
“저, 전··· 그럼 다시 들어가볼게요.”
그리고는 후다닥, 시안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시안은 사라지는 로라를 바라보다 성큼, 루카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언제 둘이 이렇게 친해진거야?”
“로라님이 제 상처를 치료해주어서 말입니다. 제 몸 상태가 괜찮은지 가끔 오셔서 살펴주십니다.”
뭐, 이번 전투에서 루카스의 활약도 대단했다.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 에런을 상대함은 물론.
시안이 오기 전까지 카이와 듀라크를 상대로 시간을 벌기까지 했으니까.
그 이후로 악마들과의 싸움까지 했으니 말만 안했다 뿐.
루카스도 사경을 해매는 부상을 입었었다.
그리고 로라 또한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
“그런 것치고 둘이 꽤나 다정해보이던데?”
“아무래도 서로 이런저런 험한 일들을 같이 겪다보니···.”
그러면서 루카스가 슬쩍, 시안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시안이 빤히 쳐다보자, 루카스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영주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닙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진짜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 아무 말도 안 했다니까?”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군기 바짝 어린 모습으로 아무런 행동도 내보이지 않았다.
시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허리를 굽혀 지면에 묻힌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현재 보유 중인 골드] - 0G.
그리고 화면 위로 찍힌 골드는 역시나 0골드.
인벤토리 공간 확장으로 모조리 쏟아부은 결과였다.
물론 인벤토리 안에는 수 십억에 달하는 보물들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수 십억에 달하는 ‘값어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골드로 바꾸지 않은 보물.
모바일 영주에서 인정하지 않는 인과였다.
그리고 원래는 0골드가 아니라 1,300골드쯤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유지 관리비로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비가 없으니 아마 루벤의 시설들은 가동을 멈췄을 터였다.
어쩌면 건물들이 부식되고 쓰러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빨리 루벤으로 돌아가서 아멜리아한테 골드로 바꿔달라해야지.’
시안은 다시 허리를 다시 펴보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리를 벗어났다.
“영주님? 이거 놓고 가셨습니다만.”
그러자 등 뒤로 루카스의 물음이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안은 인벤토리를 챙기지 않았으니까.
“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서. 금방 다녀올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지켜줘. 아 혹시, 로라한테 가보려고 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니, 저 로라랑 진짜 그런 관계 아닙니다.”
루카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시안은 어련히 그렇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로라랑?"
시안은 괜시리 웃음이 흘러나왔다.
#
흐레스는 차분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림자 달 소속의 길드원이자 다이애나의 직속 수하, 흐레스.
“수인족들이 루벤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흐레스는 눈앞의 여인을 향해 나지막히 말을 내뱉었다.
달빛을 닮은 은발의 여인, 다이애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대로 떠나셔도.”
흐레스의 말에 다이애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게 뭐가 있어. 일이 이렇게나 잘 해결되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알잖아. 흐레스.”
다이애나는 흐레스의 말을 끊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난 더 이상 수인족의 루나가 아니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에 내가 있을 자리는 없어.”
다이애나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흐레스 또한 그 이상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어쩌긴 뭘 어째. 원래 내가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는 거지.”
암흑가의 정점이자 그림자 달 길드의 길드장, 다이애나.
추악함이 가득한 어둠 속. 그곳이 다이애나가 있어야할 곳이었다.
솔직히··· 막막하기는 했다.
그림자 달 길드는 거의 해체 직전까지 몰렸으니까.
거의가 아니라 사실상 해체나 다름 없었다.
남아있는 길드원은 흐레스가 전부 였으니까.
그렇기에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수 백년간의 은둔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수인족들.
수 백년 간의 어둠에서 다시 양지 밖으로 나가는 이들.
그런 수인족들을 보고 있자니 대체 왜일까.
‘저는 어쩌면··· 암살자로서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커너가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전 그림자 달 소속의 특급 암살자.
현 루벤의 암살 교관, 커너.
다이애나의 수하였을 당시, 커너는 비관의 결정체였다.
세상은 온갖 더럽고 추악한 것이 가득한 곳이라 생각했고 웃음 같은 건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커너를 바꾼 것이 바로 루벤이었다.
세상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 바로 루벤이라는 세상이었다.
하여 지금, 그 루벤이라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수인족들.
‘길드장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이애나는 솔직한 심정으로 부럽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다이애나는 미련을 털어버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곳에 다이애나가 있을 곳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작별 인사 정도라도···.”
“인사라도 남기면 괜히 피곤해져. 대족장··· 아니, 카리스 오빠 성격을 너도 잘 알잖아.”
