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78화 (278/322)

278화 - 사자는 짖지 않는다

초토화 된 루벤 앞의 풍경.

그러나 루벤은 흠집조차 나있지 않은 아이러니한 광경.

루벤에 당도한 엘란두르 선봉대는 웬만한 백작령의 병력을 뛰어넘는 규모였다.

그러나 결국은 루벤의 방벽을 넘지 못했다.

엘란두르의 선봉대는 모두 전멸했고.

반면에 루벤 쪽의 피해는 전무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던 전투.

그러나 전투는 전투일 뿐,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루벤 앞에 당도한 병력은 아시다시피 엘란두르의 선봉대입니다. 규모는 3만. 하얀 늑대 기사단은 포함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들려온 다이애나의 보고.

이버에 루벤이 패퇴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선봉대였다.

아직 수 십만에 달하는 엘란두르의 본대가 남아있었다.

엘란두르의 최정예 전력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루벤과 엘란두르의 결전.

그 결전의 서막이 올랐을 뿐이었다.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이애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엘란두르 본대는 언제쯤 올 것 같아?”

“아무리 늦어도 3일 안 쪽으로는 루벤의 영역으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본대의 병력 규모는? 별 다른 변동 사항은 없어?”

“네. 특별한 변동은 없습니다.”

그 말은 즉, 30만 병력이 맞다는 뜻이었다.

이번에 패퇴시킨 선봉대를 제하면 약 27만의 병력.

실로 믿기 힘들었으나 이제 와서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나마 영주께서 엘란두르에게 타격을 입힌 덕분에 더 규모가 커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 날, 시안이 엘란두르에게 선빵을 쳤던 일.

듀라크와 하얀 늑대 기사단이 수인족의 왕국에 가있는 사이, 시안은 엘란두르에게 큰 타격을 입혔었다.

“전력을 줄여놓았는데도 이 정도라···.”

괜히 수 백년의 아성(牙城)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규모 병력을 통솔하는 존재.

“총사령관은 듀라크 엘란두르로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엘란두르 가(家)의 가주.

대륙 제 1의 검, 듀라크 엘란두르.

듀라크가 직접 몸을 일으킨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식적으로 총사령관의 입지로서 전쟁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

그만큼 듀라크는 이번 전쟁에 모든 힘을 실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의문이자, 의아한 점이 있었다.

“카이는?”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카이는 이번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

엘란두르 가(家)의 장자이자 제국의 별, 카이.

듀라크는 분명 이번 전쟁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데 카이는 참전하지 않았다?

사실 엘란두르의 최정예 중의 최정예는 카이라 할 수 있었다.

지난 번, 수인족들의 왕국에서 시안이 직접 검을 맞대어 본 바.

카이는 듀라크보다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으니까.

당시의 경지 자체는 듀라크가 약간 앞서있었다.

그러나 시안은 듀라크보다 카이가 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렇기에 카이가 참전하지 않은 것은 예상 밖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있다는 건가?’

굳이 카이가 나서지 않더라도 루벤을 멸문시킬 수 있다는 자신.

뭐, 30만이라는 병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차.

누가 봐도 쉽지 않은 전쟁이었다.

대륙의 모든 이가 루벤의 패배를 점칠 정도로 가능성 자체가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시안은 굴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다이애나.”

시안은 다이애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전쟁은 정보전이라고 하던가.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한 수 먹고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게다가 다이애나의 정보는 굉장히 상세하고 또 자세했다.

엘란두르 내부에 스파이를 심어둔 건가?

절로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세세한 정보가 다이애나의 입에서 들려왔다.

과연 제국 최고 정보 길드의 수장이라는 것일까.

가장 먼저 엘란두르의 동태를 파악했던 것도 그렇고.

이렇게 세세한 정보를 보고하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제국 최고는 제국 최고였다.

그리고 정보는 활용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나는 법.

정보를 얻었으면 이제 그에 따른 대비를 해야만 했다.

