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83화 (283/322)

283화 - 끝나지 않은 과거(2)

레이첼은 정말이지 아무런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기에 그 어떠한 가능성과 경우의 수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30만의 병력.

엘란두르의 모든 전력이 집결한 전쟁.

그리고 성물의 해방과 두 군주의 힘을 사역한 듀라크 엘란두르.

여기에 ‘패배’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패배는 엘란두르가 아니라 루벤 쪽에 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계획에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나.”

들려온 이사벨의 물음.

레이첼은 단번에 고개를 저었다.

없었다. 맹세코, 결단코 계획에 변수 따위는 없었다.

모든 것들이 틀어짐 없이 완벽했다.

성물의 해방은 완벽했다.

듀라크는 두 군주의 힘을 사역했다.

물론 듀라크가 두 군주의 힘에 먹힐 가능성은 존재했다.

이것이 이 계획의 변수라 하면 유일한 변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결과가 도출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니, 먹혔다면 되려 이런 결과가 더더욱 나와서는 안되었다.

두 군주의 힘이 얽혔다면 실로 상상하기 힘든 존재가 되었을테니까.

그건 가히 태고의 악(惡)이라 부를 만큼 새로운 악이 되었을테니까.

그 악에 대항할 수는 존재는 없었다.

결단코, 절대로 그 어떤 누구도 그 악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마주한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레이첼의 두 눈이 쉼없이 떨려왔다.

당황, 당혹, 혼란, 놀람.

갖가지 감정이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반면에 이사벨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표정은 담담했고 또 한편으로는 냉혹했다.

이사벨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 밖, 커다른 창문으로 보이는 엘란두르의 풍경.

한때는.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웅장한 권세를 자랑했던 풍경이었다.

그 누구도 범점할 수 없었던 수 백년의 아성(牙城)이었다.

그러나 지금 커다란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

그 어디에도 옛 영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

어둠의 숲에 위치한 루벤.

그런 루벤 중앙에 자리한 광장의 한 공간.

그곳엔 일련의 사람들이 포승줄에 묶여있었다.

다름 아닌 엘란두르 산하의 가신들로서 모두 제국의 어엿한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포승줄에 묶여 이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패전 영지의 포로라고는 하지만 귀족에 걸맞지 않은 대우였다.

그러나 가신들은 아무런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어찌나 꽉, 묶었는지 포승줄에 묶인 팔에 피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만 없이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불만을 토로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귀족이라는 쓰잘데기 없는 권위를 들이밀었다가 어떤 대우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

이 사내 앞에서 권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루벤의 영주, 시안.

외모로 보이는 나이는 앳되어보이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어딘가 어벙한 분위기마저 느껴지는 것은, 저게 귀족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경험해보고 또 느꼈기에 모르지 않았다.

수 십만의 병력들조차 어찌하지 못했던 기세.

짓눌러죽이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듀라크를 꺾으며, 이 대륙의 진정한 패자(覇者)로 거듭난 절대적인 존재.

가신들은 시안을 결코 애송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되려 엘란두르의 가주··· 아니, 가주였던 듀라크를 마주한 것보다 더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

“······”

가신들은 그저 슬금슬금, 눈치만 볼 뿐이었다.

죽이지 않고 이렇게 포승줄에 묶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시안이 천천히 가신들에게 다가왔다.

가신들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 깔았다.

“지금부터 너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 위로 시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질문의 여하에 따라, 목숨을 살려줄지 말지를 결정하겠다.”

그와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전신을 찍어누르는 듯한 존재감 앞에서 가신들은 헛튼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라는 말조차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저 빨리 시안이 질문을 해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리고 이어진 시안의 물음.

“수상한 면모를 느, 느끼긴 했습니다만···.”

“저, 저도 딱히 악마라고는···.”

가주들은 눈치를 살피며 서로에게 답을 미루었다.

“알고 있었나. 모르고 있었나.”

하지만 재차 들려오는 시안의 물음에 끄윽!

전신을 짓누르는 존재감이 더욱 거세어져왔다.

아무런 기세조차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존재감이었다.

그러나 결코 단순한 존재감이 아니었다.

고양이 앞에 쥐.

뱀 앞에 놓인 개구리.

그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보다 차원 높은 존재감.

세상 모든 만물 위에 군림하는 최강자.

그 앞에서 결코 거짓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아, 알고··· 있었습니다.”

가신들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고.

시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물음을 이어갔다.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증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있나?”

“······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그 일은 가주의 최측근들··· 아니, 엘란두르의 수뇌부들 사이에서만 오고 간 일인지라···.”

