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 용서받지 못할 자, 용서할 수 없는 자
듀라크의 생각이 한 박자 늦게 떠오른다.
촤학! 복부에 박힌 멸살의 검이 뽑혀져 나간다.
붉은 피가 뿌려지며, 듀라크의 몸이 휘청거렸다.
폭사하던 듀라크의 기운은 무(無)의 세계로 빨려가 소멸해갔다.
시안을 바라보는 듀라크의 두 눈은 새빨깐 피로 젖어있었다.
듀라크는 시안을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내뱉어지는 것은 말이 아닌 핏덩이였다.
듀라크는 한참 동안이나 피를 토해냈다.
이윽고 파르르, 떨리는 두 눈으로 시안을 바라봤다.
“너는···.”
그리고 다시 한 번 듀라크의 말은 끝까지 내뱉어지지 못했다.
쿨럭, 다시 한 번 쏟아지는 핏덩이에 듀라크의 몸이 크게 꺾였다.
꺾인 시야로 듀라크는 그때서야 주변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다.
루벤과 엘란두르의 전쟁.
거리가 멀어진 탓에 전쟁의 양상은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멀어 어떻게 상황이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듀라크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지금쯤, 루벤이 불타고 있어야했으니까.
끊임없는 비명이 들려오며, 루벤의 백성들이 처참히 유린당하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루벤은 건재하고 또 굳건했다.
전쟁의 소리는 들려오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울부짖는 늑대의 비명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모든 것이 끝이 났다.
“쿨럭···!”
듀라크가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꽉, 다문 입가를 비집으며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듀라크는 바닥에 널브러진 검을 주워들었다.
이를 까드득, 씹으며 시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런 기세가 담기지 않은 검은, 휘적거릴 뿐이었다.
시안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베어낼 뿐이었다.
“어떻게···. 네가···.”
듀라크가 뜨문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뚫려진 복부의 상처는 계속해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듀라크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역시나 시안에게 닿을 수 없었다.
뻗어도 뻗어도 닿지 않았다.
되려 점점, 멀어져갈 뿐이었다.
시안이 닿은 저 힘에. 저 강함에. 저 경지에. 저 수준에.
듀라크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조리한 일이다.
나는··· 나는 대륙의 절대 강자. 그렇기에 이상하다. 말이 안된다.
그 누구도 나보다 강할리가 없다.
나는··· 나는···.
“인정할 수···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시안이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시안이 자신보다 아득한 저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나는 너를··· 인정할 수··· 없다···.”
시안이라는 존재 자체를.
듀라크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럼에도 닿지 않는 검격은, 듀라크의 마음 속 무언가를 크게 격동시켰다.
네가 감히, 라는 증오(Ira)의 마음을.
네가 어떻게, 라는 질투(Envy)의 마음을.
그리하여 여기에 두 명의 인간이 있었다.
“나는··· 나는 너를···.”
한 때는 인간이었으나, 끝내 마음을 잃어버린 것.
【킥. 키킥.】
【키키킥.】
그리고 인간에게서 비롯되었으나, 흉측하게 일그러져버린 끔찍한 죄악(罪惡)인 것.
지금 여기.
“나는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키키키킥!】
【히히히힛!】
인간이었던 존재가 2명이 있었다.
꽈꽈꽈꽈꽈꽝!!
듀라크의 전신으로 피처럼 끈쩍한 마력이 터져나왔다.
듀라크 안에 내재되어있던 악(惡)의 힘.
질투의 악마, 엔비리아(Enviria).
분노의 악마, 이라리아(Iraria).
칠흑의 두 군주가 그 눈을 떠보였다.
힘이 명백한 살의를 띠고 악독하게 움직인다.
그리고 보인 듀라크의 모습은···.
【“나는 너를··· 키키킥···! 인정···! 히힛! 할키킥없힛다!”】
차마 인간이라 정의할 수 없었다.
또한 악마라 정의할 수도 없었다.
두 군주의 힘을 이어받은 존재.
두 군주의 존재가 엉겨붙은 모습.
이 세상에 형상화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인과의 법칙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기괴함.
인간도 악마도 아닌 무엇.
【“끄아아아힛아킥!”】
저것, 이라는 표현만이 설명할 수 있을 뿐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터져나온 악의(惡意)가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합일된 두 군주의 힘은 그 어떤 악(惡)보다 끔찍했다.
모습은 기괴했고, 사출되는 힘은 괴기했다.
그 누구도 저 존재에 대항할 수 없었다.
어떤 누구도 이 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
【“경배하라···! 키키킥! 새로운 악의 탄생을···!”】
태고의 악(惡).
혐오스러운 흉물.
그리고 들려오는.
서걱─!
하나의 절삭음.
흉물의 발걸음이 주춤, 뒤로 물러선다.
이윽고 스르륵, 흉물의 몸이 갈라지며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
반응조차 할 수 없었던 일격.
“결국···.”
그 사이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흉물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흉물에게서 느껴지는 형용할 수 없는 힘에 본능이 쉼없이 경고를 해왔다.