그리고 그러면 더 미련이 생겨.
다이애나는 마지막 말을 삼키듯 내뱉었다.
“이제 그만 가자.”
다이애나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나갔다.
그렇게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하나 둘씩 미련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제 떠나시려는 겁니까?”
흠칫.
낯선 목소리에 다이애나의 발걸음이 덜컥, 굳어버렸다.
“오랜 만에 돌아오신 고향인데 조금만 더 있다 가시지 않고요.”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바라본 그곳.
그곳엔 금발의 사내, 시안의 모습이 보였다.
시안은 흐레스를 지나쳐 다이애나 앞으로 걸어왔다.
흐레스는 앞을 지나치는 시안을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다이애나 또한 당황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는 시안을 바라봤다.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다이애나는 시안의 기척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다이애나는 당황 섞인 얼굴로 시안을 바라봤다.
“이대로 말없이 떠나시면 카리스님이 많이 섭섭해 하실 것 같은데요.”
시안은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다이애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작께서 신경쓰실 일이 아닙니다.”
“뭐, 그건 그렇죠. 저도 가정사에 끼어들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꽤 복잡한 가정사를 가진 터라.
그러면서 시안은 웃음을 흘려보였다.
“절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별 다른 건 아니고···.”
시안은 나지막히 말을 이었다.
“저와 같이 루벤으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
다이애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보였다.
시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기에 뚜렷한 놀람의 표정이 여과없이 다이애나의 얼굴로 드러났다.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말.
“아무래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하시는 것 같네요.”
다이애나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놀람도 놀람이지만 시안의 말마따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루벤에 다이애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필요하다고요?”
다이애나는 시안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이애나가 본 루벤은 완벽한 영지였다.
세상에 다시 없을 천상의 유토피아.
그리고 다이애나는 그림자 달의 길드장이었다.
범죄자들이 판을 치는, 심히 개새끼들이라 불리는 암흑가의 여인.
비록 다이애나는 그런 범죄자들에게 규칙이라는 것을 부여하고 무분별한 범죄를 막았다.
그러나 범죄자는 범죄자였다.
정점에 서있다 뿐, 그런 범죄자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이애나가 루벤에 필요할 리가 없었다.
루벤은 세상 비관 가득하던 커너에게 웃음이라는 것을 알려준 낙원.
그런 낙원에 다이애나 같은 사람은 필요하지 않았다.
음지와 양지. 극과 극.
다이애나와 루벤은 맞닿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안이 이런 제안을 주는 이유.
설마 카리스의 동생이기 때문에?
내가 대족장의 혈통이기 때문에?
해서 나 또한 받아주려는 건가?
그런 거라면···.
“루벤에는 정보 기관이 있습니다.”
일순간 들려온 시안의 말.
시안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름처럼 정보를 수집하는 기관입니다. 제국의 정세를 파악함은 물론, 자금과 물자의 흐름과 하찮은 소문들까지. 정치, 경제 산업 등등 세상의 온갖 정보들을 가리지 않고 수집하여 판단하는 곳이죠.”
다름 아닌 《꿰뚫어보마! 정보기관 Lv.1》.
자그마치 350만 골드를 현질해서 지은 건물이자 시설이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작동하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 정보 기관은 현재로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냥 건물만 들어서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아시다시피 정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설령 정보를 얻는다 하더라도 그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죠. 요즘 세상에 거짓정보가 너무도 판을 치니까요.”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쉬운 일 정도가 아니다, 라고 말할 것이 아니었다.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도 능력이었거니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일을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판치는 거짓 정보를 색출하는 것은 말할 건덕지도 없었다.
오랜 세월 굴러먹은 정보 전문가들도 애먹는 사안들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상당한 경험치를 동시에 요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제 영지민들은 한평생 어둠의 숲에서 박혀지내서 말입니다. 마수들 때려잡는데는 탁월하지만··· 역시나 세상 물정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까막눈입니다. 아무래도 정보와 관련한 일은 영···.”
350만 골드가 땅바닥에 버려지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말을 나지막히 내뱉으며 시안은 다이애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때서야, 다이애나는 시안의 제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보고 그 정보 기관을 맡아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시안은 대답 대신 한 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진심이십니까?”
“농담처럼 들리십니까?”
다이애나는 그런 시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안은 그런 다이애나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제안 자체는 얼핏 가벼워보였다.
그러나 바라본 시안의 눈빛과 행동은 진심이었다.
그래서 다이애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대족장으로서 주시는 제안이십니까?”
앞선 시안의 제안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어떤 의미로 다이애나를 채용하려는지도 알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굳이? 라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굳이 암흑가의 범죄자를 루벤에 들일 이유는 없었다.