시안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엘란두르의 가신들인 너희들이 엘란두르의 수뇌부가 아니면 누가 수뇌부지?”

“외견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사실 수뇌부라 할 수 없습니다.”

“외람되오나··· 백작께서는 어떤 의미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가신들의 대답에 시안은 살짝, 표정을 풀었다.

한때 시안도 엘란두르의 일원이었다.

시안 엘란두르라는 이름으로서, 시안은 엘란두르의 체계가 어떠한 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저들이 말하는 엘란두르의 수뇌부.

그건 엘란두르의 핏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했다는 물질적인 증거는 없었다.

증거라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지금 이 가신들의 증언들 뿐이었다.

“엘란두르가 악마와 결탁되었다는 그 증언을 황제 폐하 앞에서 할 수 있나?”

하지만 증언 또한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엘란두르의 가신들이라면 더더욱.

“그, 그건···.”

“저희는···.”

그리고 가신들은 쉽사리 답을 해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엘란두르의 후폭풍이 무서웠으니까.

악마와 결탁되었다는 것은 반역을 넘어 대륙의 공적이 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그 일을 황제 앞에서 증언한다는 것.

그것은 곧 엘란두르를 배신한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당연히 엘란두르는 그 일을 좌시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어떤 식으로든 배신을 한 가신들을 처단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가신들은 대답을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예전과는 크게 달랐다.

루벤과 엘란두르와의 전쟁.

수 백년의 아성은 결국 무너졌고.

대륙 제 1의 검이자 이 대륙의 패자는 더 이상 엘란두르가 아니었다.

물론 엘란두르는 아직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제국 동부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을 간다고 하던가.

권불십년이라고는 하나, 엘란두르의 권세는 무려 수 백년간 이어져왔다.

그 권세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엘란두르는 언제고 반드시 재기한다.

하지만··· 엘란두르가 재기한다고 한들, 지금의 루벤을 넘어설 수 있을까?

가신들 중 그 어느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직접 루벤의 힘을 겪었기에 절대로 끄덕일 수 없었다.

엘란두르는 루벤을 넘어설 수 없다.

결국 시간의 문제일 뿐, 엘란두르는 몰락할 것이다.

따라서 엘란두르의 가신들인 이들 또한 그와 함께 몰락할 것이다.

예전과 같은 권세를 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지기한 목숨이라도 붙잡고 싶다면.

“모,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하겠··· 습니다.”

어느 쪽에 서야할지는 명백한 일이었다.

가신들의 대답에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신들을 호송한 루벤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조만간 이들과 함께 황궁으로 갈 것이다. 그때까지 이들을 잘 대우해주도록.”

루벤의 병사들은 절도있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시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남은 것은 황궁으로 가 엘란두르의 만행을 밝히는 일만 남았다.

그리고 아르나이즈 전당으로 가보라는 카르제의 유언.

골드 화폐를 찍어내야하는 일까지.

‘할 일이 산더미네.’

전쟁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시안은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하고자 영주성 Lv.4로 향했다.

거진 황궁과 비견될 만한 영주성 Lv.4

“슬슬 영주성도 업그레이드를 해야하나.”

영주성의 복도를 거닐던 시안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크게 불편함이 없어서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았었다.

물론 지금도 지내는 것에 딱히 불편함이 있는 건 아니었다.

불편하기는 커녕 이보다 더 쾌적할 수는 없었다.

“조금 좁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공간의 협소함은 조금 불편했다.

그리고 이 역시나 생활 공간의 협소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 번에 대회의실이 조금 협소했단 말이지.”

공적인 공간의 협소함.

수인족들이 합류하면서 루벤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

그리고 여타 다른 영지와는 달리 루벤은 각기 다른 종족들이 모여살고 있었다.

정확히는 대륙의 모든 종족들이 모여사는 대륙 유일한 영지였다.

알게 모르게 엇갈리고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각 종족의 대표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소회의실도 몇 개 있었으면 좋겠는데.”

서로 모여 대화를 나누고 회의를 하는 공간.

언제든 편하게 와서 화합의 장을 이루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거기에 각종 편의 시설까지 생각하면··· 역시 슬슬 업그레이드를 해야겠는데.”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시안은 곧장 스마트 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영주성 Lv.5로의 업그레이드 비용을 확인하려던 찰나.

[긴급 점검이 진행 중입니다.]

[점검 동안에는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

.

“아, 맞다. 점검 중이었지.”

잠시 잊고 사실에 시안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15억에 달하는 현질 끝에 기절해버린 모바일 영주.

“이번엔 점검이 언제 끝나려나···.”