“루카스. 병사들은 드래곤 장비에 적응을 했어?”

세미르가 밤잠을 설쳐가며 제작한 드래곤 장비.

밤잠을 설친 정도가 아니라 지금까지 세미르는 잠을 자지 않았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고, 말 그대로 하루 종일을 망치를 붙잡았다.

끊임없이 담금질을 반복하며 드래곤 장비를 만들었다.

그런 세미르에 맞춰 드워프들 또한 모두가 잠을 자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그 결과, 세미르는 쓰러져 병동에 있었지만.

“전부 보급받아 훈련까지 마친 상황입니다.”

그 노고는 오롯이 결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신기전은··· 잘 작동하는 걸 확인했고. 오룡거는?”

“오룡거 또한 문제 없습니다. 훈련은 모두 끝났고, 명령만 내리시면 바로 실전 투입 가능합니다.”

루카스는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확실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모습.

시안은 고개를 돌려 아스란디즈에게 물었다.

“마법 병단은요?”

“드래곤의 장비가 예상 범주를 넘어섰습니다. 마력 전도 부문에서 손실이 없으니··· 해서 아직 세라를 제외한 이들은 완벽히 제어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곧 아스란디즈가 걱정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마력이 폭주하거나, 마법이 통제를 잃어 아군을 향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시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카리스를 바라봤다.

“수인족들은···.”

“모두 준비하고 있습니다.”

카리스는 시안의 물음이 끊나기도 전에 답을 해왔다.

아직 루벤에 적응하기도 전이건만.

또한 큰 일이 있은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수인족들은 투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우리도 준비되어있어.

-흑사자 기사단 전원, 주군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레아와 켄드릭의 말.

모두가 시안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리우는 전운.

전쟁의 서막.

“모두 마음 단단히 먹어.”

이제 그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

시야 앞으로 보이는 루벤의 풍경.

그런 루벤을 빼곡히 에워싼 거대한 규모의 엘란두르 군대.

그리고 그런 군대의 중심 속.

쿵.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가주!!”

라퍼빌스가 자작이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빌고 있었다.

쿵. 쿵. 라퍼빌스 자작은 연이어 머리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이마의 피부가 찢어지고 깨짐에도 쿵!

라퍼빌스 자작은 머리를 찧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라퍼빌스를 내려다보는 존재.

“분명 동태만 살피라. 그렇게 명을 내린 것 같은데···.”

엘란두르의 총사령관, 듀라크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었나?”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제가··· 제가 잠시 공로에 눈이 멀어 미친 짓을 저질렀습니다!”

라퍼빌스 자작은 기겁을 하며 다시 한 번 머리를 쿵!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 개처럼 가주 밑에서 일하겠습니다! 엘란두르를 위해 이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쿵! 쿵!

“그러니 부디 사, 살려만 주십시오 가주!!”

라퍼빌스 자작은 듀라크를 향해 자비를 구했다.

듀라크는 아무런 답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기색이 담긴 눈으로 기세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존재의 죽음을 갈망하는 끔찍한 살의(殺意).

듀라크의 살의는 오롯이 라퍼빌스를 향하고 있었다.

“사, 살려···! 제발···! 커헉···!”

라퍼빌스는 몸을 파르르, 떨어보였다.

숨이 막혀오는 듯 말조차 쉬이 내뱉지 못했다.

듀라크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그런 듀라크의 시선으로 하얀 늑대 기사단의 단장, 에런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3만의 선봉대가 모두 전멸─.”

그리고 에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서걱─!

섬뜩한 절삭음이,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에런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 소리는 라퍼빌스의 목 부근에서 들려왔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지고.

스르륵, 바닥에 박혀있던 라퍼빌스의 목이 아래로 떨구어졌다.

그리고 털썩, 목을 잃은 몸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떨어진 라퍼빌스의 얼굴은 여전히 애걸하는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듀라크에게 자비를 구하며, 숨이 막혀오는 표정 그대로.

