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질하는 영주님!-291화 (291/322)

291화 - 카일의 일지(1)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채 쓰러져 있는 카일.

시안의 몸이 덜컥, 굳어버렸다.

생각의 흐름 또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숨길 수 없는 경악이 얼굴에 드리우며, 시안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시안을 경악하게 한 이유는 다름 아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카일’ 이 쓰러져 있다는 것.

둘째는 카일 이 ‘쓰러져’ 있다는 것.

시안은 차분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봄에 시안은 이 낯선 곳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륙이··· 아닌 건가?’

시안이 살고 있는 세계가 아니다.

울창한 숲과 카일의 모습.

처음엔 어둠의 숲인줄 알았다.

그러나 어둠의 숲이라고하기엔 분위기가 달랐다.

물론 천 년전에는 어둠의 숲은 어둠의 숲이라 불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과는 다른 풍경이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곳은 어둠의 숲이 아니었다.

숲의 주변을 드리운 수많은 식생들.

저건 대륙에서 볼 수 없는 식생들이었으니까.

물론 시안이 대륙의 모든 식생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이 정말 어둠의 숲이라면.

저것은 결코 대륙에서 자생하는 식생이 아니었다.

‘그럼 여긴 어디···.’

바로 그 순간.

사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안의 뒤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앞선 카일과는 달리, 이번엔 시안은 기감으로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해서 몸을 숨길까도 싶었지만 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여러모로 물어볼 것이 많았으니까.

이윽고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이는 어떤 노인이었다.

머리가 희끗하게 쇠어 한스보다도 더욱 나이가 들어보였다.

그러나 나이답지 않게 정정한 몸은 단련한 무인(武人)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교주!!”

그리고 들려온 노인의 외침.

‘교주?’

시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전에 먼저 드는 의문은 이것.

‘내가 보이지 않는건가?’

노인은 어째서인지 시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안을 지나쳐 헐레벌떡, 쓰러진 카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었다.

시안이 몸을 숨기지도 않았고, 기척도 감추지도 않았거늘.

노인은 시안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이거 설마···.’

그렇기에 시안은 지금 이 현상을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광경.

이건 진짜 현실이 아니다.

정확하진 않겠지만 모바일 영주가 투영한 현실인 것 같았다.

다름 아닌 DLC 컨텐츠, 카일의 일지.

카일의 일지에 적힌 내용을 시안에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래서 스마트 폰으로는 실행이 안된 거였네.’

시안은 생각에 확신을 더하며, 앞선 노인을 바라봤다.

“교주! 괜찮으십니까!”

노인은 쓰러진 카일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피칠갑된 카일의 상태에 노인이 크게 당황해보였다.

그 모습을 미루어본 바.

‘카일이 교주라는 말인가?’

노인이 그렇게 불렀으니 아마 그럴 터였다.

그런데 교주라니?

그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느 것은 교단의 교주였다.

한 마디로 어떤 종교의 수장을 의미하는 바였다.

‘카일이 종교의 수장이었다고?’

이게 대체 뭔 개소리란 말인가.

설마 저 흑발의 사내가 카일이 아닌 건가?

차라리 이쪽이 더 합당한 추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진 사내는 카일이 확실했다.

“어, 어쩌다가··· 어쩌다가···.”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카일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당장, 당장 자리를 피하셔야합니다. 조금 있으면 정파 무리들이 곧 들이닥칠 겁니다.”

노인은 다급한 표정으로 카일을 재촉했다.

“정파 무리들만이 아닙니다. 귀문대, 마혈대, 12 혈도방은 물론, 사파와 흑도의 모든 무리가 돌아섰습니다.”

노인은 쓰러진 카일을 부축했다.

늘어진 몸을 일으킴에 덥썩, 카일이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왜··· 날 살려주었지.”

카일은 노인에게 물었다.