시안은 다시 스마트 폰을 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어차피 지금 골드도 없어서 황궁으로 가서 골드도 찍어내야 하니까.”

여러모로 황궁부터 가야 일들이 많았다.

그렇게 시안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집무실의 문을 열려던 찰나.

“얘가 왜 여기에 있어?”

문득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전에 시안은 이미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기감으로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으니까.

이제 평생 깜짝 놀라는 일 따위는 없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시안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보인 집무실의 풍경.

“나도 따라갈래.”

그 안 쪽으로 백금발의 여인, 아리아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중얼거린 시안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아리아는 시안이 문을 열자마자 다짜고짜 말을 걸어왔다.

“어딜 따라가?”

“너 지금 황궁으로 갈 준비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나도 따라갈래.”

시안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왜 따라와?”

“따라가면 안돼?”

“네가 황궁에 갈 이유가 뭐가 있다고? 신성 제국의 성녀가?”

“신성 제국의 성녀면 황궁에 가면 안돼?”

“아니 그러니까···.”

시안은 뭐라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같은 말만을 반복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아리아 또한 알고 있다는 듯, 재차 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괜히 따라간다는 게 아니야. 다 너 도와주려고 따라가는 거라고.”

“도와줘? 나를?”

“황궁에 가려는 이유가 엘란두르와 악마와의 연관성을 입증하고자 하는 거지?”

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게 쉽겠어? 듣자하니 샤를롯 제국에서 엘란두르의 위명이 굉장하던데··· 사람들이 네 말을 쉽게 믿어줄까?”

“쉽진 않겠지.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특히나 엘란두르 가신들의 중언까지 확보했으니 더더욱 가능성은 높았다.

황제와 황태자를 설득하고, 황가를 움직일 수 있는 명분으로는 더없이 충분했다.

하지만.

“황제까지는 어떻게 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제국의 다른 귀족들과 백성들. 더 나아가 대륙의 사람들이 네 말을 순순히 믿어줄까?”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냐하면··· 그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정확히는 입증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일단 엘란두르라는 이름이 갖는 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악마라는 존재가 아직 생소하다는 것이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태자, 콘라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대륙에 악마가 재림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란두르에 대한 진실을 어느 정도 알고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엘란두르는 여전히 제국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었고.

악마는 여전히 천 년전, 신화 속에서나 존재했던 악이었다.

그런 악(惡)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면 순순히 믿어줄까.

물론 시간이 지나 증거가 드러나면 되는 일이긴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내가 힘을 실어줄게.”

“네가?”

“그래. 내가 누구라고 생각해?”

아리아는 신성 제국의 성녀.

그것도 교황 다음으로 입지가 단단히 성녀였다.

그리고 대중들에게 만큼은 교황보다 입지가 더 대단했다.

애초에 성녀와 악마의 관계는 신화 속에서도 증명된 일이었다.

성(聖)과 악(惡)은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자 존재.

그렇기에 성녀의 발언은 어마어마한 힘이 있었다.

존재하지 않는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어버릴 힘이 있었다.

증거가 없더라도 아리아가 ‘이 사람은 악마다!’ 라고 규정지으면, 사람들에게 있어 그 사람은 악마가 되어버린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성녀(聖女)라는 존재의 발언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성녀, 아리아의 말은 그만큼 힘이 있었다.

그렇기에 쉽사리 사용해서는 안되는 힘이었다.

하지만 엘란두르가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

대륙의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엔 아리아만큼 확실한 증인이 없다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나도 황궁에 따라갈래.”

“음···.”

시안은 잠시 고민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다시피 아리아가 도와준다면 일이 상당히 수월했으니까.

이건 되려 시안 쪽에서 부탁을 해야하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라.”

“정말? 정말로 따라가도 돼?”

“상황 정리되면 바로 출발할 거니까. 가서 미리 준비해둬.”

시안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가 먼저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히힛.”

다만, 아리아가 왜 저렇게 좋아라 하는지는··· 하나의 의문이긴 했다.

시안은 고개를 살짝, 저어보였다.

그리고 아리아를 지나쳐 가던 찰나.

“아, 참.”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춰 아리아에게 말했다.

“너. 황궁에 가서도 약속 절대로 잊지마.”

“약속? 무슨 약속?”

“벌써 잊었어? 황녀님께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 말이야.”

“황녀님께라면···.”

아리아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하지만 곧 떠오른 생각에 아리아가 다시 물어왔다.

“신어(神語)가 적힌 책을 네가 돈도 안받고 선물해준 거?”

“그래. 그거 황녀님께 입도 벙긋 하지마. 알겠어?”

아리아와 엘레나.