그러나 시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떨지도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터벅.
“끝까지 가버리고야 마신 겁니까.”
흉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었다.
내딛는 시안의 발걸음은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바라보는 시안의 두 눈 또한 낮게 내려앉아있었다.
그리하여 들려오는 시안의 목소리는.
“아버지···.”
어떤 슬픔에 잠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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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는 있었다.
듀라크가 악마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을.
시안이 그간 겪어온 상황과도 달랐다.
듀라크는 악마에게 정신이 지배당하지는 않고 있었으니까.
이성을 유지한 채로 악마의 힘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안은 분명히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착각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금.
【“어떩··· 겕···?”】
시안은 혐오스러운 흉물을 마주하고 있었다.
케륵, 케르륵.
사선으로 베어진 흉물의 몸이 엉겨붙기 시작했다.
피륙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응당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으나, 이 흉물은 그렇지 않았다.
흉물은 기괴스러운 살덩이들을 기워붙이며 끝내 존재를 완성시켰다.
존재만으로도 공포를 자아내는 태고의 악(惡).
“전, 당신을···.”
그러나 시안은 태고의 악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슬픔 어린 눈으로 흉물을 바라볼 뿐이었다.
듀라크를 루벤에서 떨어뜨렸던 이유.
거리를 벌려 이곳에서 싸움을 이어나간 이유.
그것은 루벤에게서 멀어지려는 의도임과 동시에 시안이 자유로이 힘을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현재 시안이 행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격.
듀라크를 마무리했던 진(眞) - 아수라(阿修羅).
그 이유 또한 듀라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였다.
수인족들의 왕국에서 헬렌과 카리스를 구했던 것처럼.
둘에게서 누르비아와 굴네리아에게 잠식된 정신을 끊어냈던 것처럼.
이번에도 듀라크에게 엉겨붙은 군주의 존재를 떼어내고자 했던 의도였다.
또한 마지막에조차 시안은 충분히 듀라크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안은 듀라크의 목이 아닌, 듀라크의 복부를 노렸다.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닌, 제압을 하는 것에 그쳤다.
처음부터. 이 전쟁이 시작된 순간부터.
시안은 듀라크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하여 악마에게 현혹되었다. 악마에게 조종당했다.
듀라크가 행한 것은 모두 악마의 짓이었다.
그렇게 변호하고 듀라크의 목숨만은 살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그동안 엘란두르가 한 행각들은 분명한 죄였다.
따라서 듀라크가 저지른 만행들을 덮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용서는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습니다.”
용서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 생각했다.
아니, 용서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엘란두르는 몰락하겠지만.
그리하여 예전과 같은 권위와 권세를 누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평범한 노후 정도는 보낼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엘란두르는 무너뜨릴 생각이었지만, 듀라크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전··· 아버지를 죽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니까.
아버지 같지도 않은 아버지였지만.
아버지로서 해준 것도 하나 없는 아버지였지만.
아비의 정(父情)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지만.
듀라크와 시안. 시안과 듀라크.
그 속에 흐르는 피는 분명 같은 것이니까.
“병신 같은 생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호구 새끼. 답답한 새끼. 병신 새끼. 세상 사람 모두가 욕을 하고 손가락질 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안은 모든 것을 감내하고자 했다.
사람들의 욕 따위는 감내할 것임을 다짐했다.
“그게 가족이니까요.”
아버지라는 가족이니까.
세상 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변함없이 서있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니까.
잘못을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것이 가족이라는 것이니까.
그게 시안이 루벤에서 느낀 가족의 정이자.
먼 훗날, 시안이 되고자 싶었던 아버지로서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런데 대체 왜!!”
꾸륵. 꾸르륵.
【“너, 너늙··· 말돍 안되늙 졹잭···. 나늑 너륵 인정 할··· 숡 없닭···.!” 】
“이렇게까지 해야만했던 겁니까···.”
아버지.
시안의 마지막 말은, 공허히 울려퍼져나갔다.
듀라크는. 아니, 혐오스러운 흉물은.
태고의 악은. 경악 어린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군주의 존재가 합쳐진 악(惡).
그러나 흉물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눈앞의 시안을 어찌할 수 없다는 공포.
그것이 흉물이 느끼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시안은 무언가를 억누르며 이를 까득, 깨물었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못난이처럼 일그러진 시안의 얼굴은, 무언가로 맺혀있었다.
시안은 맺히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당신을 용서할 수가 없게 되버렸습니다.”
시안의 아버지, 듀라크는 용서할 수 있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시안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악마는 용서할 수 없었다.
악마를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너무도,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아왔으니까.
시안의 어깨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짊어져있으니까.
천 년전, 목숨을 불사르며 이어온 아르나이즈들의 유지.
드래곤으로서 저급한 죽음을 맞이하고, 자신의 존재와 유지를 시안에게 남긴 카르제.
지난 무수한 역사 동안 악마와 싸워온 사람들의 희생.
지금 저기, 시안과 루벤을 위해 싸우고 있는 루벤의 사람들.