보다 깨끗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뽑으면 그만이었다.
대륙은 넓었고 인재는 많았다.
애초에 루벤은 완벽한 유토피아이지 않은가.
심지어 엘란두르마저도 어찌하지 못하는 영지이니, 루벤에 오고자 하는 인재는 많을 터였다.
굳이 다이애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다이애나에게 제안을 준다는 것.
“새로운 대족장으로서 주시는 동정이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오빠 때문이라면 더더욱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전 더 이상 수인족의 일원이 아니거든요.”
다이애나는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옮겨 떠나려던 그때.
“제가 오해할 만한 발언을 했군요.”
뒤 쪽에서 시안의 말이 들려왔다.
천천히 등을 돌려 바라본 시야.
시안은 실수를 인정하며 살짝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는 루나라는 사람에게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본 시안의 두 눈.
“다이애나.”
시안의 두 눈은 다이애나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저는 루나라는 수인족의 공주가 아니라. 그림자 달의 길드장인 다이애나에게 제안하는 겁니다.”
일순간 다이애나의 정신이 멍해졌다.
그 사이로 시안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그리고 새로운 수인족들의 대족장으로서 제안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아까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대족장은 제가 아니라 여전히 카리스님입니다.”
“······”
“저는 루벤의 영주일 뿐이죠.”
시안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루벤의 영주, 시안 루벤 백작이 그림자 달의 길드장, 다이애나에게 제안드리는 겁니다. 일종의 스카웃인 셈이죠.”
“······ 전 암흑가의 범죄자입니다만.”
“동시에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수장이기도 하시죠.”
시안은 무슨 대수냐는 듯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대륙 최고의 인재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리고··· 혼돈으로 가득찼던 암흑가에 규칙이라는 것을 부여한 것이 다이애나님 아니십니까? 듣자하니···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있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커너가 말해줬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거둬들여졌다고요. 성인이 된 이후, 다이애나님은 자유롭게 살라고 했지만, 커너 스스로가 그림자 달 길드에 남은 것이라고도요.”
“······”
다이애나는 잠시 말 문이 막혔다.
“저희 루벤에서는 그런 이를 범죄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안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침 수인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제가 듣자하니··· 다이애나님이 어릴 때 많은 무시를 받으셨다고요.”
그··· 용인족의 힘을 잘 사용하시지 못하셔서 말입니다.
시안은 뒷말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말씀드렸다시피 루벤에는 정보와 관련한 인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이애나님이 오시면 이제 인재 교육부터 시작해 모든 것을 담당하시게 됩니다.”
“······”
“그리고 수인족들은 이제 루벤의 영지민이고요.”
시안은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참에 과거에 마음에 안 들었던 수인족들로다가 뽑으시죠. 복수도 할 겸 빡세게 교육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과거에 날 무시했던 이들을 참교육한다. 뭐,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러면서 시안은 낄낄거리며 웃어보였다.
당연하게도 다이애나는 웃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시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이어진 잠깐의 정적.
“······ 거절의 선택지도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강요하지 않습니다.
시안은 정말 순수한 제안이라는 듯 양손을 펼쳐보였다.
그렇기에 다이애나는 참으로 얄밉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 무얼 말씀하시는 건지?”
“백작께서 보여주신 모습 말입니다.”
“제가 보여준 모습이라면···.”
시안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시안의 모습에 다이애나는 재차 헛웃음을 흘렸다.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그 모습.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모습.
그리고 수인족들을 받아들이는 배포까지.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고, 제안에 거절의 선택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이애나는 정말이지 기가 차지 않았다.
그렇게 다이애나는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나갔다.
달빛을 닮은 은발이 휘날리며 시야를 어지럽혀왔다.
“그래서. 대답은 어떻게 되는 거죠?”
시안은 떠나가는 다이애나에게 물었다.
다이애나는 슬쩍, 뒤를 돌아 옆 얼굴만을 비쳐보였다.
유려하게 비치는 옆 얼굴과 내려앉은 은발.
그것은 사뭇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윽고 다이애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빠처럼 충성 맹세가 필요한가요?”
다이애나는 그렇게 다시 걸음을 옮겨 떠나갔고.
“그럴리가요.”
시인은 작게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
어둠의 숲에 위치한 루벤.
그런 루벤에 위치한 영주성의 회의실.
“영지의 공방 시설들이··· 전부 가동을 멈추었다는 말씀이십니까.”
한스의 물음에 세미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 시설들뿐만이 아니에요. 저희 상업 지구의 모든 시설들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농업과 목축업 지구의 생산 시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지는 아멜리아와 그레이슨의 보고.