성녀(聖女)와 황녀(皇女).

다시는 두 사람이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건만.

사람 일이라는 게 참··· 한치 앞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한다고 한들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 괜시리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 순간.

“흐응···.”

갑자기 아리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미묘했다기보다는 요염해졌다고 하는 표현이 보다 정확했다.

눈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답지 않은 콧소리까지 흘러나왔다.

요염한 눈빛과 도도한 몸짓.

초월적인 미모와 더불어 아리아에게서 색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 봤던 아리아의 모습.

“너 하는 거 봐서?”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가 홀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보였다.

지어지는 눈웃음은 지난 번보다 더욱 고혹적이었다.

“······”

시안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요즘 얘가 왜 이래 진짜.

“됐다. 그냥 나 혼자 갈란다.”

시안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아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쳐왔다.

“아, 알았어! 절대 말 안할게! 말 안하면 되잖아!”

“아니야. 그냥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까. 넌 여기 있어. 아니다, 이 참에 신성 제국으로 돌아가.”

시안은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아리아는 그런 시안의 손을 다급히 붙잡으며 매달려왔다.

“진짜야! 진짜! 절대 말 안할게! 말 안한다니까! 아니, 힘은 뭐 이렇게 센 거야!”

아리아는 한동안 시안에게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시안과 한바탕 아닌 한바탕을 한 이후.

“그거 장난 한 번 쳤다고 삐치기는···.”

아리아는 투덜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뭐, 다시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은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몸소 도와주겠다는데 어? 반대로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무슨···.”

다시 가서 으름장을 놓아버릴까?

··· 싶었지만 아리아는 금방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랬다간 애써 돌려놓은 마음이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테니까.

아리아가 알고 있는 시안이라면 충분히 그럴테니까.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든 나랑 말 한 번 섞어보려고 안달인데 말이야.”

쟤는 어떻게 되먹은 건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뭐, 요즘엔 예전처럼 내 얼굴보고 구역질을 하진 않긴 하다만.

“조금 더 달라져도 괜찮은데 말이야.”

아리아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도 뭐, 같이 황궁으로 갈 수 있으니 소정의 성과는 있었다.

그렇게 아리아는 황궁으로 갈 준비를 하고자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딛으려던 찰나였다.

-응? 네가 왜 시안의 집무실에서 나와?

복도 한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라기 보다는 어떤 의지.

아니나 다를까 복도 한 쪽 벽을 뚫고 쑤욱, 한 여인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백은색의 머리와 고혹적인 외모의 소유자.

“남이사 시안의 집무실에서 나오든 말든!”

아리아는 레아를 향해 소리쳤다.

-이 년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렇게 앙칼져?

레아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윽고 한대 쥐어박으려다 금방 그 뜻을 접었다.

요즘 아리아의 신성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듣자하니 뮤리엘의 신어(神語)를 배우고 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 요즘 아리아는 레아의 사념에도 크게 꿇리지 않았다.

아리아를 쥐어박으려면 레아도 제대로 힘을 발휘해야했다.

-에휴, 마음이 넓은 이 언니가 참아야지. 누구와는 달리 마음이 작지 않으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긴, 마음이라는 건 보통 가슴 속에 있잖니. 그러니 가슴의 크기에 따라 마음의 크기도 정해지는 법이지.

“너 이씨! 나 안 작다고!!”

아리아가 울컥, 하며 소리쳤다.

욱하는 성질에 한바탕 싸울까 싶었지만··· 금방 그 뜻을 접었다.

요즘 신어를 배운 덕분에 레아와 어느 정도 맞먹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맞먹는 정도에 불과했다.

레아를 제압할 수 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에베베. 그럼 난 간다~.

레아는 메롱, 하는 표정과 함께 자리를 떠나갔다.

아리아는 그런 레아를 바라보다 문득.

“레아.”

떠나가는 레아를 붙잡았다.

레아는 순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멈춰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아가 자신을 레아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야 혹은 너.

주로 부르는 호칭이 이러했으며 ,간혹 할머니와 같은 것으로 부르곤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레아라니?

몸을 돌려 바라보자 아리아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 또한 짓고 있었다.

평소 아리아와는 전혀 다른 모습.

“나··· 너한테 뭐 좀 하나 물어봐도 돼?”

-이 년이 진짜 뭘 잘못 먹었나.

레아는 진짜 뭔가 싶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레아는 다시 아리아 앞으로 다가왔다.

-뭔데 이 년아.

레아가 묻자, 아리아가 약간의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카일도 그랬어?”

-갑자기 뭔 개소리야?

레아는 진짜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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