본인이 죽는 순간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듀라크는 검을 갈무리 하며 눈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하얀 늑대 기사들이 다가와 라퍼빌스의 시신을 치워버렸다.

그렇게 라퍼빌스의 시신이 치워진 후.

에런은 그때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마도학 투석기에도 뚫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확인 결과 오러의 타격도 흡수한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공성 병기는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듀라크의 눈썹이 잠시나마 꿈틀거렸다.

지금 들려온 에런의 보고.

저 내용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에런이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믿는 편이 더 말이 될 정도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앞선 선봉대의 전멸.

그것은 뚜렷한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에런의 말마따나 공성 병기는 사용하나 마나한 병기가 되어버렸다.

마도학 투석기, 마력 공성추, 마법포 등.

성벽을 뚫고 무너뜨리는 공성 병기는 하등 의미를 갖지 못했다.

되려 쓸데없는 소모만 반복하는 쓰레기나 다름 없었다.

또한 진군의 속도만 느려졌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은 방해물이 되어버렸다.

듀라크는 차분히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라퍼빌스의 피로 젖어있는 바닥.

“그나마 쓸모는 있었군.”

듀라크는 죽은 라퍼빌스를 향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루벤의 동태를 살피고자 보냈던 3만의 선봉대.

무능한 사령관의 판단으로 전멸을 면치 못했지만 그래도 쓸모는 있었다.

다름 아닌 루벤의 방벽에 대한 정보를 얻어올 수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본대 쪽에서 피를 흘려가며 얻었어야할 정보였다.

무의미한 소모전을 반복하고, 크나큰 피해를 입은 후에야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피해와 시간을 단축시켜주었으니 그나마 쓸모는 있었다.

물론 자그마치 3만의 손실과 맞바꾼 정보였다.

그러나 듀라크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쓸모가 있었다.

듀라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 하나였으니까.

“아무래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어진 에런의 말에 듀라크는 정면을 바라봤다.

“과연.”

그리고 고개를 한 번 주억거렸다.

물결치듯 포진한 엘란두르의 군대.

완전히 포위당한 루벤의 풍경.

그러나 철통같은 루벤의 방벽.

마도학의 공성 병기조차 흠집을 내지 못하는 말도 안되는 방벽.

“그렇게 뻗댄 이유가 있었군.”

듀라크는 그 루벤의 방벽을 가만히 바라봤다.

확실히 쉽지 않은 싸움이 되어버렸다.

체급 차이로 찍어누를 것이라는 예상?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찍어누르기는 커녕 엘란두르 쪽도 타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30만 대군을 몰고왔는데도 압도하지 못한다라···.

“과연.”

듀라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쩌면 그 때문일까.

저 멀리, 보이는 루벤의 풍경.

그 위로 도열한 루벤의 병사들.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공포 혹은 절망과 같은 감정이.

이 30만 대군이라는 거대함 앞에서 굴하지 않고 있었다.

엘란두르라는 이름 앞에서 떨지 않고 있었다.

루벤의 잡것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포에 떨지도 않았고, 절망하지도 않았다.

되려 진득한 투기(鬪氣)를 끌어올릴 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뒤이어 들려온 에런의 물음.

듀라크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터벅.

듀라크는 루벤이라는 적진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

“루카스 대장님! 엘란두르 쪽에서 루벤을 향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

크나큰 병사의 외침에 루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드디어 시작인 건가.

루카스는 보고를 한 병사에게 되물었다.

“인원은?”

“한 명. 한 명입니다!”

그러나 곧 들려온 대답에 루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명이라니···?

루카스는 직접 그 광경을 확인했다.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결과···.

정말로 한 명이었다.

수 십만이 드리운 군대 속, 오직 한 명의 사내만이 터벅, 앞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사내는 수 십만의 군대를 가로지르며, 루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듀라크···?”

엘란두르의 총사령관, 듀라크 엘란두르.

지금 루벤으로 다가오는 사내는 다름 아닌 듀라크였다.