“우리 마법 지구도 그래···.”
“제 연구소들도요.”
그 뒤를 이어 세라와 제리의 침울한 목소리도 이어졌다.
“루벤 전역이 가동을 멈추었다라···.”
한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갑작스레 멈춰버린 루벤의 시설들.
그 때문에 루벤은 완전히 마비가 된 상황이었다.
“그간 생산한 것들로 어떻게 버티고 있기는 해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방비와 관련된 사항은···.”
이 중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단연 루벤의 방비였다.
현재 루벤은 엘란두르와 전쟁 중인 상태.
무엇보다 루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마수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방벽과 경비탑과 같은 기능이 모조리 정지해버린 지금. 루벤은 마수들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해서 거진 모든 인력들을 경비와 방비로 돌려놓은 상황이었다.
“다른 곳에 차출할 인력이 너무도 부족해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루벤의 고질적인 문제인 인력 난.
지금까지는 루벤의 시설들이 갖는 효율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시설의 효율이 좋아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있어야 작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력이 딸리니 매일 같이 과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시설들까지 작동을 멈추버러니 그야말로 와르르르.
하나가 무너지며 그와 관련한 모든 것들이 연이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도련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한스의 표정은 계속해서 어두워져갔다.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을 치겠다면서 떠나간 시안.
그러나 그 돌아오는 때가 상당히 늦어지고 있었다.
연락 또한 끊긴 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무엇보다 얼마 전 들려온 소식.
듀라크를 비롯한 하얀 늑대 기사단이 엘란두르에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시안은 지금까지도 그 소식이 끊겨있었다.
듀라크는 돌아왔지만, 듀라크를 치러간 시안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시안은 그곳에서 이미 죽···.
‘쓸데 없는 생각을.’
한스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떨쳐내려도 계속해서 생각이 붙잡고 늘어졌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한다.
“레아님. 켄드릭님. 죄송하지만 병사들을 빼야할 것 같습니다. 그 빈자리를 두 분이 혹시 더 움직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천 년의 원귀, 레아.
마스터 상급의 데스 나이트, 켄드릭.
현재 루벤의 최대 전력이라 할 수 있는 두 존재.
사실 지금도 레아와 켄드릭이 나서줬기에 이럴 수 있었다.
이 둘이 없었다면 더 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필요했을 터.
하지만 지금은 거기서 더 차출을 해야할 상황이었다.
해서 한스는 레아와 켄드릭의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일까.
레아와 켄드릭에게서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뭔가 싶어 바라본 그곳.
-······!
-······!
레아와 켄드릭이 어째서인지 놀란 눈을 떠보이고 있었다.
눈동자가 없는 레아의 회백색 눈이 부릅, 떠져있었다.
켄드릭의 짙푸른 안광이 크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경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뭔가 싶은 것도 잠시.
-한스! 지금 당장 루벤 전역에 비상 상태를 선포해!
갑자기 레아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떠올랐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길게 설명할 시간 없어! 지금 당장!!
레아는 그 말과 동시에 짙은 마기를 끌어올렸다.
끔찍한 사기가 피어나며 귓가로 귀곡성이 터져나왔다.
그 어떤 존재도 쉬이 대적할 수 없는 사념(死念).
그러나 레아의 표정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떤 강대한 적을 마주한 듯한.
레아, 자신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를 눈앞에 마주한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켄드릭. 이건···.
-주모님과 제가 합공을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상황을 봐서 주모님도 피신하십시오.
그리고 그건 켄드릭 또한 마찬가지였다.
레아와 켄드릭이 동시에 긴장을 한다···?
저 압도적인 두 존재가 동시에 달려들어도 패배를 점치고 있다고?
-한스. 사람들을 모두 대피시켜.
-병사들과 흑사자 기사단원들도 뒤로 물리십시오. 단원들 수준에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동시에 들려오는 레아와 켄드릭의 말.
“······!”
“······!”
“······!”
한스를 비롯한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경악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우우우웅···!
커다란 떨림이, 루벤 전체로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느낄 수 있었다.
전신을 찍어누르는 듯한 존재감.
숨을 옥죄어오는 듯한 끔찍한 위압감.
그리고.
얘들아!! 나 왔어!!
어떤 익숙한 목소리를.
“······ 응?”
“······ 엥?”
“······ 에?”
일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정신이 붕, 떠오르며 어이가 하늘 높이 승천했다.
오직.
-시안···?
-주군···?
얼빠진 레아와 켄드릭의 목소리만이 회의실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