상당히 힘이 없어 죽어가는 말투였다.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카일은 어떤 무리들에게 당해 곤경에 빠졌다.

그나마 저 노인의 도움으로 카일은 목숨만은 구제할 수 있었다.

또한 노인의 말투를 보아하니 배신 쪽에 가까워보였다.

카일을 따르던 무리들이 배신을 한 것 같았다.

그로써 카일이 곤경에 처한 것.

‘그래도 이상한데?’

하지만 시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런 시안의 의문에 답을 해주기라도 하듯.

“제가 되려 묻고 싶습니다 교주.”

노인은 카일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왜 저희들을 살려주셨습니까.”

그리고 시안은 그때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카일이 지금 저 상태에 놓여있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

물론 이곳이 시안이 살던 세계와 다름은 알겠다.

그러나 시안이 두 눈으로 직접, 카일의 힘을 느끼고 경험했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카일의 강함은 절대적이다.

“저희를 모두 죽이실 수 있으셨잖습니까. 하고자 하셨다면··· 충분히 하실 수 있지 않으셨습니까.”

노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체 왜···.”

노인의 말에 카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의 말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교주는 화가 나지도 않으십니까? 정파 놈들이야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흑도와 사파 무리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주께서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고 배신을 일삼은 폭도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노인은 분노로 가득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럼에도 카일은 아무런 말도, 반응도 해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참의 시간이 지나.

“······ 되었다.”

되었다.

그 말, 한 마디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런 카일의 답에 노인이 이를 까드득, 씹었다.

그리고는 쓰러진 카일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일단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여기서 이렇게 죽으시면 뭐가 달라진단 말입니까! 그냥 개죽음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셔야합니다. 그 어떤 이유라도 좋습니다. 비루하게 목숨을 빌어 살아나십시오!!”

노인은 다시 한 번 강제로 카일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카일의 몸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일은 더 이상 삶의 욕구가 없어보였다.

“오래 전, 현령에게 제 딸이 끌려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노인은 그런 카일을 향해 소리쳤다.

“관아 앞에서 이틀 밤을 기다렸지만 아이가 나오지 않았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사흘 뒤 늘그막의 저녁 무렵, 초췌한 모습으로 제 딸 아이가 나왔을 때. 집에 돌아가 칠주야 슬피 우는 딸의 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때. 그러다 문득, 딸의 울음이 들려오지 않아 확인한 방에는 딸의 시체만이 있었을 때.”

노인은 카일에게 읍소를 하듯, 계속 말을 이었다.

“딸 아이를 묻던 차디찬 겨울 날, 땅이 얼어붙어 파이지 않았을 때. 까지고 깨져 뽑혀진 손톱 위, 흐르는 피가 언 땅을 적셨을 때. 주저 앉아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언 땅을 녹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함에 울부짖던 그 날.

“너의 비명을 위해 기꺼이 검을 들어주겠노라, 제게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하늘의 이치를 증오한다.

이 썩어빠진 세상의 법도를 다시 세우자.

“그리하여 온 천하를 마(魔)로 물들이자. 나와 함께 마도천하(魔道天下)를 이루자.”

노인은 카일을 꿋꿋이 일으켰다.

“저와··· 그리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실로 광오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빈정거리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이 사내가, 카일이, 그러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믿음은 심히 확고하여 틀어짐이 없었고.

그 확고한 믿음이 모여 마(魔)를 믿는 교단을 이루었으니.

카일은 그 교단을 이끄는 수장, 교주이자.

끝내 천하의 하늘(天)을 마(魔)로 물들이는 존재, 천마(天魔).

“천마께서는 제게··· 분명 그리 약조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노인은 발악과도 같은 외침을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번엔 카일은 노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거짓···이었다.”

노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뿐이었다.

“네게 한 말들은 모두··· 한낱 동정이자 거짓에 지나지 않았다. 쿨럭···!”

쏟아지는 피와 함께 카일의 몸이 크게 꺾이며 털썩.