듀라크의 걸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가신들을 지나치고, 하얀 늑대 기사들은 지나.

수 십만의 병사들까지 지나쳐 루벤으로 걸어왔다.

그렇게 듀라크는 수 십만의 군대 가장 앞에서 서보였다.

홀연히 혹은 오연히.

듀라크는 루벤에 가장 가까이 서있었다.

그런 듀라크의 모습은 한 마리의 늑대와도 같았다.

수많은 무리들을 이끄는 우두머리 늑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고고함.

엘란두르를 상징하는 하얀 늑대.

듀라크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루벤을 바라봤다.

철통 같은 루벤의 방벽과 더불어, 그 위에 드리운 루벤의 병사들 그리고 루카스를 바라봤다.

거리가 멀어 흐릿한 시야였다.

그러나 루카스는 듀라크를 바로 앞에 마주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루카스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어갔다.

지금 저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지?

루카스와 병사들의 생각은 복잡해져만 갔다.

그럼에도 듀라크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아─!!!

듀라크의 전신으로 어마어마한 힘이 터져나왔다.

마스터 상급의 기사.

대륙 제 1의 검, 듀라크 엘란두르.

대륙 최강의 기사가 뿜어내는 힘은 가히 ‘끔찍하다.’라고 표현할 법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서 끔찍함이 느껴지고 있었으나, 여기에 무언가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끝없는 광기.

새빨간 악의.

듀라크의 주변으로 먹구름처럼 검붉은 악의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듀라크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앗아가기 시작했다.

모습은 분명한 듀라크였다.

늑대들의 우두머리 같은 분위기도 여전했다.

그러나 어둠으로 잠긴 사위.

단 한 점의 빛도 허용하지 않는 칠흑의 어둠.

그 사이로 새빨간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

“······!!”

루벤의 병사들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루카스 또한 그런 병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금···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

검을 옆으로 늘어뜨린 채, 오연히 서있는 듀라크의 모습.

그런 듀라크에게서 느껴지는 힘.

피부 끝을 아려오는 이 힘. 이 기운.

익숙한··· 힘이다. 아니, 각인된 힘이다.

본능 속에 내재된 공포에 각인된 힘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루벤의 병사들은 알고 있었다.

“아, 악마···.”

악마의 힘. 이건 분명한 악마의 힘이다.

그것도 평범한 악마의 힘이 아니었다.

악마라는 말 자체가 어찌 평범할 수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이건 평범한 악마의 힘이 아니었다.

천 년전, 대륙을 혼란에 빠뜨렸던 악의 존재들.

일곱 가지의 대죄(The Seven Sins).

교만, 탐욕, 질투, 분노,색욕, 탐식, 나태.

그 죄에서 깨어난 일곱의 악마.

악마 7군주의 힘.

사아아아아···.

지금 듀라크에게서, 악마 7군주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병사들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난 날, 수인족들의 왕국에서 직접 경험해봤기에 알 수 있었다.

성물의 봉인이 해방된 악마 군주의 힘을 대면했기에 확언할 수 있었다.

완전한 해방을 맞이한 악마 군주.

그리고 그를 뛰어넘는 보다 높은 차원의 무언가.

듀라크에게서는 누르비아와 굴네리아.

그 두 악마 군주 이상의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렇기에 병사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느껴지는 힘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루벤의 병사들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피어나는 흉측한 악의에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대항할 수 없다는 생각.

그것이 저도 모르게 피어난다.

그 순간.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엘란두르 안쪽에서 크나큰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건 듀라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듀라크는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루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올려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듀라크는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절대자의 존재처럼.

외침은 듀라크 너머. 엘란두르 진영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엘란두르의 발 아래 굴복하라!

그렇다면 옛 정을 생각하여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루벤의 병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것은 엘란두르가 아닌 순전한 듀라크에게서 비롯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꽈드득, 가진 바 무기를 움켜쥐었다.

고작 투항이나 하자고, 항복이나 하자고.

지금까지 싸워오고 투쟁해온 것이 아니니까.