“이제 아버지를 용서하면.”
천 년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세대와 세대를 이어온.
모든 사람들의 유지를, 신념을, 노력을, 믿음을, 신의를, 도의를, 인의를.
“저버리게 되버리니까요.”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니까.
시안이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준 모두를 배신하게 되어버리니까.
그렇기에 이제 듀라크는 용서받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 시안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용서받지 못할 자.
용서할 수 없는 자.
【“인정··· 할숡 없···!”】
저건 더 이상 듀라크가 아니었다.
인간도, 악마도 아닌 흉물이었으며. 시안의 아버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인정할 슥··· 엄따···!”】
흉물은 듀라크가 했던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은 흉물이 내뱉는 말임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듀라크가 내뱉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그래, 듀라크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 끝까지··· 당신에게 자식일 수는 없었던 겁니까.”
시안을 자식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
시안은 씁쓸한 슬픔을 삼켰다.
이윽고 멸살의 검을 움켜쥠에, 드래곤 하트에 깃든 초월의 마력을 온 사방으로 터트렸다.
“제가 이 검을 완성했더라면··· 어쩌면 아버지를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안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슬픔에 잠긴 눈으로 흉물을, 듀라크였던 것을 바라봤다.
“제가 자식으로서 드리는, 아버지에 대한 마지막 예의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서걱─! 들려오는 절삭음.
흉물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덩어리 지어진 눈은 도무지 눈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모습에는 틀림없는 경악이 새겨져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인지할 수도 없었다.
흉물의 눈에 보이는 것은 분명한 시안이었다.
그러나 시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스르륵, 흉물의 몸이 베어져 스러진다.
잔상조차 남기지 않는.
궤적조차 보이지 않는.
극한의 빠름, 쾌검(快劍).
【“어, 어떩겕···?”】
기워진 흉물의 사고가 그때서야 되돌아온다.
그리고.
사박, 하는 발걸음이 들려오며.
시안의 몸이 그때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흉물이 그 모습을 인지했을 때.
시안의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있었고, 또 이미 휘둘러져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검의 궤적이 확실하게 인지되었다.
어디를 노리고, 어디를 향하는지 똑바로 보였다.
흉물은 가진 바 모든 악(惡)의 힘을 폭사 시켰다.
하지만.
뚝, 휘둘러지던 시안의 검이 멈추었다.
멈춘 검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흉물의 악(惡)을 유린했다.
마치 법칙을 거스르는 것처럼.
시안의 검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듯 휘어지고 또 꺾여진다.
그 과정 또한 눈으로 명백히 보이고 있었다.
감각으로도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파사삭.
보이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저 검의 궤도를, 흐름을. 도무지 인지할 수가 없었다.
예상과 인지를 아득히 벗어나는 변화무쌍, 환검(幻劍)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흉물의 생각이 다시 한 번 끊긴다.
그리고 다시 생각이 되돌아왔을 때.
기이하게 흐르던 시안의 검이 돌연 멈추어져있었다.
아니, 멈춘 것이 아니다. 그저 느린 것이다.
멈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안의 검은 느릿하게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또한 검의 궤적과 검로가 눈에 선히 보였다.
움직일 수만 있다면, 피할 수도 있었다.
【“······!!!”】
그러나 흉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피할 공간이··· 인식되지 않았으니까.
이 공간 전체가 시안의 검에 의해 장악된 것만 같았다.
공간 전체가 대적(大敵)이 되어 흉물을 압박하고 있었다.
상대의 영역을 천천히 걸어가 잠식하는 느림, 둔검(鈍劍).
그리고 다시.
퍼석, 내려치는 검에 공기가 내려앉는다.
콰앙, 휘둘러지는 검에 공기가 비산한다.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 강검(强劍).
시안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내딛는 시안의 발걸음은 무겁게 대지를 짓누른다.
허공을 수놓는 시안의 검이 그 무게를 담는다.
그 검 속에서 흉물은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늘 전체가 내리누르는 듯한 무게감, 중검(重劍).
그렇게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시안의 발걸음이 이어질 듯 끊어진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다시 끊어지며 이어진다.
그로써 앞선 모든 묘리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극한의 빠름 쾌(快).
변화무쌍의 환(幻).
느림의 미학 둔(鈍).
굴하지 않는 강(强).
하늘의 무게 중(重).
본연 스스로가 그러하듯, 묘리들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져갔다.
그리하여 완성되는 하나의 흐름, 유검(流劍).
그리고 마지막, 패검(覇劍)에 이르렀을 때.
시안은 끝내 패검(覇劍)을 시전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더이상···.
사르륵.
검을 보여줄 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시안은 멸살의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달뜬 숨을 삼켰다.
가만히 두 눈을 감음에, 감각으로 그 어떠한 존재도 느껴지지 않는다.
살며시 두 눈을 뜸에, 시각으로 그 어떠한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
끝내 소멸해버린 태고의 악.
끝내 떠나가 버린.
“······ 안녕히 가십시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