애써 일으킨 카일이 다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노인은 그런 카일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쓰러진 카일 앞에 같이 주저 앉아버렸다.

“참으로··· 참으로 매정하십니다 교주.”

원통하고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제가, 제가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노인은 나지막히 읊조릴 뿐이었다.

일순간 카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약간의 당황 어린 두 눈이 노인을 바라봤다.

“알고··· 있었습니다. 교주께서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노인은 카일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향리의 폭리를 고발했다는 죄목으로 관아에 문초를 당해 아들을 잃은 적혈대주. 그의 아픔을 보듬어준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유곽에서 태어나 아비의 얼굴을 모르고, 어미에게도 버려져 밤낮으로 사내에게 다루어지던 나찰대주를 거두어 준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한 마을에 지독한 흉년에 들이닥쳐 아사자가 속출하고 길거리마다 인육이 걸려있음에, 언젠가 반드시 흉년을 베어내겠노라 말씀하시던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천하(天下)에 들려오는 비명은 너무도 많았다.

지독한 원한에 부르짖는 비명.

처절한 고통에 울부짖는 비명.

쓰라린 괴로움에 우짖는 비명.

가혹한 고초에 통곡하는 비명.

그러나 소리 없이, 묻히는 비명.

온 천하에 잡다한 비명이 이리도 많았던가.

많아 셀 수 없고, 세고자 함에 세상의 썩은 고름이 터져나온다.

생각이 쓰라렸고, 정신은 아려온다.

그렇기에 다가설 수 없다.

다가서면 터져나오는 썩은 고름에 스스로가 오염되니.

그렇게 우리는 버려졌다.

천하는 우리를 외면했고, 세상은 우리를 버렸다.

“그런 저희들에게 천하를 향해 할 말이 있느냐. 그리 말씀하시던 분이 누구란 말입니까.”

허나, 너희들의 말은 천하에 들리지 않음에.

잡다한 비명이 되어 소리 없이 묻힐 뿐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들을 대신하여 비명을 부르짖겠노라.”

그럼에도 돌아보지 않는다면 천하를 할퀴어 상처를 내주겠노라.

그리하여 우리가 여기에 있음을.

우리의 비명이, 슬픔이, 고통이, 아픔이, 원한이, 이곳에 존재함을.

“내 온 천하에 알려주겠노라.”

너희들을 대신하여 세상을 베어내는 검이 되어주겠노라.

기꺼이 그 썩은 고름을 짜내어 주겠노라.

터져나온 고름에 내가 오염이 될지라도 망설이지 않겠노라.

설령 이 길의 끝에 지옥도가 펼쳐져있다한들.

“본좌는 기꺼이 너희들을 위해 지옥으로 걸어가겠노라··· 내 스스로가 지옥이 되겠노라. 그리 말씀하셨던 분이··· 대저 누구란 말입니까.”

노인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눈으로 쓰러진 카일을 바라봤다.

“그런 교주께서 온 천하를 마를 물들이다니요.”

눈물 어린 시선을 지음에.

카일에게서 흐르는 피가 붉고도 붉음에.

“교주께서··· 교주께서 결단코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아···.”

노인은 다시 한 번 쓰러진 카일을 일으켰다.

온몸으로 카일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카일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 번.

이것이 원래 그래했고, 또한 잔혹한 진실이라는 듯.

“모두 거짓이라··· 말하지 않았느냐.”

노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뿐이었다.

푸확!

노인의 전신으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부릅, 떠진 노인의 두 눈이 카일에게 향했다.

“교, 교주··· 어째서···.”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

털썩, 노인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져내렸다.

노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봤다.

그러나 카일은 매정하게 등을 돌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안은,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카일이 왜 저랬는지.

아니, 왜 저래야만 했는지.

시안은 알 수 있었으니까.

“여기다! 여기서 소리가 들렸다!”

한쪽에서 커다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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