“우린 투항하지 않는다!”

“우린 끝까지 싸우겠다!”

루벤의 병사들은 이를 까드득, 씹었다.

밀려오는 공포를 애써 떨쳐내었다.

투지를 끌어올리며, 떨리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어리석기는.

귓가에 맺히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엘란두르의 진영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었다.

고고히 서 있는 우두머리 늑대.

듀라크의 입에서 내뱉어진 소리였다.

그건 작디작은 울림이었다.

그러나 귓가에 또렷이 들려온다.

그리고 잠시.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듀라크의 전신으로, 다시 한 번 끔찍한 기운이 폭사하기 시작했다.

주변이 심연으로 잠식되며, 끝없는 광기가 사출된다.

저 힘 앞에서··· 루벤의 방벽은 의미가 없다.

무기를 움켜쥔 병사들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드래곤의 장비가 주는 강인함에도 쉼없이 몸이 떨려왔다.

대적할 수 있을까.

이길 수··· 있을까.

병사들은 끝내 그런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한 번 피어난 생각은 계속해서 확산되어나간다.

수 백년의 아성은 그 이유가 있다.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은 필시 그 이유가 있다.

대륙 제 1의 검이란 현존하는 최강자.

저 압도적인 힘에··· 감히 대항할 수 없다.

전의를 태우나, 감추었던 두려움이 몰려온다.

투기를 끌어올리나, 각인된 공포가 떠오른다.

어쩌면 우리는 이 전쟁 끝에 모두···.

바로 그때.

터벅.

어떤 발걸음이 들려왔다.

“늑대는.”

어떤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강대한 적을 만나면 으르렁 거린다.”

들려오는 목소리 또한 작은 울림이었다.

방금 전, 듀라크의 것보다도 작디 작은 울림이었다.

그렇기에 이 울림은 듀라크의 것이 아니었다.

울림은 다시 한 번 들려온다.

“상대가 나를 무서워하도록.”

으르렁 위협하는 것으로밖에 상대를 쫓아낼 능력이 없으니까.

본인 스스로도 두려우니까.

“상대가 섣불리 달려들면 자신도 위협을 느끼기에. 늑대는 강대한 적을 만나면 으르렁 거린다.”

지금 저기 보이는 늑대처럼.

나지막한 울림은 분명 귓가로 울려왔다.

그리고 가슴 속의 알 수 없는 무언가 또한 울려왔다.

두려움이 물러난다.

각인된 공포가 사라진다.

두려움과 공포가 사라진 빈자리.

그 사이로 끝없는 투지(鬪志)가 자리매김한다.

콰콰콰콰─!!

거대한 기운이 터져나왔다.

감각 너머에서 아득한 힘이 느껴진다.

실로 형용할 수 없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초월의 힘은, 드리운 광기를 무차별적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광기가 그에 대항한다. 그러나 의미는 없었다.

소리조차 터져나오지 못하고, 집어삼켜질 뿐이다.

“······!”

듀라크의 두 눈이 크게 떠진다.

자신의 힘이 무차별적으로 집어삼켜짐에, 듀라크의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 사이로 터벅, 발걸음이 이어지고.

그사이로 다시 한 번 나지막한 울림이 들려온다.

“허나, 진정한 강자는 조용히 침묵할 뿐이다.”

강대한 적이 나타남에도,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으르렁 짖어대면서 상대에게 겁을 주는 건, 개나 늑대들이나 하는 짓.”

그와 동시에 한 사내가 듀라크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한 야수의 형상과도 닮아있었다.

모습은 분명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고, 느낀 것.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포악한 야수의 모습이었다.

천 년전, 아르나이즈 카일을 상징했던.

그러나 지금, 루벤의 시안을 상징하는.

포효하는 한 마리의 검은 사자.

조용히 침묵하는 진정한 강자.

“사자는 짖지 않는다.”

흑사자의 거친 포효는.

하얀 늑대를 집어삼킬 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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